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號
이름은 사람이 삶을 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에는 토박이말로 지었던 이름이 한자(漢字)의 유입과 함께 한자(漢字) 이름으로 지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름에도 兒名․冠名․字․號․諡號(아명․관명․자․호․시호)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兒名은 어린아이 때의 이름으로 栗谷 李 珥(율곡 이 이)의 경우 珥(이)는 冠名이지만 兒名은 그의 어머니 申師任堂(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見龍(현룡)이라 하였으며 字는 叔獻(숙헌)이고 號는 栗谷이나 그 外에도 石潭(석담)․愚齋(우재) 등이 있다.
冠名은 장성해서 그 집안의 行列(항렬)에 따라 짓는 이름이며
字는 대체로 혼인한 후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어른 아닌 사람들이 이 字를 불렀고
號는 字 이외에 쓰는 雅名(아명)으로 학자․문인․서화가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었으며
諡號(시호)는 卿相(경상)이나 儒賢(유현) 등이 죽은 뒤 임금이 그 행적을 칭송하면서 追贈(추증)하는 이름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중에서 兒名 등은 거의 없어지고 冠名 ․號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인데 兒名은 대체로 무병장수를 염원하면서 천하게 짓는 경향으로 개똥이․쇠똥이․말똥이 등의 이름이 흔했다.
冠名이 熙(희)였던 고종 황제의 兒名을 개똥이라 하였고 黃喜(황희) 정승의 兒名은 都耶只(도야지)였으며 兒名이 그대로 介東․啓東․召東․蘇同․馬銅․馬東(개동․계동․소동․소동․마동․마동)이라는 冠名으로 되기도 하였다.
서민들은 兒名으로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하였으며 여성의 경우 특별한 사례 외에는 출가와 함께 兒名은 없어지고 대신 宅號(택호)가 따랐다.
이름을 한자로 지을 경우 외자이름도 있지만 姓(성)과 行列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성명 3자 가운데에서 선택권은 1字밖에 없었고 남은 1字도 같은 行列의 同名異人(동명이인)을 피해야 하고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 나오는 글자도 피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의 이름은 토박이말이었으나 한자의 유입과 姓의 보급에 따라 사람의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것은 땅이름이 한자화 했던 신라 景德王(경덕왕) 이후부터 심화된 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름에서도 그것이 토박이 이름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는데 가령 신라의 시조왕 赫居世(혁거세)는 불거뉘의 한자 표기이고 3대왕 儒理(유리)와 14대왕 儒禮(유례)는 똑같은 누리의 音寫(음사)인 것으로 해석되며 백제의 3대왕 己婁(기루)나 20대왕 蓋鹵(개로)도 같은 토박이말의 다른 표기인 것으로 보이고 있다.
토박이 이름의 기준은 ①출산 장소에 따른 것(부엌손․마당쇠) ②간지(干支)나 달 이름에 따른 것(갑돌이․정월이) ③성격에 따른 것(억척이․납작이) ④기원을 곁들인 것(딸고만이․붙드리) ⑤순서에 따른 것(삼돌이․막내) ⑥복을 비는 천한 것(개똥이․돼지) ⑦동식물․어류 이름에 따른 것(강아지․도미)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동물 이름이었다.
字나 號는 중국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本名(본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字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嗜好)나 덕(德)을 고려하여 붙여준 이름이며 字가 생기면 本名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本名을 諱名(휘명)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本名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字나 號를 사용하고 손아래 사람인 경우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는 本名을 사용한다.
字․號․堂號는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號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사대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號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는데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李太白(이태백)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蘇東坡(소동파)는 그의 본 이름인 李白(이백)이나 蘇軾(소식)보다도 號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고 李白이 죽은 지 10년 후에 태어난 中唐期(중당기)의 시인 白居易(백거이)나 韓愈(한유) 그리고 청나라 書家(서가) 鄧琰(등염)은 그의 본 이름대신 白樂天(백낙천)과 韓退之(한퇴지) 그리고 鄧石如․鄧頑伯(등석여․등완백)과 같이 姓氏(성씨)에 字를 붙여서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號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이나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던 관계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號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號는 늘어나게 마련이었고 號는 집안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의 堂號(당호)와 詩․書․畵․話(시․서․화․화) 등에 쓰는 雅號(아호)로 나누어지기도 했으나 양자간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 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李奎輔(이규보)의 경우 초기에는 詩․酒․琴(시․술․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三酷好先生(삼혹호선생)이라 號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白雲居士(백운거사)로 號를 바꾸기도 했으며 중국 晉(진)나라 자연시인 陶淵明(도연명)은 그의 집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스스로 五柳先生이라 號하였고 술을 좋아 한 李白의 별호는 醉聖(취성)이며 역시 술꾼인 白居易(백거이)는 醉戶(취호)라 自稱(자칭)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로 號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號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李滉(이황)의 退溪(퇴계)와 李珥(이이)의 栗谷(율곡) 그리고 徐敬德(서경덕)의 花潭(화담)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門人(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退溪門人․花潭門人․栗谷門人 등으로 號를 사용하였고 성리학자 曺植(조식)의 號 南冥(남명)은 莊子(장자)에 나오는 용어로서 老莊思想(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號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金正喜(김정희) 선생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되었는데 이렇듯 金正喜가 많은 號를 사용한 것은 詩․書․畵(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며 그의 대표적인 號는 秋史(추사)․阮堂(완당)․禮堂(예당)․詩庵(시암)․仙客(선객)․佛奴(불노)․方外道人(방외도인) 등으로서 儒․佛․道(유․불․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號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의 李德懋(이덕무)도 號에대한 욕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嬰處(영처)란 호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거짓 없는 마음을 썼으되 처녀의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움을 나타낸다는 뜻이고 蟬橘堂(선귤당)은 매미와 귤의 맑고 깨끗함을 사랑한다는 뜻이며 靑莊館(청장관)이란 堂號는 강호에 살면서 아무 영위함 없이 그저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먹고사는 신촌옹이라고도 불리는 靑莊(청장)의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이래로 號 辭典(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號譜(호보) 들의 편찬은 號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으며 1945년에 편찬된 大東名家號譜(대동명가호보)에는 號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암(巖)․실(室) 등으로 끝나는 號가 많았으며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또는 玩好物(완호물)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周時經(주시경)의 한힌샘 崔鉉培(최현배)의 외솔 등의 號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金廷湜(김정식)의 素月(소월)과 朴泳鍾(박영종)의 木月(목월) 등은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號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李相佰(이상백)의 號인 想白(상백)과 시조시인 李鎬雨(이호우)의 號인 爾豪愚(이호우)는 이름과 號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號보다는 자신의 실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號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號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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