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악대사(仁嶽大師)
‘1516주년 개산대재’에서 진행된 <인악대사문집> 봉정식.
동화사 옛 출입문인 봉황문으로 올라가다보면 보물 제254호로 지정된 당간지주 옆에 ‘인악당(仁嶽堂)’이란 낯선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비신 받침을 거북이 아닌 봉황으로 조각한 이곳은 조선시대 고승 인악스님(仁嶽, 1746~17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어찌 보면 경내 수많은 전각 가운데 하나 일수도 있겠지만, 인악대사를 중흥조로 모시고 있는 동화사에서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때문에 동화사는 인악대사의 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인악대사문집.사진 왼쪽> 발간을 추진했고, 지난해 10월 개산대재를 통해 봉정식을 가졌다.
대구 능인고 교사 전일주.구본섭 씨가 번역한 이 책은 인악스님이 남긴 오언ㆍ칠언절구, 오언ㆍ칠언율시 등을 담은 1권, 제2교구본사 용주사 부처님 복장에 봉안한 글을 포함한 용주록 등 2권, 편지를 모은 3권으로 구성돼 있다.
동화사 주지 허운스님은 간행사를 통해 “인악스님은 선, 교, 율로 이름을 떨친 동화사가 배출한 고승으로 나 역시 스님이 남긴 사기(私記)를 통해 개안(開眼)의 기쁨을 맛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면서 “인악스님의 주옥같은 글은 깔끔하고 부드러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했다.
인악스님은 영조 22년(1746) 경북 달성군 화원읍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이(李) 씨, 법명은 의첨(義沾), 법호는 인악(仁嶽)이다. 8세 때 총명을 떨쳤으며 18세 되는 해 인근 용연사 가선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진> 인악대사문집 표지
당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학한 스님은 이후 <원각경>,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등 후학을 위해 많은 사기를 남겼다.
특히 스님은 정조의 명을 받아 용주사 대웅보전 삼존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을 지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용주사 신장(神將)에 올리는 제문인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과 ‘경찬소(慶讚疏)’도 짓는 등 용주사 창건불사의 증사(證師)로 추대된 고승이다.
오래 머무르며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스님은 정조 20년(1796), 비슬산 명적암에서 세수51세, 법랍 34년을 일기로 열반했다.
현재 동화사는 인악스님의 비각이외에도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인악대사(仁嶽大師) | |||
| 동화사 주 출입문이 지금은 서쪽으로 옮겨 웅장한 동화문으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남쪽으로 난 출입문 봉황문이 있었다. 동화교에서 과거 상가가 있던 길로 접어들면 좌측은 세계적인 규모라고 하는 통일 대불과 그 관련시설들이 있고, 곧장 올라가면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더 올라가면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가 나오고 옆으로 보면 인악당이라는 퇴락해서 조금은 음침한 여느 비와는 달리 비신 받침을 봉황으로 한 비각이 나온다. 바로 '인악대사비(仁嶽大師碑)'인데 이 비문에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악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인악대사(仁嶽大師)의 속성(俗姓)은 李氏, 본관(本貫)은 성산(星山), 휘(諱)는 의소(義沼), 字는 자의(子宜), 법호(法號)를 인악(仁嶽)이라 하였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世孫이며 부(父)는 휘징(徽澄)이고 모(母)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이다 . 스님의 이름은 의첨, 영조 22년(1746)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 8세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배우는데 한번 듣고 세 번 읽으면 곧 외워버리니, 신동이라 했다. 15세에 시전, 주역을 읽고 깊은 뜻을 헤아렸으며 문장에도 능하니, 재질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됨됨이 또한 더할 나위 없으니 고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8세에 인근의 용연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스님들의 정진 모습에 깊게 감동을 받은 나머지 불교에 귀의하고 말았다. 스승인 벽봉(碧峰)이 그가 큰그릇임을 알고 금강경, 능엄경등을 가르치고 나아가 당시 고승들이었던 서악스님, 추악스님, 농암 스님에게도 배우게 하니, 그 이론이 해박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벽봉(碧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으니 스님의 나이22세였다. 뒤에 영원정사에서 화엄종장(華嚴宗長)으로 있던 상언을 만나 화엄경(華嚴經)의 진리를 터득하니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 비슬산, 계룡산, 황악산 등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을 지도하다가 동화사(桐華寺)로 돌아왔다. 이때 스님이 불복장원문경소와 용주사제신장문을 지으니, 정조가 그의 문장에 감탄한 나머지 스님 중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 칭찬하고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리시며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 용연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세수51세, 법랍 34세였다. 저서로 화엄사기, 원각사기, 기신론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사기(私記)는 경론(輕論)을 강의하면서 여러 학설을 모으고 자기의 견해를 덧붙인 것을 말한다. 인악스님은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많은 저술활동을 한 분이다. 스님의 활동기인 영. 정조대를 한국의 문예부흥기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여전히 지식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시기였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도교까지 융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많은 스님 중에서 유불 이교회통(離敎會通)을 주장한 스님이셨다. 오늘날 사회를 선도해야 할 종교마저 배타적으로 자기들만의 몫만 주장하는 현실에서 스님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
인악대사 & 부도전
당간지주 옆에 인악대사비 인악당과 부도전이 있고 언덕에서 내려와 해탈교를 건너 대웅전 보러 가기 전에 500여 년 된 느티나무 '인악대사 나무'와 만납니다. 나무기둥 여기저기에 늙음의 흔적이 오랜 세월을 느끼게 되는데.. 나무의 생명력에 비하면 사람은...
사진의 시간 - 2013년 4월 24일 오전, 동화사 .. |
인악당..
조선 시대 고승 인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인데
비각 안 비석에 인악대사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악대사비는 받침돌을 봉황으로 조각하여 이색적입니다.
비문은 1808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안동 김씨 김희순이 짓고 썼다 해요.
浮屠殿..
인악당 비각과 당간지주 옆에 있는 부도전..
인악대사 나무..
대구를 빛낸 역사적 인물,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해 이름 지어진 노거수.
해탈교를 지나고 용호문과 대웅전으로 향하는 앞에 서 있는 수령이 500여 년 된 느티나무.
지금은 계절적으로 나뭇잎 옷을 헐벗고 있어서
인악대사 나무가 좀은 서글퍼 보이는데..
잎이 무성하면 푸르게 뻗어 사람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어줍니다.
잎 무성한 계절에 찍었던 예전 사진은..
↓
http://blog.naver.com/zibb/80117998233
인악대사 나무 아래에는..
민들레와 제비꽃과 쑥이 소담스레 피어있었어요.
파릇한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 인악대사-仁嶽大師, 1746~1796
俗姓은 李씨, 법명은 義沾(의첨)으로 영조 22년, 1746년 달성의 인흥촌에서 출생.
인악대사는 8살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세 번 읽고 다 외워버려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근 고을까지 났다.
15세에 시경, 서경, 역경을 다 읽고 글을 잘 지어 천재라 했다.
18세가 되어 용연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심하고 벽봉화상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뛰어난 수행력과 정진을 바탕으로 당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스님은 비슬산, 팔공산, 황악산, 계룡산, 불영산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행과 설법을 거듭하다가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정조 14년, 1790년 정조가 부친의 원당으로 수원의 용주사를 지으며 당시의 명승으로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스님도 선출되어 세 종의 제문을 지었으며 정조가 그 내용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1760년 비슬산 명적암에서 향년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한 비는 지금 동화사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는 인악집. 화엄사기. 금강사기. 기신론사기 등이 있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을 자랑한답시고 이고저곳 돌아다니면서 두서없이 쓴 글을 모아 낸 책이 <팔공산을 아십니까? (1993년 도서출판, 그루)>이다. 그런데 200년도 더 전에 비록 방법은 다르지만 팔공산 동화사에 머물며 탐욕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심을 편 선조(先祖)인악대사(1746~1796)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찮은 글로 시민의 마음을 사려고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고 크게 부끄러워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동화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따라서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거쳐 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떠났음에도 특이하게도 인악스님은 귀부(龜趺)가 봉황이자 1808년(순조 8)당시 지방의 최고 실권자인 관찰사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이 짓고 쓴 비가 있을 뿐 아니라, <인악집>이란 문집을 남겼고, 조사전(祖師殿)에 개산조 극달화상의 지근에 스님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동화사를 찾아와 스님을 흠모(欽慕)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스님 오심은 한가로운 구름 무심히 피어남 / 스님 가심은 외로운 학 한 마리 긴 울음/ 위세와 힘으로 구필 수 없었고 /부귀로도 더럽힐 수 없으니 /뉘 알랴 나아가고 물러설 줄 아는 고결한 인품이 / 도리어 총림(叢林) 속에 있었던 것을 / 내가 와서 스님을 찾았더니 /구름 흩어지고 학은 묘연한 채 /오직 한 조각 그림만 남았으니 / 어찌 칠분(七分)이나 닮았으랴/ 아득한 저 허공 너머에서 마음으로 깨닫고 정신으로 만나리라.
이런 몇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조선 후기 불교가 핍박받던 시대에도 예외적으로 스님은 고위관료나,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이문(李門)의 족보에는 없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이 사실을 일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욕심으로 1997년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에서‘인악대사’라는, 2000년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에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인악스님’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글을 썼고, 대구화수회에도 알렸으며, 2003년에는 동화사 경내에 있는 큰 느티나무를 골라‘인악대사나무’로 명명한 바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알았는지 인흥에서 계돌(季乭)종인이 찾아와 스님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기에 드렸다.
그 후 나는 다른 일로 이 문제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이 뒤이어 <한주 이진상 연구>가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 간행되는 것을 보고 <인악집>은 물론 조선조 전기 대사간, 이조참의를 역임한 연담 이세인(1452~1516) 선조가 남긴 <연담집>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우 만농을 통해 대종회가 아니면 파종회에 건의하도록 했다. 사실 우리이문을 널리 알리는 방법은 사당과 재실을 잘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집을 번역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악대사의 생애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후범 전일주(田日周) 박사를 만났더니 책을 한 권 선물로 주는데 <인악집> 번역본이었다. 감격에 감격을 하며 고맙다고 했다. 이 소식을 아우에게 전하면서 다시 <연담집>이야기를 꺼냈더니 경대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종인이 개인적으로 번역해 보겠다고 하여 어쩌면 바라던 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번역된 <인악집>을 배낭에 넣고 화원 본리로 향했다. 계돌 종인이 보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생각하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한 번 가본 기억으로는 도시 집을 찾지 못해 지나가는 마을 어른께 물었더니 추석 전 돌아가셨으며 가족은 시내로 나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불과 몇 달 만 더 살아계셨다면 스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에 생전에 스님의 비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를 들어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천수봉 아래를 가르쳐 주며 한 동안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현장을 찾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규모가 큰 것이 인악대사는 물론 한솔 효상, 선략(宣略)장군 인곤(仁坤), 통정대부 랑(琅) 무려 4기의 비석이 한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하셨는지 문중의 도움을 받아 했는지 비용 또한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았다.인악대사 비문은 동화사 김 감사가 쓴 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다.
스님의 이름은 의첨(義沾)이요 법호는 인악(仁嶽)으로 고려 개국벽상공신대광사공(大匡司空) 성산부원군 이능일의 23 세손으로 달성 인흥에서 1746년(영조 22) 아버지 휘징(徽澄)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 향교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그 뜻을 깊이 이해하였다. 재주가 이웃마을에까지 퍼졌을 뿐만 아니라, 품행도방정하여 고을 사람들이 도와주면서 혹시 대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열다섯 살에 이르러 <시전> <서전> <주역>을 다 읽고 문장도 잘 지어 이름 난 선비가 되었다. 열여덟 살 때 동료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용연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감동이 되어 가선헌(嘉善軒)공에게 출가하고 벽봉(碧峯)화상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벽봉스님은 그가 큰 그릇임을 알고 <금강경>과 <능엄경>을 가르치는 한 편으로 서악(西嶽), 추파(秋波), 농암(聾巖) 등 여러 대사의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23세 되던 해 비로소 벽봉화상의 후계자가 되었다.
계보로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사 임제로부터 34세이고, 임란 때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서산대사(西山大師)로부터 8세손이며, 상봉대사의 5세손이다. 그 후 다시 화엄종장 설파(雪坡, 1707~1791)화상을 찾아가 아우가 되기를 자청해 승낙을 받았다. 비슬산, 팔공산, 불영산 등 여러 곳의 사찰을 돌면서 불법을 펼쳤다. 스님은 배우는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강의하여 당시 최고의 명강사로 통했으며,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 배우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에 용주사를 지으면서 주관할 이름 난 스님을 고르라고 하니 스님이 선발되었다. 스님께서 불상(佛像) 복장에 넣을 기원문을 지었는데 정조가 이 글을 보고‘어찌하여 스님이면서 이처럼 문장을 잘 하는 이가 있단 말인가 ’하고 격찬하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스님에게 왕이 직접 선물을 준 사례는 사명당, 벽암 이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1796년(정조 20) 당초 머리를 깎았던 용연사 말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 법랍 34년이다. 부도는 같은 절 적멸보궁 왼쪽에 있다. 저서로 <화엄사기> <금강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스님의 시문
<인악집>은 제자 성안(聖岸)이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 편집 간행했다. 몇 부를 간행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현재 동화사와 몇 서울대학교도서관 등 몇 곳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 석학이었던 매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서문과 우재악(禹載岳, 1734~1814)이 발문을 썼으며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는 절구와 율시 등 모두 77수가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봉안문 1편, 소(疏) 4편, 축문 1편, 제문 1편, 서 1편, 기(記) 10편, 비문 1편, 유공록 2편, 상량문 4편, 제3권에는 서(書) 34편, 행장 1편이 수록 되어있다. 이번 번역에는 이들 이외에 김희순이 쓴 비문도 포함되어 명실 공히 인악대사가 남긴 글은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짧은 시 두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월의 홍류동은 / 봄이 흐드러진 은사(隱士)의 집이라네. / 바위 끝 꽃은 볼수록 괴이하고 / 숲 속의 새소리는 들을수록 아름답네, / 산도 구름도 걸린 때가 좋고 / 개울은 돌이 많은 곳에 소용돌이 이네 / 신선이 멀지 않는 곳을 아노니 / 웃으며 산봉우리 안개 속에 들어가네.
-홍류동
하늘 높은 가을 들판 빛깔은 누르러 가는데 / 보이는 곳마다 가을바람에 벼 이삭이 향기롭네. / 우리들은 경술년에 이러한 풍경을 보노니 /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태평시절의 임금이라 칭송한다네.
-가을 들판
□맺는 말
번역자(전일주 · 구본섭)는 서문에서‘인악스님은 동화사의 고승대덕으로 학문이 출중한 학승(學僧), 후학을 널리 지도한 강백(講伯), 많은 시문을 남긴 시승(詩僧)’이라고 격찬했을 뿐 아니라, ‘글 가운데 기문과 상량문은 주로 사찰 건립이나 중건에 관한 사실의 기록으로 영남일원의 사찰과 당우(堂宇)의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지난 종보(제67호)에 소개 되었던 진주출신 청담(靑潭, 1902~1971)스님과 아울러 우리 성산이문은 자랑스럽게도 한국불교계에 우뚝한 두 분을 배출했다.
많은 종인들이 시간을 내 동화사 진영이 모셔져 있는 조사전에서 스님을 뵈옵고, 인악당에서 상서로운 새 봉황을 귀부로 만든 비와 명필이자 관찰사였던 김희순이 쓴 비문을 살펴보고,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한국불교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가 한 줌의 재로 남아 있는 용연사 적멸보궁 경내의 부도(浮屠)를 보면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신을 추슬러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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