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유학

書堂 鄕校 成均館 書院

초암 정만순 2018. 2. 6. 08:34




書堂 鄕校 成均館 書院

 

 

서당은 향리에 있는 사설 기초교육기관이고 서원은 향리에 있는 사설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향교는 한 고을에 있는 국립 지방교육기관이고 성균관은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또 서원과 향교 성균관 모두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공통된 기능을 갖고 있다. 

즉 서당은 기초교육을 담당하고, 서원.향교.성균관은 고등교육과 제향을 함께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서당(書堂) / 예로부터 내려오는 사설 교육 기관

 

 

서당에 관한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부락 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당은 나라의 허가나 자산 없이도 여는 것이 가능해서 학식이 있는 선비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훈장(訓長)이 교육 취미나 소일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경우, 마을의 몇몇 유지 또는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모셔 자제를  교육시키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자기가 직접 만드는 경우등이 있었다.

훈장과 그 가족의 생활비는 학부형이 부담하며 봄가을로 곡식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접장·학도로 되어 있었다. 규모가 큰 경우에는 학력이 우수하고 연령이 높은 학생을 접장으로 세우기도 했다.

학생은 8∼16세의 연령에 있는 양반과 평민층의 아동들이었다.

학생이 맨 처음 대하는 책은  <천자문>이나 <유합>이다. 이 책을 통하여 글자에 대한 음훈을 깨우치고, 음독하는 법을 배운 다음 <계몽편>이나 <동몽선습> 또는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을 통하여 초보적인 구두와 문장의 뜻을 해독하는 훈련을 쌓는 한편 책 속의 교훈적인 내용을 터득하게 된다. 

 

다음은 <십팔사략>, <통감>, <소학> 등을 배워 문리가 트이고 견식이 열리면 사서오경을 배우게 된다.

 

   

향교(鄕校) / 조선 시대의 지방 교육 기관.

대구향교 / 전면에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과 좌우에 학생들이 기숙하던 東西齋가 배치됨   

 

고려 시대의 향학을 계승한 것으로 태조가 그 지방의 학교가 흥함으로써 지방관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다 하여 크게 쇄신,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향교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를 중심으로 강당인 명륜당, 우리 나라와 중국의 옛 어진 선비들을 제사하는 동·서의 양무,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의 양재가 있었다.

고을별로 학생의 수를 정하여 양반 자제들에게 유교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 곳에서 공부한 후 1차 시험에 합격하면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발달로 쇠퇴하다가, 1894년(고종 31년)에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름만 남아 문묘에 제사하는 기능만 맡게 되었다.

 

 

성균관(成均館) / 고려 이래 갑오개혁 때까지의 국내 최고의 교육 기관.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한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은 고려 충선왕 때에 ‘국학’을 고쳐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공민왕 때 한동안 '국자감’으로 부르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불렀다.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고의 고등 교육 기관 구실을 하였다.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 및 15∼30세의 양반 자제들로서 수업 연한은 9년이었다. 정원은 사정에 따라 200명 또는 120명으로 변동이 있었으며, 조선 말에는 100명으로 줄어들었다.

 

성균관의 구조는 명륜당(유학을 강의하는 곳), 문묘(공자를 받드는 사당), 양재(유학생들의 기숙사), 존경각(도서관), 비천당(과거 보는 곳)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 때에는 이 곳을 경학원(經學院)이라 불렀고, 그 뒤 명륜 전문 학교를 세웠는데, 광복 후에 성균관으로 다시 바로잡았다. 그리고 유학 교육을 이념으로 한 성균관 대학교를 세웠다.

 

 

서원(書院) / 조선 중기부터 민간에 보급된 사학(私學) 기관.

도산서원 전경

 

 

서원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때 설치되었던 서원에서 유래된 말로 선현을 제사하는 사당과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를 아울러 갖추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배불 숭유 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을 대신하여 서재, 서당, 서원 등을 장려하였다.

사당과 서재를 모두 갖춘 서원으로는 1542년(중종 37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에다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백운동(白雲洞) 서원이라 한 것이 최초의 것이며, 이후 전국적으로 서원이 설치되었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을 비판하는 사림의 의견을 모으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서원이 늘어가면서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을 위한 집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864년(고종 1년)에 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금하였다.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 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모범이 될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5대서원(五大書院)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 옥산서원(玉山書院 경북 경주), 도산서원(陶山書院 경북 안동),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 등이 있다.

 

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중인 9대서원으로 위 5대서원 외에 남계서원(藍溪書院 경남 함양),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남 장성), 무성서원(武城書院 전북 정읍), 돈암서원(巖書 충남 논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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