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드러나는 길이 70m내외, 높이 2m 안팎의 장엄한 사찰의 석축은 불국사 석축의 영향을 받아 9세기 이후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변하는 시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벚꽃 잎이 눈발 처럼 하얗게 내린 가운데 오래 전 금당에 오르던 계단에 장식했을 소맷돌이 조각나 흩어져 있다.
왕벚나무 뒤로 동탑과 서탑이 우뚝하고 그 가운데 대구시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석등과 연꽃잎이 새겨진 배례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지만 동탑은 심하게 훼손돼 근래 복원된 것이다.
명부전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화창이 있는 석등이 서있다.
부인사 동쪽의 일명암지(逸名庵址)에서 옮겨온 석등으로 대구시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됐다.
고종 19년(1232년) 부인사가 소장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은 몽고군의 방화로 한줌의 재로 변했다.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가 1237년에 재조대장경을 발원하며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이에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아, 여러 해가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돼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됐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재조대장경 완공을 고하는 분향례에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은 임진년(1232년)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는 기록에도 이같은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부인사는 또다시 호국 사찰로 거듭난다.
1592년 7월 6일 부인사에서 대구지역 선비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의병을 결성하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ㆍ1550∼1615)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해 부인사에 의병소를 두었고 동화사의 관군과 연락을 취하며 조직적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