仙道 丹功 佛敎/유학

朝鮮 儒學의 뿌리와 正統 系譜

초암 정만순 2018. 2. 6. 21:52



朝鮮 儒學의 뿌리와 正統 系譜



목차

1.총고향주(聰孤珦周) 유림배향(儒林配享)

2.우리나라 유학의 뿌리는?

3.조선 유학 이전의 선구자들 -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는, 유림()이 문묘에 모셨다.

우리나라 유학의 뿌리는?

유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는 문묘()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문묘는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입니다. 이곳에는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의 정통 계보를 이은 안자()·증자()·자사()·맹자()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자의 10대 제자인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재아()·자공()·염유()·자로()·자유()·자하()와 남송 성리학의 6현()인 주돈이()·장재()·정호()·정이()·소옹()·주희()와 우리나라의 명현() 18인을 종사()하여 함께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문묘에 배향·종사된 인물들은 '유학의 최고 반열'에 오른 성인이자 명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성균관의 문묘종사()를 두고, 유학의 한 학파()에 불과한 성리학(주자학)을 중심으로 배열했다거나 혹은 조선 후기 당쟁에서 승리해 권력을 독점한 노론() 중심의 시각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필자 역시 이 주장이 매우 일리 있고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명현()으로 성균관의 문묘에 모셔진 18인 중 당파 싸움이 거셌던 조선 중·후기의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누구나 그 학문과 덕망을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유학자들이라는 주장 또한 큰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유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이들 18인의 명현()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온전히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고, 필자는 이 명현들을 소개하는 데 만족해야 할 듯합니다.

시대 순으로 따져 가장 먼저 18인의 명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설총()입니다. 그 다음은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사람인 최치원()입니다. 고려 시대의 유학자로 '18명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둘 뿐입니다. 바로 안향()과 정몽주()가 그들입니다. 이하 14인은 모두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입니다. 이들 14인의 유학자들을 시대 순서에 따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정여창( : 세종~연산군) → 김굉필( : 단종~연산군) → 조광조( : 성종~중종) → 이언적( : 성종~명종) → 김인후( : 중종~명종) → 이황( : 연산군~선조) → 이이( : 중종~선조) → 성혼( : 중종~선조) → 조헌( : 중종~선조) → 김장생( : 명종~인조) → 김집( : 선조~효종) → 송준길( : 선조~현종) → 송시열( : 선조~숙종) → 박세채( : 인조~숙종) 등입니다.

당쟁이 거셌던 선조() 이후 '누구를 문묘에 배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당파 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지만, 설총과 최치원, 안향과 정몽주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당파들이 한 가지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 네 사람의 명현이 우리나라 유학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조선 유학 이전의 선구자들 -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

'(총고향주)'에서 (총)은 설총, (고)는 고운(), 즉 최치원을 이릅니다. 그리고 (향)은 안향, (주)는 정몽주를 일컫습니다. 이들 네 사람은 유학의 이념이 나라와 사회 전체를 지배한 조선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에 유학의 전통을 뿌리내린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총은 잘 아시다시피, 고승()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부터가 남달랐던 설총은 학문과 문장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재주와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설총이 이룩한 학문 세계와 후대의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아 있습니다.

聰性明銳 生知道待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
설총은 본성이 총명하고 영리해 태어날 때부터 학문의 도(道)를 알았다. 방언(方言 : 이두나 향찰)으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지금까지도 학자들은 그를 종주(宗主)로 떠받들고 있다. - 『삼국사기』 「열전」 '설총'

聰生而叡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설총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했다. 신라 10현(十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 : 이두나 향찰)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의 이름에 통달해, 육경(六經)과 문학에 주석을 달고 풀이했다. 지금도 해동(海東)에서 경서(經書)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傳受)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 『삼국유사』 「의해」편 '원효불기'

이 두 기록을 통해 설총이 고려 시대까지도 유학의 큰 스승으로 떠받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총은 유학을 신라에 본격적으로 전하고 확산시킨 장본인으로, 훗날 유학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 : 으뜸가는 스승)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최치원에 대해서는 앞의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자세히 소개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만 다루겠습니다. 최치원은 유학의 정치이념을 통해 몰락해가는 신라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에 의해 자신의 개혁 구상이 좌절당하자, 세상을 멀리한 채 은둔과 방랑의 나날을 보내다 세상을 떠납니다. 신라의 부패한 귀족 체제에 맞서다 꺾여 버린 자신을 두고, 최치원은 '부유( : 썩은 유학자)'니 '유문말학( : 유가의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이니 하며 자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왕건()이 나라를 일으키려 할 때 "계림()은 시든 누런 잎이고, 곡령( : 고려)은 푸르른 솔잎이로다."라고 읊어, 다가오는 미래는 왕건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은둔 생활 중에 기른 수많은 문인()들이 고려 초기 조정에 나아가 벼슬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현종( : 고려 제8대 임금)은 "최치원이 은밀히 태조()의 창업을 도왔다"며 그 공적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문창후()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고려 조정에 나아가 공()을 세우고 높은 관직에 오른 신라 출신의 관료들 중 최치원의 문하생들이 특히 많았던 탓에, 고려 임금들 역시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향()은 조선 시대를 풍미한 유학 학파인 성리학(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보급한 최초의 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향은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된 이후, 여러 차례 왕을 보좌하고 원나라를 드나들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공자와 주자( : 주희)의 화상을 그려오거나 혹은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안향은 원나라의 공자 사당에 참배할 때 중국의 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때 그가 성리학에 매우 정통한 데 놀란 중국학자들이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성리학에 깊게 심취해, 고려에 성리학을 보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토록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성리학의 젊은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해 일종의 장학재단이자 육영재단인 양현고()와 섬학전()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배출된 성리학자들은 훗날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한 신흥사대부의 주요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안향은 고려 시대보다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 높이 떠받들어졌습니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은 안향 덕분인지, 고려 말기 정치 무대를 장악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성리학자들이었습니다. 정몽주()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려 왕실을 끝까지 지키려다 끝내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는 오늘날까지 '절개와 의리의 화신'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외에도 그가 성리학의 가르침인 절개와 의리를 몸소 실천한 여러 사례들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스승인 김득배()가 간신인 김용()의 모함을 받아 효수된 후 시신이 저잣거리에 버려져 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간언()해 장례를 치른 사건이나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부모의 3년 상()을 치른 사례 등은 그가 평소 얼마나 '절개와 의리'에 투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만 해도, 이성계와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힘을 합했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정몽주는 성리학을 통해 고려를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목표를 지니고, 정치개혁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과 장려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을 보존하면서 개혁을 이루겠다는 정몽주의 온건 개혁노선은 역성혁명파인 급진개혁세력들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맙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곧 고려 왕실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정몽주가 그토록 힘써 고려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성리학의 이상은 조선의 사림세력을 통해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말기 유학자 장지연()은 자신의 저서 『조선유교연원()』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을 길재에게 전하고, 길재는 김숙자에게, 김숙자는 아들인 김종직에게,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김굉필은 다시 조광조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흐름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적통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성리학 곧 사림()의 계보를 잇는 시작점에 정몽주가 있음을 밝혀둔 것입니다.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비조()로 보는 견해는 일찍이 사림학파의 대학자인 고봉() 기대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선조() 때부터, '정몽주=조선 성리학의 비조'라는 인식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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