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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를 찾아서 <1> 함양 벽송사

초암 정만순 2018. 1. 19. 14:22


산사를 찾아서 <1> 함양 벽송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국 선불교 잇는 종찰


- 조선 중종 15년 지엄대사가 중건
- 소나무 절경 품은 고즈넉한 사찰
- 삼층석탑 목장승 문화유산 눈길

- 한국전쟁 때 국군·빨치산 전투 벌여
- 대웅전 일주문 등 일부 건물 소실
- 현재까지 전쟁 상흔 고스란히 남아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고즈넉한 사찰인 벽송사(碧松寺)가 모습을 드러낸다.

벽송사에는 단청(丹靑)이 없다. 전각에는 화려한 단청 대신 하나같이 무채색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사찰과 다르게 절 한가운데 법당 대신 선방(禪房)이 있다. 벽송사가 조선 최고의 선풍을 일으킨 종가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이 절은 창건 연대 등 구체적인 역사는 알 수가 없고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 지엄 대사가 중건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이런 배경으로 국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됐고 대웅전과 일주문 등은 아직도 복원이 안 되고 있다.

이 절에는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많다. 보물 제474호인 ‘벽송사 3층 석탑’을 비롯해 경남도 민속자료 제2호 ‘벽송사 목장승’, 사찰 상층부에 자리 잡은 미인송과 도인송도 볼거리다. 보물인 벽송사 삼층석탑과 한 화면에 잡히는 도인송과 미인송은 절경을 이룬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내 벽송사 전경. 한 가운데에는 법당 대신 선방이 있어 조선 시대 최고의 선풍을 일으킨 종가임을 확인시켜 준다. 와일드 지리산 제공

■한국 선불교의 종가

벽송사는 한국 선불교의 종가다. 1520년 벽송(1464∼1534) 대사가 산문을 연 데 이어 벽송의 제자이자 한국 선불교의 양대 산맥인 청허(서산대사·1520∼1604)와 부휴(1543∼1615) 대사가 수행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 등 선교 겸수 대종장도 108명이나 배출됐다.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 )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나왔다.

예부터 벽송사는 금대암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수행처로 손꼽혔다. 벽송사 벽송선원은 공부 모임인 ‘선회(禪會)’를 복원해 전국 각지에서 온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 한때 ‘벽송사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내려올 정도로 우리나라 선불교의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 불교 말살 정책으로 인해 400년간 지속해온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민중 미학의 본질을 보다

   
입구의 목장승

벽송사 입구에는 목장승 한 쌍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장승은 사천왕상이나 금강장사를 대신해 잡귀의 출입을 막고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찰 측은 추측하고 있다. 오른쪽의 남장승은 대머리에 크고 둥근 눈이 돌출된 점이 특징이다. 몸통에는 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을 가진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왼쪽 장승은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이 파손돼 있다. 몸통에는 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의 뜻을 가진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특히 두 장승은 비록 눈 코 입이 과장되게 표현됐으나 순박한 인상을 주고, 무서운 듯하면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해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남도 민속자료 2호로 지정돼 있다.

■전쟁의 상처 치유에 나서다

   
벽송사 삼층석탑

벽송사 주변에서는 한국전쟁 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빨치산 남부군 이현상 부대가 섬멸되고 이현상이 사살된 곳도 여기다. 전쟁으로 이곳 일대에서만 7300여 명이 희생됐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벽송사는 지난해 국군 토벌대와 빨치산 대원 간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자리에는 인민군 1사단 참모장을 지낸 최모(92) 씨와 지리산 토벌대 작전참모 문(86)모 씨 등 80대 중반에서 90대 초반의 빨치산과 토벌대 출신 노인 5명이 참석해 극단의 상황에 내몰린 당시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아쉽게도 이날 극적인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벽송사는 지리산에 남은 이념 대결과 대립의 상처를 씻기 위해 치유의 공간인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벽송사는 사찰 소유 3만3000㎡(약 1만 평)의 부지에 트라우마 치유센터 조성 계획을 수립한 뒤 70억~100억 원 예산 확보에 나서고 있다.

원돈 스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남과 북은 핵과 미사일로 강경 대치하고 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통일을 대비해 상처를 씻고 서로를 보듬는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세우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고 밝혔다.


# 원돈 주지스님

- “물질에 끌려다니지 않으면 행복 찾아와”

   

주지 원돈(52·사진) 스님을 친견하고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와 신도들에게 평소 당부하는 말씀 등을 들어봤다.

평소 시 쓰기를 좋아했던 스님은 문학도를 꿈꾸며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중2 때 목격한 할아버지의 임종이 인생을 바꿨다. 임종은 그에게 죽음이 무엇이고 과연 극락세계는 있는 것인지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을 끝없이 하게 했고 그를 불가에 귀의하게 했다.

원돈 스님은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복학 대신 고향 인근인 순천 송광사 법정 스님을 찾아갔다.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1년 3월이다. 법정 스님은 그에게 사찰 주위 풀베기를 시킨 후 투표하러 갔다.

하지만 갑자기 심장이 너무 아파 풀베기를 할 수 없었다. 다시 오기로 하고 일주문을 나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아픈 기억조차 사라졌다. 그는 송광사는 자신과 인연이 아니라며 그 길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인생사 번뇌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날이 새기를 기다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인사를 찾아가 조계종 종정을 지낸 법전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원돈 스님은 “물질이라는 것은 있으면서도 없어지는 것으로 물질에 끌려다니지 말고 그 마음을 수행이나 기도를 통해 편안하게 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고 행복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벽송사는 예전부터 여러 선사가 수행했던 에너지가 감싸고 있는 곳으로 그냥 고요함이 아닌 정신이 깨어있는 고요함이 있는, 불교용어로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사찰”이라고 자랑했다.

스님은 벽송사 주지에 앞서 해인사 선원과 통도사 선원, 월명암 선원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고불암 등에서 포교 활동을 펼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