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다른 표기 언어 海南達摩山美黃寺一圓
시대 | 현대 |
---|---|
문화재 지정 | 명승 제59호 |
성격 | 명승 |
유형 | 지명 |
면적 | 4,619,039㎡ |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
분야 | 지리/자연지리 |
요약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명승.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 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겹처마 팔작지붕 건물. 보물 제947호. 단청으로 강조된 전체의 형상은 넝쿨이 뻗어 올라간 연당초의 구성이며, 조선 중, 후기 다포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용
해남 달마사 미황사 일원은 미황사를 포함하여 달마산 정상까지 수려한 지형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2009년에 명승 제59호로 지정되었다. 해남군 현산면·북평면·송지면 등 3개 면에 접하고 있는 달마산은 높이 489m로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약 28㎞ 떨어져 있으며, 땅끝 가까이에 우뚝 솟은 산이다. 미황사는 749년(경덕왕 8)에 의조(義照)가 창건한 신라시대 고찰이다.
달마산은 소백산맥이 두륜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일어선 산이다. 현산면이 머리에 해당된다면 북평면은 등에, 송지면는 가슴에 해당하는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의 줄기는 땅끝의 사자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달마산 일대의 암석단애는 달마산 북서쪽에 위치한 바람재로부터 달마산-귀래봉(471m)-도솔봉(421m)에 걸쳐 나타나는데, 길이가 약 6~7㎞에 달한다.
암석단애를 구성하는 기반지질은 변성퇴적암류인 덕룡산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런 기반암으로 암석단애를 이룬 곳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하다. 산 능선부를 점하는 변성퇴적암 계통의 규암질 암석단애는 풍화와 침식에 강해 급경사의 암봉을 이루는데, 마치 공룡의 등줄기를 방불케 할 뿐만 아니라 암색 또한 흰 빛을 띠고 있어 수려하고도 기묘한 경관을 나타낸다.
현황
달마산은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빛 등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의 좌일산에서 서로 봉화를 주고받던 곳으로 현재 잔허만 남아 있다.
미황사는 경사가 완만한 달마산 서사면 중간에 대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찰의 구역이 여러 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찰과는 달리 전면이 안산 등으로 막혀있지 않고 툭 터져 있어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미황사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947호), 응진당(應眞堂, 보물 제1183호), 달마전, 세심당, 향적당, 자하루, 범종각, 석비, 당간지주, 부도군, 사적지 등 많은 당우와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미황사에서 바라보이는 달마산 능선의 조망 경관은 빼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고, 달마산 능선에서 부감되는 미황사의 전경과 남해 도서의 조망 경관 또한 이 일대의 수려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매우 아름답다.
탁행(琢行) 등, 〈해남 미황사 괘불탱〉, 1727, 삼베에 채색, 1170×486㎝, 보물 제1342호, 미황사. 화면 가득 석가불을 강조하여 묘사하고 아랫부분 좌우에 자그마하게 용왕과 용녀의 모습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녹색과 적색의 밝은 채색과 녹두색·분홍색·황토색을 써서 은은한 분위기를 준다.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미황사 응진당(美黃寺應眞堂)이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
'文化 遺跡 > 山寺 情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사를 찾아서 <1> 함양 벽송사 (0) | 2018.01.19 |
---|---|
인악대사(仁嶽大師) (0) | 2018.01.17 |
장흥 보림사 (0) | 2017.12.01 |
팔공산 부인사 (0) | 2017.09.27 |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0) | 2017.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