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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부인사

초암 정만순 2017. 9. 27. 17:15



팔공산 부인사







고려 문명의 상징 ‘초조대장경’ 봉안…흐드러진 벚꽃길 따라 교종 불교 본산 거닐다


부인사 사적기에는 1928년의 대화재로 전각 전체가 불타고 ‘선덕묘(善德廟)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음력 3월 보름에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자리로 선덕묘를 이전하면서 숭모전(崇慕殿)이라 편액 했다.

고려조에는 팔공산이 불교의 중심지였다. 
그 중에서 고려의 국지대보(國之大寶)이자 문명의 상징이었던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을 봉안했던 부인사는 교종불교(敎宗佛敎)의 총 본산이었다.
조사(居祖社)는 보조국사 지눌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창하여 고려불교의 혁신을 이끌었던 선종불교의 태두(泰斗)였다. 

부인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다. 
2008년에 건립된 부인사사적기에는 ‘중악공산(中岳公山) 부인사(符仁寺)는 한국 제일의 호국 대가람이며 불법장흥(佛法長興), 법수장류(法水長流)의 성지다.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일통삼한의 호국도량과 아울러 모후 마야부인의 명복을 비는 원찰 부인사(夫人寺)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범우고(梵宇攷ㆍ1799년)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ㆍ1832년), 영남읍지(嶺南邑誌ㆍ1895년)에는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 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설에 선덕(善德)과 음이 비슷한 성덕왕대로 와전된 것이라고 하나 오히려 ‘부인사(夫人寺)’라는 사명으로 인해 성덕(聖德)이 선덕(善德)으로 와전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1989년 이후 3차례에 걸친 부인사지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녹유전(綠釉塼)과 토불(土佛)을 비롯한 출토 유물과 3층 석탑과 석등, 당간지주 등의 석조유물 등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2대 남해차차웅의 왕비를 운제부인(雲帝夫人)이라 한 예와 같이 신라에서는 왕비를 부인(夫人)이라 호칭했다. 
통일신라시대 금당지 주변에서 발굴된 ‘부인사금당(夫人寺金堂)’이 새겨진 암기와는 8세기 이후에 제작돼 즙와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신라시대에 ‘부인사(夫人寺)’로 불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부인사의 기록은 고려 광종 9년(958년),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세운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경보(慶甫ㆍ869~947)의 통진대사보운탑비(洞眞大師寶雲塔碑)가 가장 오래됐다.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로 가서 삭발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으로 들어갔다’는 비명의 ‘학수(學藪)’라는 명칭으로 볼 때 부인사는 신라시대부터 교학의 본산으로 팔공산에서 동수(桐藪), 즉 동화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부인사(夫人寺)는 부인사(夫仁寺)를 거쳐 부인사(符仁寺)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명종 10년(1180년)에 부인사(符仁寺)란 기록이 처음 나타난 이래 고종 24년(1237년)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부인사(符仁寺), 우왕 8년(1382년)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眞覺國師大閣圓照塔碑)에 부인사(符仁寺), 그리고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에 부인사(符仁寺)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부인사금당(夫人寺金堂)’으로, 12~13세기의 고려 어골문에는 ‘부인지사(夫人之寺)’로, 12~14세기에 ‘부인지사(夫人之寺)’로 새겨진 명문기와(銘文瓦)가 출토됐음이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로 공식문서에는 부인사(符仁寺)로 표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부인사(夫人寺)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명종 10년(1180년) 6월에 ‘큰 비가 내려 동경(東京) 부인사( 仁寺)의 북쪽 산에서 큰물이 솟아 나와 절의 건물 80여 칸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으며, 9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종 5년(1202년)에는 ‘동경의 별초군과 운문사(雲門寺), 부인사(符仁寺), 동화사(桐華寺) 승병이 연합하여 영주성(永州城ㆍ영천)을 공격했으나 패했다고 했다.
신종(神宗) 6년(1203년)에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 쌍암사(雙岩寺) 승군이 연대, 동경의 반란에 호응해 최씨 무신정권에 항거하다 진압돼 국문(鞠問)을 받은 뒤 섬으로 유배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부인사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로 대장경과 사찰의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승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해준다. 
이규보(李奎報)의 공산대왕에게 사례하는 제문에 ‘적괴들이 모두 사로잡혀 아군에게 목을 바쳤다’는 기록에서 부인사가 여러 사찰과 연합해 최씨 무신정권에 항거를 주도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었던 현종(1009~1031)때에 국난극복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초조대장경을 조성했다. 
현종 12년(1021년) 경 현화사(玄化寺)에서 판각을 시작해 문종 때, 혹은 선종 4년(1087년)에 완성됐다. 
초조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봉안하고 있는 재조대장경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로 통일신라 이래 발달한 고려불교문화의 역량과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리경을 계승, 발달된 인쇄기술이 집약된 고려 최고의 보물로 개경의 현화사와 흥왕사(興王寺)에 나누어 보관했다.

어떤 연유로 언제 초조대장경이 부인사로 옮겨졌을까? 여기에 관한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인종(재위 1122~1146)때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전소됐고 묘청의 난으로 국내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금(金)의 압력이 가중되는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당시 개경에 보관했던 초조대장경은 안전한 곳을 찾아 옮겨야할 처지였다.
통진대사 경보가 수학했던 학수(學藪)이자 신라 이래로 교학의 중심지였고 무애지국사 계응(戒膺)의 문도들에 의해 대장경을 수장(守藏)할만한 역량을 갖춘 영남의 부인사가 가장 적지로 판단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1964년 부인사 대웅전 후방 건물지에서 수습된 석편에 새겨진 ‘覺□如无智’의 명문이 판독돼 이 것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적사(嫡嗣)였던 계응(戒膺)의 무애지국사비(无智國師碑)로 밝혀졌다. 
계응은 당대 제일가는 화엄학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운미(雲美)는 계응의 법손으로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파행승으로 추방되자 계응의 문도들이 부인사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항거했던 것도 이런 연유였던 것 같다.

        



팔공컨트리클럽에서 대구시민테마안전파크~수태골~부인사에 이르는 약 4㎞ 구간의 이곳 벚꽃 길은 팔공산 경관의 백미(白媚) 중의 하나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아름드리 벚나무에 활짝 핀 벚꽃이 하늘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눈앞에 드러나는 길이 70m내외, 높이 2m 안팎의 장엄한 사찰의 석축은 불국사 석축의 영향을 받아 9세기 이후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변하는 시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계단에 올라서니 2009년, 보호수(지정번호 2-25)로 지정된 부인사 왕벚나무가 화사한 자태를 드러내며 반긴다. 
벚꽃 잎이 눈발 처럼 하얗게 내린 가운데 오래 전 금당에 오르던 계단에 장식했을 소맷돌이 조각나 흩어져 있다. 
왕벚나무 뒤로 동탑과 서탑이 우뚝하고 그 가운데 대구시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석등과 연꽃잎이 새겨진 배례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지만 동탑은 심하게 훼손돼 근래 복원된 것이다.
대구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부인사지의 옛 금당자리에는 최근에 세운 석탑과 누문이 들어서 있고 그 뒤로 동화사 못잖게 장엄한 전각으로 가득하다. 
명부전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화창이 있는 석등이 서있다.
부인사 동쪽의 일명암지(逸名庵址)에서 옮겨온 석등으로 대구시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됐다.
고종 19년(1232년) 부인사가 소장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은 몽고군의 방화로 한줌의 재로 변했다.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가 1237년에 재조대장경을 발원하며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이에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아, 여러 해가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돼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됐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재조대장경 완공을 고하는 분향례에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은 임진년(1232년)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는 기록에도 이같은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부인사는 또다시 호국 사찰로 거듭난다. 
1592년 7월 6일 부인사에서 대구지역 선비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의병을 결성하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ㆍ1550∼1615)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해 부인사에 의병소를 두었고 동화사의 관군과 연락을 취하며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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