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理學的 談論과 書院 建築 그리고 道東書院
성리학 담론이 서원건축에 끼친 영향
서원건축에는 성리학적 세계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인간 중심의 자연관에 의해 입지와 구성이
정해졌으며,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규모에서는 그릇으로서의 건축을 중요시한 절검정신이 돋보인다. 또한 오로지 학문과 수양만을 위한 그곳엔
성리학적 질서가 충만하고 외부적 근엄함과 내부적 개방성이 공존한다.
글 /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
사진 / 김대벽ㆍ배병우ㆍ안장헌
서원은 조선시대 특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굳이 따지자면 사립대학의 성격을 갖는다. 관학인 향교와는
설립 주체뿐만 아니라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달랐다. 서원은 유학 가운데서도 고려 말부터 신유학으로 수입, 정착된 성리학을 교육하여 성리학적
전사들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서원에서 양성된 전사들은 중앙정치계와 향촌사회를 장악하여 그들의 이상, 즉 성리학적 세계를 구현하려
노력했다.
사립 교육기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선생의 학풍에 따라
서로 다른 경전해석에 기반한 학파들이 형성되었고, 이런 지역적 학파들은 중앙정계의 정권투쟁과 연계되면서 당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물론
당쟁의 부정적 측면들이 서원의 폐해로 지적되지만, 적어도 초기의 서원들은 성리학을 조선사회의 주도적 이념으로 정착시키고, 사회의 질서를
구축하며, 정치의 명분과 도의를 실천하는 건강한 역할을 수행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건축이 곧 인격이라 할 수 있을까?
몇 안 되는 현존 서원들만
살펴봐도 초기에 건립된 도동서원, 소수서원ㆍ도산서원ㆍ필암서원ㆍ병산서원ㆍ등에는 엄격한 규범적 틀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들이 강하게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서원의 전성기였던 17세기 이후 초기의 건강한 성리학이 형식적 예학에 치중되고, 서원이 학문보다는 정치적 거점으로 인식된 중,후기에
건립된 서원에서는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개성적 해석보다는 규범적 맹종이 두드러진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서원건축만큼 사상적 영향력이 강하게
표현된 건축도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자연관을 담은
입지와 구조
관념과 명목을 중시한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에서부터 인간의 심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성리학의 기초적 우주론은 많은
중세적 논쟁들을 야기한다. 절대자로서 신을 인정하지 않는 동아시아적 전통에서 이러한 논리적 진화과정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理)인가, 기(氣)인가? 우주론적 전개와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孝)를 행하는 길인가? 등등의 모든
논쟁과 질문들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흔적들이다.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메커니즘을 동일한 체계로 파악하려 했고, 자연이란 인간의 이성과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은 이론과 행동, 관념과 현실, 마음과 몸을 일치시키려는 특유의
형이상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자연관은 서원의 입지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원건축의 지리적 입지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원 안에서 바라다볼 수 있는 시각적 대상, 즉
안대(案對)였다. 도동서원은 낙동강 건너 멀리 고령 땅의 산봉우리를 보기 위해 북향하고 있다. 북향을 하면 햇빛을 받아들이기도 바람을 피하기도
매우 불리해진다. 그럼에도 정해진 안대를 향해서 건축의 구성축을 정하고 건물들을 배열한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중심은 원장이 앉아 있는
강당건물이 된다. 원장이 바라보는 곳이 무조건 남쪽이며, 자연방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장으로 대표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방위체계를
재조직하기 때문이다.
서원의 외향적 경관구조 역시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여실히 보여 준다. 외부에서 서원건축의 형태를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원 안에서 보이는 외부의 경관이 중요하다.
건축적으로 말한다면 내향적 경관보다는 중심에서 바라다보는 외향적 경관이 중요하다. 자연은 인간의 관념으로 재조직할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원건축은 바깥에서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무엇이 보이는지가 중요한
건축이다.
서원의 명칭들도 내다보이는 앞산의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 옥산서원은 앞산인 자옥산에서, 병산서원 역시 앞의 병산의 이름을 따랐다. 반면 불상과 건물이 신앙의 대상이 된 불교건축은 뒷산이 더
중요하다. 신도들에게 건물의 배경이 되는 뒷산 역시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층을 위한 형이상학의
공간
유학 또는 유교는 근본적으로 학문을 연마함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는 철학이자 종교체계이며, 문자를 매개로 전달된다.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대일 지도를 통해서 학맥이 유지되는 교육방법을 고수해
왔다.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한 소수의 종교요 학문이었던 것이다. 일반 민중들은 통치와 교화의 대상일 뿐, 유교적 질서의 과실을 향유하거나 학문의
즐거움을 나누는 동반자가 아니었다. 유교의 건축은 당연히 소수 엘리트를 위한 장소요, 그들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서원건축이 이른바 인간적 스케일로 구성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이용자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그들의 선민의식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선택된 소수만이 사용하는 유교적 공간은
대중들에게는 폐쇄적인 동시에 내부의 거주자들에게는 모든 곳이 개방되는 양면성을 갖는다. 서원건축에 공존하는 외부적 근엄함과 내부적 개방성은
선택된 공간만이 취할 수 있는 성질이다.
서원의 마당과 불교
사찰의 마당을 비교해 보면, 서원 공간의 인위성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불교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서면 주건물 뒤로 뒷산이 배경을 이루어 건물과
자연이 일체화된 형태를 구성한다. 반면 서원의 강당 앞에서는 뒷산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조건의 경사지에 입지하더라도, 불교 사찰과 달리 주변
자연을 인지할 수 없도록 건물들의 위치를 정하고 거리를 조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원 마당은 철저하게 인위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인 인공적 장소가
된다. 자연 속에 있되 자연을 격리시키고 오로지 학문과 수련만을 목적으로 하는 추상적 공간이 된다.
절검정신이 담긴 그릇으로서의
건축
성리학 정신이 300여 년 간 세상을 지배할 때
설립된 서원건축은 최고의 엘리트이며 지배층인 사림들이 세우고 경영한 곳이다. 당연히 고도의 재력과 정보와 기술이 동원된 최고의 건축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원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건물은 화려하지도 장식적이지도 않다. 그저 무표정한 채로 담담하고 소박한 건물들
뿐이다.
당시 사회적 위상이 최저였던 불가의 사찰들은 오히려
화려하고 장엄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물론 서원의 난립과 비종교성으로 인해 충분한 모금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라고
쉬웠겠는가?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성리학과 불교의 건축관의 차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성리학자들은 건물을 의복과 같이 생각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큰 옷을 입을 수는 없다. 옷이란 몸에
맞아야 옷다운 역할을 하듯이, 건축물 역시 최소의 기능과 필요를 충족시키면 되는 수단일 뿐이었다. 옷은 자신의 신체를 감싸 주는 그릇일 뿐
남들에게 자랑하고 감상시키는 대상물이 아니며, 건축 역시 미천한 타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대상물이 아니었다. 건축물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불교와는 상반되는 건축관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건축으로
담을 수 있는 그 무엇이지, 건축물 자체가 아니었다. 그 무엇이란 자연일 수도 있고 도(道)일 수도 있다. 따라서 건축은 반(半)외부화,
개방화된 일종의 액자이며 그릇이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내부공간은 무성격화, 투명화한다. 액자가 아름답다고 명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액자에 끼워진 그림이 명작이어야 하는 것처럼,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그곳에 담기는 인간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었다.
원형에 대한 향수로 획일화된
건축
조선의 주세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원형으로 삼아 백운동서원을 창설했고 이후 서원의 이상적 모델도 백록동서원이었다. 주세붕과 서원운동의 후예들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
적도 없고, 서원의 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건축규범의 단편들과 서원의 교육방향 및 규칙들을 수록한
주자의「백록동서원게시(揭示)」는 주세붕의 원전이 되어 「백운동서원규(規)」로 탈바꿈되었다.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수백 년 전 중국인
주자가 마련한 규범을 좇아 이름까지 돌림자로 정한 채 창건되었다.
주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들이 행한 행동양식이 성리학 정착 단계에서 조선조 지식인들의 원형이
되었듯이, 중국의 유교적 건축들이 구체적으로 모방, 재해석되어 하나의 건축유형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이 중국에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정착된 건축형식은 곧바로 절대적 규범으로 여겨졌고, 거부할 수 없는 원칙으로 작용했다. 원형의 재현을
방법론으로 채택한 유교건축에서 유형이 건축생산의 강력한 도구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서원과 유사한 기능의 향교건축은 이미 건축적 유형이 정착되어 있었다. 후발 건축형식인 서원건축이
향교건축의 유형을 좇아 전학후묘(前學後廟)와 좌우대칭의 유형을 채택한 것 역시 원형에 대한 존중이라 볼 수 있다. 서원건축의 유형은 선택 가능한
범례가 아니라 꼭 준수해야 할 규범으로 작용한다.
유형에 대한
집착과 원형에 대한 향수는 유교건축물들을 획일적이고 보수적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사유재산이어서 비교적 변화가 자유로웠던 서원건축마저도 몇몇
예들을 제외하고 백편일률이 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특히 서원의 전성기였던 17세기에 유형을 보수적 질서를 유지하는 거대한 건축적 예(禮)로
인식한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경(敬)과 성(誠)의
공간
조선 성리학의 양대 주류라 할 수 있는 퇴계의
영남학파와 율곡의 기호학파는 지역적ㆍ인맥적 차이보다는 학문적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형성된 학파다. 퇴계파가 사물의 본성을 인식하며 진리를
깨닫고자 한 관념론적 근본주의에 가깝다면, 율곡파는 인간의 심성을 수련하고 일상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한 현실론적 실천주의에 가깝다.
심성교육 방법론도 약간 달랐다. 퇴계파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경(敬)’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고, 율곡파는 수양의 방법론인 ‘성(誠)’을
지고의 가치로 삼았다.
‘경’이란 항상 깨어 있으며 사물의 본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서원의 공간은 정숙하고 경건하게 유지돼야 한다. 어떠한 소란이나 일상적 행위는 가급적
금지된다. 반면 ‘성’이란 그릇됨을 생각하지도 그릇되게 행하지도 않는 구체적인 인격ㆍ학문 수양의 방법론이다. 성에 대한 가치는 곧바로 구체적인
행위강령인 예론으로 연결되지만, 현실론적 성향을 가진 율곡파의 공간개념은 오히려 융통성이 있다. 지형과 형편에 맞춰 다양한 변형이
허용된다.
경과 성은 어찌 보면 교육의 양면이다. 하나가 본질에
대한 목표라면 하나는 구체적인 교육방법이다. 서원의 공간은 항상 긴장과 각성을 유도한다. 동재와 서재는 마주 보면서 유생들 서로 간의 격려와
감독을 통한 긴장을 유지시킨다. 원장실 또는 강당에서는 동ㆍ서재에서 행해지는 거의 모든 행위를 바라볼 수 있고 지휘 감독한다. 자발적이면서도
타율적인 감독이 가능하도록 강학부분의 공간은 마당을 향해 모두 개방되어 있다. 강당의 넓은 대청마루와 동ㆍ서재의 툇마루들은 마당을 향해 열려
있고, 마치 건물들에 압축력을 가해 긴장감을 짜내는 듯하다.
그러나 유생들이라 해서 항상 긴장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일정한 휴식과 해소도 필요하다. 긴장감으로
팽팽한 공간은 이를 보완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 역할은 전면의 누각이 맡는다. 강당 앞의 마당을 기준으로 본다면, 3면에서 압축되어 오는
긴장감을 앞의 누각에서 해소하고 이완시킨다. 강과 약, 양과 음, 긴장과 이완이 공존하는 공간적 개념이
유지된다.
서원건축의 감상법은 궁궐이나 사찰과는 다르다. 여기서는
건물의 형상이나 장식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밖에서 건물을 쳐다보는 시각도 중요하지 않다. 성리학적 질서를 어떻게 반영했는가 하는 정신적 측면이
중요하며, 최고의 군자라 할 수 있는 원장과 교수진이 앉아서 앞의 자연을 쳐다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건물은 그 시각을 유도한 틀이기
때문이다.
병산서원 : 자연풍광을
끌어들인 한국 최고의 건축
병산서원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그
유명한 하회마을에서 산 하나 넘어 낙동강변에 건립된 서원이다. 1613년 설립되어 1863년에 사액된 이 서원은 건축계에서 한국 최고의 건축으로
꼽는 명작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서원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건물 자체는 별로 볼 게 없다. 단지 서원 앞 강변의
모래사장과 노송들, 그리고 병산의 절벽이 이루는 풍광이 대단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경치를 가진 곳은 한반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고의 건축으로
평가받게 하는 걸까? 병산서원의 진정한 가치는 그 풍광들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들과, 건물과 건물, 건물과 마당의 자연스러운
조직과 집합적 효과에 있다.
특히 누각 만대루에 주목하자.
만대루는 투명한 공간, 구조물의 프레임화를 잘 보여 주는 예다. 7칸의 기다란 만대루는 기둥과 지붕만 있을 뿐 텅 비어 있다. 어찌 보면
만대루는 전혀 쓸모가 없는 건물이다. 일반적인 누각이나 정자와는 달리 만대루에 앉아서 보는 바깥 경치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중심건물인 강당의 대청에 앉아서 만대루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만대루의 뼈대 사이로 앞의 낙동강이 흐르고, 건너편의 병산이 마치
7폭 병풍과 같이 펼쳐진다. 만대루의 주된 효용은 이처럼 자연을 선택하고 재단하여 인간에게 의미를 전해 주는 그릇으로
작용한다.
이제 조금 더 눈을 높여 강당과 사당의 엇갈려 있는
위치에 주목하자. 서원의 일반적 범례는 강당 바로 뒤에 사당을 놓는 것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사당은 강당의 동쪽 뒤에 치우쳐 있다. 평면도를
본다면 부자연스러운 비대칭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는 이의 체험은 전혀 다르다. 강당 마당의 한 귀퉁이로 가면 뒤쪽 사당이 슬며시 다가오고,
자연스럽게 사당 마당으로 나아가게 된다. 형식적 규범보다 실제의 체험을 더욱 중요시한 고도의 수법이다. 이 서원에 모셔진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수습한 명정치가였다. 그의 학문세계는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했고, 규범의 변용에 스스럼이 없었다. 병산서원은 그의 그런 정신이 형상화된 건축이
아닐까?
도동서원 : 엄격한 규범 속에 파격이
돋보이는 건축
대구시 달성구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한 도동서원은 1605년 설립되어 1607년에 사액되었으며, 주향자는 김굉필이다. 유성룡이 현실주의적 성리학자였다면, 김굉필은
원리주의적 성리학자라 할 수 있다. 엄격한 규범과 질서, 성리학적 위계에 따라 건축된 도동서원은 아마도 성리학적 원칙을 가장 잘 구현한 서원일
것이다.
경사지에 좁고 긴 석단을 놓아 터를 이루고, 그 위에
정확하게 좌우 대칭으로 건물들을 배열했다. 그럼에도 단조롭지 않고 변화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 석단들의 간격과 넓이가 다양한 운율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석단 위에 조성된 건물들은 모두가 맞배지붕으로 형태가 동일하다. 1970년대에 복원된 누각 수월루만 제외하고 형태와 형식 면에서
모든 건물들이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들 간의 위계는
명확하다. 스승이 있는 강당은 제자들의 건물보다 크고 고급스럽다. 일절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위대한 스승 김굉필을 모신 사당은 채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선현 - 스승 - 제자 - 노비들의 공간은 그 인격을 따라 서열화되어 있다. 누각 - 환주문 - 강당 - 사당이 중심축 선상에
일렬로 정연하게 놓여 있고, 다른 건물들도 좌우 대칭으로 정확한 위치에 놓였다. 건물과 건물들은 엄격하게 직각 또는 평행으로 놓여서 완벽히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건물과 계단들의 구성만 본다면,
질식할 것같이 엄격한 건축 같으나 숨통은 있다. 환주문과 사당문 앞 계단들에 조각된 봉황과 용머리, 조각보처럼 복잡하게 쌓인 강당의 기단과,
기단에 새겨진 다람쥐와 연꽃과 용머리는 의외로 해학적인 요소들로, 엄격하고 신성한 서원의 권위에 눌리면서도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파격들이다.
도동서원 역시 강당 대청의 원장석에 앉아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낙동강변과 멀리 고령들, 그리고 아스라이 앞산이 보인다. 그 뾰족한 앞산에 맞춰 서원건축의 축선을 잡았고, 축선을 따라 정확히
좌우 대칭으로 건물이 배치된 것이다.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환주문은 지붕이 낮고 뾰족하다. 문만 쳐다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지만,
강당에서 바라보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앞산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출전 : [문화와 나] 2002년 봄호
道東書院을 찾아서
1. 유교의 이상을 실현을 위한 열정적 공동체
2. 道東書院을 찾아서
3, 杏壇
4, 水月樓
5, 中正堂
6, 祠堂
1. 유교의 이상을 실현을 위한 열정적 공동체
조선 왕조는 세계 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518년이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조선은 오래 동안 왕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하였고, 학문 발전과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건국 초기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해서 유교 윤리를 지방 곳곳에 보급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가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서 서원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다. 사림들은 이 땅에 유교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열정을 쏟아 부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 사림들은 조선 사회에 유교 실천윤리가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이상은 공신과 외척 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기묘사화(1519)에 휩쓸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긴 역사의 흐름에 볼 때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사림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이상을 활짝 펼칠 수가 없게 되면서, 그 출신 지역과 유배지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인재를 길러 훗날을 대비하였다. 사림들은 그 지역에 학문과 윤리를 가르치고 널리 보급하는 정사(精舍)와 서당(書堂) 등 사학(私學)을 열면서, 서원 제도의 기초를 세우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조선 사회에 서원을 건립하고 널리 보급시켜 서원을 통해 학문을 닦고 인재를 기르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퇴계는 명종 4년(1549)에 풍기 군수로 지내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국가로부터 공인되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시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건의하였다. 마침내 그 이듬해 1550년에 백운동 서원은 명종 이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을 하사 받았다.
소수서원이 조선에 최초로 사액서원으로 공인 받게 되면서, 지역 사회에 사액서원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555년에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을 모시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사액받았고, 1566년에 경남 함양(咸陽)에서 정여창(一? 鄭汝昌, 1450-1504)을 모시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이 공인을 받았다. 명종 대에 서원은 18개 곳이 있었는데, 선조 대에 이르러 이미 60여 곳을 넘어섰다. 선조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워졌고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고, 지방 관리들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훗날 사액서원은 중앙 정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지원을 받고, 조선 성리학을 이끌어 가는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였다.
당시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는 과거 시험에 얽매이어 바른 학문을 할 수 없었다. 서원이야말로 과거 시험에 벗어나 자신의 인격을 기르고 그대로 실천하는 학문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서원은 자신의 인격을 닦고 국가경영에 참여(修己治人)하는 유교 이상을 실현하는 선비 공동체이다. 성균관과 지방 향교에서는 중국 성현을 앞세우고 한국의 성현을 함께 모셨지만, 서원은 사림들이 마땅히 존경할 만한 한국의 성현만을 모시고 그 실천 정신과 학문을 배우고 가르쳤다.
서원은 중국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서, 조선의 현실에 맞는 조선 성리학으로 바꾸어보려는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조선에서 성리학이 이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문화적 자부심도 갖게 해 주었다. 이제 성리학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주는 이념으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한 사회를 굳게 결속시켜주는 안정의 원동력이 되었다.
도동서원은 조선 성리학이 단순하게 학문을 이해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조선 사회에 유교 이상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17세기 초기에 지어졌다.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이 깊고 완벽한 연구를 이루었으며,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제 성리학은 소수 학자들의 연구 대상에서 벗어나서 누구든지 이해하기 쉽고, 일상생활에까지 실천 가능한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여기 도동서원도 남명 조식과 퇴계를 오고가면서 학문을 익혔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주도해서 창건되었다.
2.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찾아서
맑은 물이 세월을 안고 흐르고 솔바람이 향기로운 곳에는 으레 선비들의 옛 자취가 숨은 듯이 스며 있다. 지식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나날이 새로워진다. 마음은 고요하고 두터워서 함부로 옮기지 않는 산과 같이, 자신의 본성을 되새기고 욕심을 떨쳐버렸다. 선비는 푸른 산을 오르면서 자신의 인격을 길렀고, 맑은 물을 찾아 지식 세계를 마음껏 넓혔다. 복잡한 세상을 잠시 벗어나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잘 어울리는 그 곳에 서원이 지어졌다. 서원은 고요한 자연의 세계를 본받아 자신의 이상과 학문을 실현하는 배움의 터라 말할 수 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사색에 잠기기에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 만큼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퇴계는 서원이 설립되는 장소는 존경받을 만한 성현과 관련이 있는 일정한 연고지를 필요로 하고, 그와 동시에 사림들이 은거하면서 수양하며 책읽기에 마땅한 곳, 즉 산수가 뛰어난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도동서원은 일정한 연고지에 지어졌고 뛰어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곳 道東書院 바로 뒤 산 기슭에 한훤당의 묘소와 선조(先祖)의 묘소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원 주위에는 낙동강이 반원을 그리며 휘감아 돌아 흐르면서 물돌이라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만들었고, 산마루에 올라 탁 트인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았다.
현풍에서 낙동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지방도로로 계속해서 달리면, 대니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다람재로 올라간다. 도동서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마루에 올라서서, 큰 반원을 그리며 휘감아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본다. 아무리 나그네의 발길이 바쁘다고 하더라도, 대자연의 장엄함에 넋을 잃고 감탄하며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다. 도동서원은 넓은 낙동강이 위로 올라 갈수록 서서히 강폭이 좁아지면서, 서원의 주위를 휘감아 돌아가는 물 돌이(河回) 입구에 자리잡았다. 잠시라도 푸른 산과 맑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벗어나 있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갖게 해 준다.
도동서원은 조선5현의 첫머리에 차지하는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선생의 도학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퇴계 이황의 뜻을 이어받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주도해서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서 지어졌다. 선조 38년(1605)에 서원으로서 건물을 짓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선조 40년(1607)에 보로동서원을 대신해서, 道東書院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내려 받았고, 국가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숙종 4년(1678년) 서원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사당에 문목공 영의정 한강 정구 선생(文穆公 領議政 寒岡 鄭逑)의 위패를 동향으로 배향해서 두 분 선생에게 향사(享祀)하였다.
조선 말기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이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선생이 성장하였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에 자리하였고, 성균관 문묘에서 종사되는 일인 일원(一人一院)원칙에 맞추어 정리되지 않은 전국 47개소 서원의 하나이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둘레 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둘레 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道東)이란 ‘성리학의 도통(道統)이 비로소 동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 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에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은 퇴계로부터 ‘도학에서 으뜸되는 스승近世, 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정통성을 열어 주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동방 도학의 시조’ 라고 불렸을 만큼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고려 왕조에 극심한 사회 혼란과 위태로운 국운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 도학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도학은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한훤당은 포은의 도학을 이어받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학 정통론에 바탕으로 두었다. 신도비문에서 한훤당이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고려말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만이 이 도를 행하였고, 우리나라 첫 번째 유학자가 되었으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선생이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 주었다.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않아서도, 또한 미리 책을 저술해서 가르침을 남기지 않아서도, 오히려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될 수 있었고 도학의 깃대를 세웠다.”
서원은 선비들이 넘쳐흐르는 힘찬 기상으로 꾸밈없는 직선미를 띠고 있다. 위로는 水月樓 ? 中正堂 ? 사당 주요 건물이 남북 일직선으로 놓여졌고, 아래로 계단은 서원 한가운데를 꿰뚫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중정당 현판 밑의 창호를 열어보면, 계단이 사당에 이르기까지 한 가운데를 일직선으로 꿰뚫고 달리고 있다.『논어』「이인편」에서 "내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吾道, 一以貫之."고 하는 원리에 따른다. 이 중심축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하나로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중용中庸의 도道’ 를 뜻한다. 그리고 좁고 가파른 산비탈에는 여러 가지 꽃들과 배롱 나무를 가꾸어 꽃 계단으로 쌓아 올리고, 꽃 계단 위에 자리잡은 환주문(喚主門)의 정자 같은 멋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세련된 예술미를 보여 준다.
도동서원은 예술미도 함께 갖춘 아름다운 서원으로 자랑하고 있다.『논어』「옹야편」에서 "중용의 덕이야말로 아름답지 않는가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라고 하였다.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재주만 자랑하는 자만심에 벗어나서, 오로지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는 ‘중용의 길’ 을 더듬어 올라가는 선비의 뒷모습이야말로 지극히 아름답지 않겠는가.
3, 새 생명이 태어나는 창조의 마당이다.
도동서원은 가파른 산비탈에 지어졌고, 우리나라 건축물에서 보기 드물게 북향으로 자리하였다. 서원 앞은 낮은 산이 부드럽게 거듭해서 안산(案山)이 이어지고, 또한 현풍 부근에서 휘어져 굽이굽이 흐르는 물돌이(河回)가 안산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주위에는 아늑히 나지막한 산자락에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병풍으로 둘러싸고 있다. 아마 서원 안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동북향으로 정해 자리하였을지도 모른다.
유학에서 사람은 대자연을 이루는 일부로서, 자연 질서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이해된다. 또한 자연 그 자체를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보았으며, 유기체적 관계를 맺고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존하면서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자연의 운행 속에서 생동하는 생명력이 영원히 지속되고,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비는 이처럼 맑고 순수한 자연 환경을 자기 삶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을 이루려고 하였다. 한 낮에 햇빛을 마음껏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겨울에 매서운 샛바람을 똑바로 받아야만 하는 북향이라는 불편한 생활조건을 갖고 있지만, 도동서원은 저 뛰어난 자연 환경을 자신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이고,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을 그대로 실현하였다.
향교와 서원 앞에는 으레 은행나무 한두 그루가 울창한 가지를 잔뜩 드리우고 천하의 영재를 반가이 맞이한다.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쭉쭉 뻗어 하늘에까지 닿기 때문에, 기상 높은 선비를 기르는 최고의 상징이다. 그래서 향교와 서원을 건립하거나 사액 받았을 때 기념해서 즐겨 심었다. 도동서원 어귀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늙은 가지를 잔뜩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한강 정구가 서원의 건립을 기념해서 심었다고 전한다. 서원의 역사와 번영을 같이하는 400년 이상 수령을 자랑한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느티나무와 더불어 가장 잘 자란다.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현재까지 살아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서원에서 우리 자연 환경에 잘 어울리고 오래 사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한자로 쓰는 은행나무는 어쩐지 어색하게 보인다. 행단이란 학문의 연구와 인재를 양성하려는 유교 교육의 상징적인 장소로서, 나무 주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올리거나 돌로 제단(祭壇)을 쌓아 놓았다. 공자가 행단 위에 앉아서 문인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행(杏)이란 살구나무 행으로 읽고 있는데, 실제 공자묘에 있는 행단은 살구나무가 심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유교 문화가 중국 유교 문화 틀에서 벗어나서, 조선 현실에 잘 어울리는 문화로 바꾸어보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해마다 많은 은행 열매를 거두어들이듯이, 해마다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옛 사람들은 큰 나무는 거룩한 숨은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서있는 나무는 계절에 따라 맞추어, 봄에는 새 싹이 돋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 열매를 맺고 저장하는 생명의 순환과 부활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무는 뿌리를 땅 속으로 깊이 뻗어 물을 빨아들여 새로운 생명을 낳아 주었다. 바로 행단은 새 생명이 태어나는 창조의 마당이다. 우리 선조는 창조의 마당에 행단을 쌓고 수많은 인재를 길러보려는 모든 정성을 담았다.
4, 수월루(水月樓)
서원 입구에서 수월루가 천하의 영재를 반가이 맞이한다. ‘수월水月‘이란 ’물위에 비친 달빛‘ 으로 풀이한다. 원생들은 엄격한 서원생활에서 슬며시 벗어나, 저 낙동강 본류 물위에 비친 달빛을 감상하면서 가끔 고향 생각에 깊은 향수에 빠지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월루는 2층으로 지어졌는데, 1층은 삼문으로 이루어졌다. 서원에서는 흔히 외삼문(外三門)으로 부른다. 2층은 사방이 툭 트여 있어 꽉 막힌 안을 활짝 열어주면서, 주변의 저 뛰어난 공간을 마음껏 서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막힘과 열림이라는 서로 마주 대하는 성격을 함께 채워주면서, 엄숙하면서도 활달한 서원 건축의 실용성을 최대한으로 실현시켰다.
‘수월水月‘ 은 주자가 달은 마치 물과 같다 고 말한 내용에서 풀이할 수가 있다. 달은 본래 빛을 비추지 못한다. 햇빛을 받고 빛을 비추어 준다. 주자가 또 말하였다. 달은 언제나 반쪽만 빛을 비춘다. 달은 마치 물과 같다. 해가 물에 반사되면 이에 달빛이 비추는 것이다. 물 위에 비친 달을 보고 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달이 밝고 어두움 양면성을 함께 갖고 있듯이, 물과 달은 서로 떨어지지도 붙어있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리理와 기氣도 서로 떨어지지도 붙어있지도 않는다(不相離, 不相雜).
‘수월水月‘이란 말은 성리학에 있어서 모든 현상과 사물은 리理와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본 명제를 비유하기 위해서 쓰이기도 한다. 물과 달이란 서로 다른 사물은 이론적으로 보면 떨어져 있지만, 그 보이는 현상에서는 서로 의존해서 나눌 수 없는 존재이다. 현상계에서 보면, 리와 기는 서로 의존해서 나눌 수 없다. 리와 기 이 둘은 세상 모든 것에서 그것이 정신적 것이든 물질적 것이든 언제나 함께 한다. 물과 달이 서로 어울리어 물위에 비친 달빛이라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준다.
서원 누각 가운데에서 정말로 첫눈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누마루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이다. 만대루란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백제성루白帝城樓」에서 나오는 말에서 찾아 이름지어 불렸다.
翠屛宜晩對 푸른 빛 절벽은 늦은 오후에 마주 대하기 좋으니,
누마루 바닥에 앉아 노을이 물든 푸른 절벽을 마주하였던 옛 선비의 풍류를 되살려보고 싶어진다. 수월루 밑으로 활짝 열려있는 외삼문 안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한 사람만 오르고 내려오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喚主門 으로 들어간다. 서원 건물들은 그 위계에 따라 규모에 차별화를 두어 다양성과 변화를 연출해내고 있다. 환주문 역시 이들 건물과 비례를 고려해서 적은 규모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규모의 차별화로 다양성이 내재된 전체성을 획득한 것이 도동서원 건축 미학이라 할 수 있다.
환주문은?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다. 환喚이란 부를 환이고?주主?란 주인 주로 읽는다. 여기에서 주인은 자기의 마음을 찾는 사람이다. 자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향해 주인은 깨어 있는가 물어 본다는 뜻이다. 갓 쓴 선비들은 고개를 숙이도록 문을 낮게 지었다. 배움의 문으로 들어서는 선비는 스스로 마음가짐을 낮추고, 내 마음의 주인을 찾아보게 한다. 옛 선비의 지극한 마음가짐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문 입구에 문턱을 대신해서 꽃봉오리를 새겨놓았다. 그 주인을 찾았을 때 비로소 마음속에 예쁜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계단 곳곳에는 통 돌 하나를 다듬어서 여러 층계로 나누어, 층계의 수를 주역 64 괘에 맞추어 갖춘 흔적을 드러내었다. 해인사는 일주문에서 대장경을 보관하는 법보전에 이르기까지 층계의 수는 중생이 갖고 있는 번뇌를 말해 주는 108개로 이루어졌다. 도동서원은 수월루 입구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층계 모두가 주역 64괘를 말해 주는 64개로 이루어졌다.
5, 중정당(中正堂)
중정당은 서원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벌이거나, 학문을 가르치고 토론했던 지금의 강당이다. 선생과 원장은 좌우의 옆방에서 지내면서, 유생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중정당 바로 아래에 돌 거북이 양쪽 송곳니를 비죽이 내밀고 제법 무서운 눈초리로 앞을 노려보고 있다. 돌 거북은 자신을 향해서 성큼성큼 똑바로 들어오지 말고, 주위를 빙 돌아서 중정당으로 올라가도록 강요하고 있다. 문 입구에서는 선비들이 올라가는 옆 계단이 보이지 않는다. 서원 건축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옆 계단이 밖으로 드러내 보이면, 옆 계단으로 올라가기를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한다. 선비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선생을 공경하는 생활에 익숙하였다. 강당에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주위를 빙 돌아서 옆 계단을 스스로 찾아올라 갈 수 있도록 놓여졌다.
중정당 한 가운데에 조정에서 하사한 사액 현판을 걸어 두었다. 당시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부사가 조정에 상소를 올려 건의해서 道東書院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았다. 정경세는 서애 유성룡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도 정통을 이루어, 당시 기호학파 김장생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에 도남서원을 창건하고, 조선오현을 향사를 올려 후학에게 도학의 정통성을 알리려고 힘썼다.
현판 글씨는 모정 배대유(慕亭 裵大維, 1563년-?)가 경상감영 도사로 지냈을 때 썼다고 알려졌다. 배대유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서, 망우당 곽재우 선생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적을 세웠다. 159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8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에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정인홍이 지은 남명 조식 선생의 신도비에 비문을 썼고, 당대에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던 명필로 알려졌다.
현판에서 만력萬歷이란 중국 명나라 14대 황제 신종(神宗)이 사용한 연호(年號)이고, 신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명나라 군대를 파견해 지원하였다. 정미丁未란 1607년에 해당한다. 선사宣賜란 선宣은 임금의 말 선이고, 사賜란 하사할 사로, 나라님 윤허를 받아 하사받았다는 뜻이다.
중정당 기단은 우리 선조들이 모든 정성과 역량을 다해서 지어졌다. 기단은 가파른 산비탈의 경사에 따라 높고 낮음을 맞추어서, 보통 어른 키만큼 여섯 단으로 앞면을 높이 쌓아올렸다. 또한 기단에는 거의 같은 모양의 돌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기단석은 모서리마다 6각형 내지 12각형으로 짝수 모로 잘라내어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어서, 조금 틈도 없이 딱 맞물리도록 짜 맞추어 끼어 넣었다. 특히 건물의 장중함과 대비되는 기단의 석축은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 맞춘 모습이어서 그 공력과 정성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진 돌들로 짜 맞추어 얼마나 공력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단석은 크기와 색깔을 더하거나 줄이고 다듬어 섞이어 서로 잇거나 짝지어 하나가 되어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모양과 색깔을 다르게 하는 돌들이 일정한 형체를 갖지 않고 있더라도, 모양과 크기를 구분해서 서로 모이고 합해서 비로소 새로운 법칙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곳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단 양식을 이루고 있다.
유교 건축은 단순한 건축 양식의 분류에서 벗어나서, 그 시대에 꽃피었던 학문과 실천 기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당시의 학문과 실천 기준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꼭 지켜주어야 할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유교건축은 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학문과 예술 정신이 깃들여 있고, 선비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시대정신을 꽃피었던 곳이기도 하다.『주역』은 서로 성격이 다른 음?양 2기가 서로 대립하고 조화를 이루는 원리를 이해하면서 논리적인 법칙을 분석하였다. 음양사상은 전통 사회에서는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전통음악과 건축 구조와 생활양식 밑바탕까지 뿌리내렸다.
기단은 앞면을 여섯 단으로 높이 쌓아올렸다. 여섯 단은 한 괘가 여섯 효를 모아서 이루어진 원리와 일치한다.『주역』에서 한 괘(卦)는 각각 양효(陽爻)와 음효(陰爻) 두 종류의 부호를 배열해서 여섯 효(爻)로 이루어졌다. 팔괘는 음 효와 양 효 두 종류의 부호가 삼중(三重)으로 거듭해서 각각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고, 64괘는 8괘가 서로 거듭해서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팔괘가 소성괘를 이루고, 이 팔괘를 더욱 확장해서 64괘로 한다. 같은 종류에 접촉해서 확장시켜 나간다면, 천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그 안에 포함된다 라고 하였다. 한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여섯 가지 단계의 변화와 발전을 나타낸다.
음?양 2기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도 서로 떨어지기도 않고, 둘이 하나로 합해도 붙어있지도 않는다(相分不離, 相合不雜).
이 기본법칙은 사물이 기본적으로 성질이 다른 두 종류로 나뉘어 이루어졌지만, 서로 대립되는 성질들이 하나로 모이고 합해서 모든 사물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음양의 양면을 가지고 있고, 순수한 음과 양으로만 이루어진 사물은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음양은 마치 하나의 달에 밝고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해와 달,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밝음과 어두움 등 서로 반대하는 성질이 모여서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이치와 같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바뀌어 오고 가면서(往來) 한 해를 이루고, 여기서 구부리면 저기서 펴지며(屈伸), 같은 사물과 성질을 찾아 함께 모이고 서로 흩어지는 것(聚散) 등은 음양이 변화를 이루는 신묘한 작용을 설명해 준다. 기단석은 하나가 둘로 나뉘어도 서로 떨어지기도 않고 둘이 하나로 합해도 붙어있지도 않다.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가 서로 잇고 짝짓는 조화(相承相配之妙)를 이루고 있다. 기단은 음?양 2기가 조금도 지나침이 없고 모자람이 없이 하나로 서로 모이고 합해서 비로소 법칙하나를 이룬다는 원리를 적용하여 지어졌다라고 짐작된다. 이것은 음양이 변화를 이루는 신묘한 작용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중정당 좌우에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거인재(居仁齋)와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거의재(居義齋)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자리잡았다. 낮고 작은 건물 2채는 평소 원생들이 생활하면서 책을 읽는 곳으로, 지금 쓰고 있는 교실에 해당한다. 강당과 교실 배치 관계는 높은 기단 위에 서있는 중정당 앞에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자리잡은 전재후당(前齋後堂)양식으로 지어졌다.
거인居仁과 거의居義란 중국 주자가 편찬한「근사록近思錄」관성현편觀聖賢篇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북송시대 다섯명 철학자, 이른바 북송오자(北宋五子)에는 주돈이, 소옹, 장재 외에 이정자(二程子) 형제로 알려진 정호(明道, 1032년-1086년), 정이(伊川, 1033년-1107년)가 있었다. 이 형제는 연년생인데, 14-5세 때, 당시 30세였던 주돈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이천은 친형되는 명도 선생의 성품과 학문을 기리는 행장(行狀)을 직접 썼다. 주자는 이 내용을 그가 편찬한「근사록」에 그대로 옮겨 실었다.
인(仁)에 머물면서 의(義)를 행한다는 말과 같은 바른 대도를 행하였고,
말에는 이치가 있었고, 행함에는 떳떳한 도가 있었다.
居廣居而行大道. 言有物而行有常.
이 내용은『맹자』「등문공」하편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장부론大丈夫論’과 서로 통한다.
천하에 넓은 집에 머물며, 천하에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 대도를 걸어간다.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도를 행한다 이것을 말해서 대장부라고 한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道, 與民由之. 此之謂大丈夫.
『맹자』에서 ‘인仁’ 을 실현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옳고 그릇됨을 결정하는 ‘의義’ 를 중요시하면서, ‘대장부’란 현실에서 자신의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정정당당하게 정도를 걷는 인격완성체이다. 결국?거인居仁?과?거의居義?란‘인仁’을 실현함에 있어서‘의義’를 실행한다란 현실적인 인격 수양방법을 뜻한다.
6, 사당(祠堂)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뭇 다른 풍류가 감도는 아름다운 정원이 다가온다. 정원은 자연 그대로 보고 즐기며, 사람이나 건축물이 모두 자연의 일부분이 되도록 꾸며졌다. 사람이나 집이나 모두가 자신의 심성을 순화하고 수신하며 즐기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집 지을 곳이 결정되면 대개 집터 뒤에 구릉이 있게 되므로, 가파른 언덕을 적절히 나누어 5단으로 얕은 석축을 쌓아올려서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바로 위에는 하늘을 향해서 날아갈 듯이, 수직으로 하늘높이 사당(祠堂) 입구 내삼문을 세웠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함께 구름다리를 밟고 건너면, 마치 세속을 벗어나서 선경에 이르는 듯한 깊은 감동을 일어나게 한다.
이 구조는 삼천양지參天兩地원리를 적용하였다라고 생각된다. 삼천양지란 하늘의 수는 셋으로 하고, 땅의 수는 둘로 하는 것을 말한다. 셋은 하늘과 양수(陽數)을 나타내는 숫자이며, 둘은 땅과 음수(陰數)을 뜻한다.『주역』「설괘전」첫 장에서?삼천양지를 설명하였다. 하늘의 수는 셋으로 하고, 땅의 수는 둘로 해서 음과 양의 수를 정하였고, 음과 양이 변화하는 것을 살펴서 괘를 만들었다參天兩地而倚數, 觀變於陰陽而立卦. 하늘은 둥글다. 둥근 것은 지름이 하나이며 둘레가 지름의 세 곱이 되며, 셋으로 하였다. 땅은 네모지다. 네모진 것은 지름이 하나이며 둘레는 넷이지만,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은 서로 두 개씩 짝지어서 둘로 한다. 이것은 하늘의 수는 셋이고, 땅의 수는 둘이 된다. 음양이 서로 하나로 합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만물을 낳고 기를 수가 없다. 그래서「계사하전」6장에서 음과 양이 성질을 합해서 강과 유가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陰陽合德, 剛柔有體고 하였다.
주위에는 참꽃과 모란과 배롱 나무와 국화를 심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서나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선비는 사철내내 변화와 변하지 않음을 함께 즐기면서, 이처럼 맑고 순수한 자연의 경치를 자기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자연의 경치와 자신의 이상세계를 완전히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추구하였다.
비록 사람이 만들었으되, 雖由人
하늘이 스스로 열어 놓은 듯하다 宛自開天.
유교 건축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꾸밀 뿐이지, 억지로 정원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꾸미지도 않았다.
높은 담 밑에 해묵은 배롱 나무을 심었다. 배롱 나무는 7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붉은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하며, 그렇게 빨리 자라지 않아 집안을 그늘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정원수로 널리 심어져있다. 배롱 나무는 청순하고 늠름한 기품이 흐르고 있고, 겉과 속이 똑같아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선비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동쪽 울 밑에는 국화가 계절의 마지막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은거시인 도연명이 지은「음주吟酒」라는 시를 읽어보면, 비슷한 시구가 있다.
采菊東籬下, 동쪽 울 밑에 핀 국화를 따서,
悠然見南山.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노라.
조선시대 서당과 향교에서 어린이들이 읽는「계몽편啓蒙篇」에서 여러 꽃을 자세히 비유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달리 많이 심어져 있는 모란에 대한 궁금한 점을 풀어 주었다.
물과 뭍에 자라는 풀과 나무의 꽃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다.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하였고, 주렴계는 연꽃을 사랑하였고, 부귀하고 화려한 사람 모두는 모란을 좋아하였다. 도연명은 은자(隱者)로 알려졌고, 사람들은 국화를 은자에 비유하였고, 주렴계는 군자로 존경받았고, 사람들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하였다. 모란은 꽃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려하다. 사람은 모란을 화려하고 부귀한 사람에 비유하였다.
모란은 화려하고 부귀한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서원 입구에는 부귀와 명예를 나타내는 모란을 듬성듬성 많이 심었다.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를 하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모란은 선비들이 뛰어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후세에까지 드날리고 싶은 소망(立身揚名)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꽃이다.
둘레 담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하여 튼튼하게 쌓아올리고, 암키와를 지붕으로 덮어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수키와를 엇갈리게 끼어 넣어 무늬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렸다. 암키와와 숫키와를 사용하여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앞면은 직선으로 수평의 담을 쌓아올렸고 시선을 차단하는 효과를 노렸다. 옆면은 지형의 경사에 맞추어 높낮이를 바꾸어 가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듯이 꾸몄다. 특히, 사당 아래 왼쪽 토담은 주위의 배롱 나무와 함께 어울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마치 선경에 둘러싸여 머물러 있는 듯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사당은 서원에서 가장 높이 자리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정신세계와 현실세계를 분명히 구분되도록 둘레 담으로 둘러싸여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서원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을 칠하여 신성함을 높이었다. 사당 입구 문은 세 개 문으로 이루어졌는데, 흔히 내삼문으로 부른다. 내삼문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2개만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 계단과 문은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이 다니는 계단이다. 한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으로 부르면, 위패를 모시거나 제물을 옮길 때에만 문을 열고 있다. 계단 아래에 봉황이 무서운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곳은 신성한 장소로, 누구든지 함부로 들어 다니지 못하도록 한다.
사당 안에 증(贈) 우의정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선생 위패를 중앙에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증(贈) 영의정 문목공 한강 정구 선생 위패를 동향으로 배향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 벽에는 조선 중기 벽화 2점이 그려졌는데, 약 300년이란 오랜 세월이 경과되었다고 한다. 이 벽화는「江心月一舟」와「雪路傍松」으로 이름지어졌다. 이 그림은 한훤당이 직접 지은 시「書懷」와「路傍松」을 주제로 해서 그려졌다고 짐작된다.
서회書懷 가슴에 품은 포부를 쓰다
處獨居閒絶往還 홀로 있는 곳에 한가로이 살아가니, 오가는 이 끊기고
只呼明月照孤寒 오직 명월을 불러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비추네
憑君莫問生涯事 그대 마음대로 내 생애에 일을 묻지 말라
萬頃煙波數疊山 넓은 바다 안개 낀 물결, 몇 겹 산들이 가득하여라
한훤당 김굉필이 사람이 드문 한적한 가야산 속에 묻혀 번거로운 세상과 교제를 끊고 지내고 있으니,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조차 끊어졌다. 외로움이 짙어지는 밤이 오면, 푸른 산에 떠오르는 밝은 달을 찾아 부르니, 달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외로운 나에게 밝게 비추어 준다. 달에게 자신이 외롭게 보이는 것을 묻지 말라고 하면서, 무엇을 찾고 있는 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만 끝없이 넓은 바다, 그 바다에 출렁이는 안개 낀 물결, 봉우리가 거듭되는 깊고도 험한 산길뿐이다. 이곳은 어렵고 위험해서 그러한 위험이 언제 닥쳐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한훤당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는 위험한 곳에 벗어나서, 깊은 산속에 안기어 외로움과 가난함을 선택하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독과 가난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자기수양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비록 겉으로 궁색해 보일지라도,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되며, 자신은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다고, 이 시를 지어서 보여주고 있다.
懷 품을 회 회포(懷抱) 부수 마음 ?(心) 3획 총19회
閒 한가할 한 한거(閒居) 부수 문 門 8획 총12획 呼 부를 호 부수 입 口 3획 총8획
照 비칠 조 부수 불 ?(火) 4획 총13획
孤 외로울 고 고독(孤獨) 부수 아들 子 3획 총8획
寒 찰 한 한훤(寒暄) 가난할 한 빈한(貧寒) 부수 갓머리 3획 총12획
憑 기댈 빙 의거하다 부수 마음 心 4획 총16획 莫 없을 막 말다 부수 풀 ? 4획 총11획
涯 물가 애 생애(生涯) 부수 물 ? 3획 총11획
頃 백이랑 경 잠깐 경 경각(頃刻) 부수 머리 혈 頁 9획 총11획
烟 연기 연 부수 불 火 4획 총13획
疊 겹칠 첩 첩첩산중(疊疊山中) 부수 밭 田 5획 총22획
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오랜 소나무 하나가 푸르게 길가에 서있어
勞勞迎送往來賓 오고가는 손님을 수고로이 맞이하네.
歲寒與汝同心事 추운 겨울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은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더냐?
이 路傍松 시에서 온갖 풍파를 이겨내고 자기 본성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의 불굴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선비들은 풍파에 시달려도 굽히지 않고 늘 푸름을 지키는 소나무의 우뚝하고 강인한 품성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지키는데 이를 본받고자 하였다. 즉, 소나무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강인하고 고결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기승구起承句에서는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먼지를 함께 덮어 쓸 수밖에 없는 푸른 소나무의 처지를 말하였다. 그리고 길가에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벼슬길에 올라 세속의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조정 관리를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변함없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꿋꿋한 모습을 그렸다.
출처 : 한두경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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