屛山書院
(안동) 이창호 기자 = 조선 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인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지방의 사림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으로 지성과 교양의 요람이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병산서원의 전신은 안동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원이다.
선조 5년(1572) 서애가 현재의 장소로 옮겼는데, 이때 서애는 그 이유로 “읍내 도로변은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광해군 6년(1614) 유림들이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祀)를 지으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변모했고,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도산서원,소수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서원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선조 8년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에 옮겨 온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때 도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선생을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추는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철종 14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때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존속된 47개의 서원과 사당중 하나이다.
병산서원의 입구
서문의 정문은 삼문이(三門) 일반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솟을 삼문은 가운데 칸만 삼문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칸씩 두고있다.
복례문은 들어가면서 "자기를 낮추고,예로 돌아가가는것이 인"이라고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문이라고 한다.
광영지(光影地)
만대루~
서원의 정면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에 서있는것은 서원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이고,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있는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교당은 서원 가장 핵심적인 강당이다. 명성재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경원재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는곳이다.
서원안에서 내려본 풍경은 시원스레 어디 하나 막힘없이 탁트여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처럼 느껴진다.
석조물은 밤에 불을 피우는 정료대라고 한다.
서재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였고, 하급생들이 주로 기거했다.
동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이곳은 유학생들의 기숙사였던 이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가운데 1칸 마루로 되어있다. 주로 상급생들이 머룰렀다.
신문(新門)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며, 향사때에 제관들이 출입한다고 한다.
정면 3칸의 솟을 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고,
향사례에서 신문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되며,.
집례를 맏은 임원들은 안마당으로 들어갔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했었다고 한다.
전사청과 주소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감독하기 위함이다.존덕사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주소는 안동지방의 고유 뜰집 형식인 "ㅁ"자형 건물군이다,3칸 대청이 마당의 전면과 맞닿아 있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다.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묘지기,장무,정지지기들이 거주하였고,향사제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로 이용되었다. 이와같은 용도의 건물을 庫直舍 또는 校直舍라고도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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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루~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축물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고 한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측면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활을 하는데 한국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의 병풍을 보는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두보"의 백제 성루의 한구절인 , 취병의 만대 백곡회심유에서 따온말이다.
"푸른병풍처럼 둘러처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하고 ,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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