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수도 종교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인이자 수진선도원 스승 곽종인 - 1

초암 정만순 2018. 1. 10. 14:20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인이자 수진선도원 스승 곽종인 - 1




곽종인


 

모든 일은 다 하늘의 뜻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사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이다. 젊어서부터 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억지로 된 일이 아니다. 그저 하늘의 뜻이었을 따름이다.

 

내가 가평 운악산에서 수행을 하던 중 대사고를 당해 수행을 멈추게 된 것도 다 깊은 하늘의 뜻이었다. 그처럼 크게 다쳤기 때문에 나는 중국 화산에 가게 되었다. 아마도 아니 다쳤더라면 결코 중국행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나는 운악산 수행 중에 하늘로부터 요화曜華라는 도호를 받았다. 그리고 천부를 받고 천제를 지내라는 하늘의 명도 받았다. 이때 받은 도호 요화도 풀어보면 화산을 빛낸다는 의미다. 이미 오래전부터 화산 구도길이 예고되었던 셈이다.

 

한편 중국에 갈 때 백두산을 들러 동북 장춘으로 먼저 가게 된 것은 하늘이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어 오악 중의 하나인 화산에서 도교의 전진율학全眞律學과 비지秘旨(숨겨진 뜻)를 배우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하늘의 뜻이었다.

 

한국인으로 화산파 23대 장문인이 됨도 어찌 나 개인의 의지와 희망으로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아무나 갈 수 없는 화산 대상방에서 동굴 수행을 하게 된 것도, 중국 도교협회에서 옥천원 12동 화원에 내 거처를 마련해준 것도 다 하늘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에서 서파 5대 조사인 진육조 도인을 만나기 위해 절강성 영해에 있는 화산에 갔다. 이때 구룡이 내려와 내 몸 주위를 돌았다. 또 하늘에서 황통을 이어받아 천산에 내려온 귀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도 다 하늘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도봉산 자락 쌍문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제자를 키우고 선도를 펴게 됨도 다 하늘의 뜻이었다.

 

또 머지 않아 양평땅으로 거처를 옮겨 도장을 짓고 수진선도원을 열게 됨도 다 하늘의 뜻이리라. 어디 그뿐인가. 바로 이 책을 쓰고 펴내게하심도 하늘의 위대한 섭리요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버님과 어머님께

 

우리 아버님의 호는 낙천樂天이다. 어렸을 때 친구분들은 "낙천있는가?" 하면서 찾아오곤 하셨다. 아호 그대로 항상 정도와 중용을 지키면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아버님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원예고등학교를 창설하셨다. 그리고 원예고등학교 이사장 시절 돈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참 많이 도와주셨다.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면, 아버님은 참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비록 완고하셨지만 시집을 가서 고생하는 나를 사랑과 정성으로 어루만져주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님 관이 움직이지 않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관을 부여잡고 울며 아버님을 부르니 그제야 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죄 많은 여식으로서 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허나 지금 나는 아버님 아호처럼 하늘을 즐기는 여식이 되었다. 이제사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는 딸이 되어 가끔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언제나 항상 올바른 길로 가게끔 항상 엄하게 교육하시던 아버님.

 

그리고 큰소리 한 번 치시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주시던 어머님. 언제나 자애롭고 온화하셨던 어머님. 평생 누구랑 말다툼 한 번 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어머님. 항상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으셨던 멋진 어머님.

 

 

이제 두 분께 엎드려 절하며 고하옵니다.

 

"두 분의 하해같은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사실 오늘의 내가 부모님 없이 여기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진리탐구와 수도의 길을 가는 나에게 항상 어머님은 편지를 잊지 않으셨다.

 

"왜 하필 그렇게 어려운 도를 닦느라 고생하느냐?"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행을 하느라 부모님께 마음을 쓰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새삼 후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돌아가신 후에야 애틋하게 가슴저려야 했던 여식의 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살아 생전에 못다 한 효도의 아쉬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그리고 비록 돌아가신 후이지만 아버님, 어머님이 즐거운 곳에서 본성의 진원을 깨닫고 도道안에 계시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아울러 불초소생 생전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비는 마음도 간절하다. 이런 부모님의 교육이 있었기에 한 가문의 몸과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진하였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아울러 가없이 베풀어주신 부모님의 바다같은 사랑에 다시 한번 고맙고 또 고맙다는 뜻을 하늘에 올린다.

 

 

금정산 자락, 내 고행의 추억

 

내가 살던 집 앞엔 커다란 정자나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동네의 어르신들은 그 아래에 자주 않아 쉬시곤 했다.

 

어느날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집 대문을 나서게 되었다. 당연히 정자나무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거기엔 아버님이 않아 계셨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러고는 나를 앞에 꿇어앉게 하시고는 오늘 너의 잘못을 이야기해보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게 없었다.

 

그때 아버님이 입을 여셨다.

 

"여자가 길을 갈 땐 항상 자신이 가는 길만 똑바로 보고 걸어야 한다. 그런데 너는 어찌 옆을 두리번거리느냐.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해선 안된다."

 

이토록 우리 집안은 법도에 엄격하고 철저했다.

 

아버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항상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그중에서도 우리 조상이신 홍의 곽재우 장군 어머님의 일화를 자주 들려주셨다. 장군의 어머님께서는 여자는 항상 말없이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시집을 가셔서도 아들을 낳은 후에야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울러 아버님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가훈을 강조하셨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부지런하게 살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

 

성심일도하사불성誠心一到何事不成(성심을 한 곳으로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

 

이처럼 아버님은 언제나 욕심 없이 살아야 하며 절약하고 성실근면해야 한다고 다짐하셨다. 또 잘난척하지 말고 언제나 부드럽고 겸손하게 묵묵히 행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항상 정도正道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다. 재물이란 결과적으로 흉하거나 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으면 재앙이 생기니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집 가훈 자체가 도에서 지켜야 할 것과 일치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의 하루는 아침 종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님은 아침이 되면 종을 쳐서 모두가 일어나게 하셨고, 아침 등산으로 가족이 함께 장대산에 올라 옥천의 생수를 마시게 하셨다. 또 밤이면 물을 떠 놓고 천지조화주를 외우며 정신통일을 하도록 하셨다. 한마디로 엄하고 지조가 대쪽같은 아버님이셨다.

 

워낙 완고하신 아버님인지라 해가 지면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밖에 나갔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돌아와야 했다. 항상 회초리가 처마 밑에 매달려 있었다. 간혹 내게 잘못이 있으면,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어머님도 나와 함께 창고에서 벌을 서셔야 했다.

 

어머님께서는 인자하고 자상하셔서 집안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하모니카, 바이올린을 연주하시고 스케이트까지 타실 정도로 신교육을 받으신 분이셨다. 게다가 글씨는 아주 훌륭해 명필에 가까웠다. 나는 어머님께서 손수 지어 만든 반듯하고 깨끗하고 예쁜 복장과 구두를 신고 자랐다.

 

원래 나의 출생지는 부산 동래구 수안동 금정산金井山자락의 학수대鶴守臺가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풍수가들은 학의 기운이 어려있는 이곳에서 여자 신선이 태어난다고들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계룡산에서 도인 이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분은 여선女仙을 만났다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리고 문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다 된 밥이 홍두깨 식으로 내 앞에 떨어졌다"며 즐거워하셨다. 그런데 이젠 두분 다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축기공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날의 일이다. 꿈속에서 혼자 금정산에 놀러 갔는데 산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며 놀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한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다리를 절면서 신선 지팡이를 짚고 바닥에 금을 긋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려고 쫓아가면 그 노인은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저만치 앞에 가 있었다. 하여 내가 또 쫓아가면 또 저만치 앞에 가 있고...... 이러기를 세 번 금을 긋기까지 반복했다. 그러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하면서 소리를 쳐 불러보았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서 "나 여기 있다. 올라오너라"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허위허위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자 금정산이 내 배에 턱하니 걸쳐있지 않은가. 아래에는 개미처럼 사람들이 보였다. 이에 노랫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왕 대왕 탄생했네. 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넘쳤다.

 

이때 나의 배에는 표적으로 '임금왕王자' 가 등에는 '신선선仙'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각인으로 나타난 해인의 증거 중 하나이다.

 

 

귀신과 예수 이야기

 

어린 시절 나는 카톨릭 성당에 다녔다. 그것도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위해 아침을 먹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말하자면 아주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대밭을 지나 성당에 가던 길이었다. 이 대밭은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울창했다. 밤이 되면 대숲 우는 소리가 귀곡성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눈앞에 하얀 소복을 입고 공중을 떠다니는 귀신을 보게 되었다. '아....무서워'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아마 나는 이때 처음으로 귀신을 본게 아닌가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영사기의 필름처럼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일은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한다는 것을 어슴푸레하나마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집 정원의 소나무와 석류나무 사이에서도 귀신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집은 넓은 정원을 갖고 있었다. 온갖 화초와 나무들이 들어차 있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목련나무, 향나무, 감나무, 때죽나무......그래서 그런지 음기가 너무 강했을까.

 

귀신은 항상 내 주위를 위요하면서 떠돌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아침을 먹지 않아 허해졌다며 환도 지어주시고, 홍삼을 매일 한 뿌리씩 먹이기도 하셨다.

 

그리고 장날만 되면 큰아버님께서 침통을 차고 오셔서 나의 정수리에 어마어마하게 큰 대침을 놓아주셨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아프고 무서웠다. 왜 내가 이런 대침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때론 머리가 아팠고, 병원에서는 신경쇠약이란 말까지 들었다.

 

이때부터 서서히 영靈의 세계가 나에게 밀물처럼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남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고 느끼면서 차츰차츰 인간의 본질과 정신세계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남다른 영감을 지니고 있었다. 성당에서 세례명이 비비안나였는데, 사람들로부터 순수하고 맑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동래여고에 다닐 때 도 나의 예지력은 남달리 뛰어난 편이었다.

 

후일 대학에 다니면서 명동성당에 있는 가톨릭 학생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다. 매번 성체를 영할 때마다 예수님은 내게 모습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거의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계셨다. 그리고 긴 흰 옷을 입고 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인자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손수 항상 성체를 입속에 넣어주셨다. 왜 예수님은 나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나를 보살펴주실까.

 

이때쯤부터 꿈에서 나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꿈이 계시를 해주는 것이었다. 실제로 꾸는 꿈마다 귀신같이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그 꿈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체험을 많이 하면서도 결코 두려워 하진 않았다. 그저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신기한 것은 한참 후에 100일 축기공을 끝내고 가평 운악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린 시절 어디에선가 보았던 소복의 여인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어떠어떠한 인연으로 나를 찾게 되었다는 말을 했고, 나는 그녀를 위해 정성껏 천도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느 날 아주 밝은 얼굴로 나타나 고맙다면서 인사를 하고 갔다.

 

 

금정산 호랑이, 꿈에 나타나다

 

살다 보면 사람에 따라 많은 이적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일생 단 한 번도 겪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유달리 나는 신비한 꿈을 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해몽을 해보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결혼하여 첫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임신한지 채 한달이 안되어 배가 갑자기 너무나 아팠다. 부리나케 병원에 갔는데 담당의사는 한달 이상 입원해야 하고 유산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가뜩이나 병원에 오면 겁이 덜컥 나는데 유산 운운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심지어 의사는 대소변도 받아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놨다.

 

결국 나는 병원에 입원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금정산에 올라 어느 바위 앞을 지나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호랑이 새끼도 두 마리 있었다. 기이한 것은 이 호랑이 가족이 모두 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도 신기해서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일갈을 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길을 가면서 앞만 보고 가야지 왜 옆을 쳐다보느냐.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면 조심해야 하거늘."

 

게다가 새끼 호랑이까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배를 꽉 잡았다. 그 순간 나는 너무도 아파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런데 내 옆에는 할머니 환자가 있었다. 할머니는 "왜 그리 소리를 지르냐"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꿈 이야기와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더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주셨다. 그러면서 금정산 산신이 다 보살펴주고 있으니 잘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얼마 있어 의사들의 회진시간이 되었다. 담당의사는 내 상태와 차트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는 왠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만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처음 한달은 입원해야 하고 유산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며칠간 가슴이 콩닥콩닥했던 게 사실이었다.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 때 이미 금정산 산신이 나를 비호해주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에 도인 이 선생님은 내가 금정산 기운을 받아 학수대에서 여선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금정산은 나와 인연이 남달리 깊은 곳이다.

 

 

영적 에너지의 미스테리

 

어느날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런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하지 말아라. 왜 내려왔을꼬. 자존은 강하고 누구도 너를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

 

또 어느날 책방에 갔는데 책을 사러 온 어떤 분이 역시 나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결혼하면 고생하겠소. 그리고 도를 닦겠소."

 

나는 이미 결혼하기 전부터 이런 소리를 종종 들어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본즉, 내가 하늘에서 온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타의반 자의반으로 한 남자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헌데 약혼 사흘만에 학교로 전화가 왔다. 약혼자가 죽어서 대학 시체실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오 이럴수가.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흰 보를 덮어 놓은 시신 옆에서 가족들이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들어가자마자 무슨 까닭인지 흰보를 벗겨 던져버리고 나도 모르게 약혼자의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깨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자빠졌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부지불식간에 나의 위신력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후 실제로 변화가 있었고 의사들이 놀라서 뛰어왔다. 죽었다던, 사흘이나 시체실에 있던 약혼자가 살아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디 이런 이적이 일생에 한 번이라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나 이후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마치 우후죽순처럼 온갖 마장과 환란이 닥쳐왔던 것이다. 사업은 부도가 나고 집은 차압이 붙고....살아갈 도리가 없었다. 날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즈음 중학교 때 나의 은사이신 최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언제나 주위에 계시면서 나의 진로와 미래를 걱정해주셨던 분. 당시 나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던 그런 스승이었다. 그러면서 나로 하여금 불교에 관심을 가지도록 인도해주시곤 했다.

 

이때 한 스님이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누덕누덕 기워진 가사를 입은 그 스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시면서 "한 여인이 울고 있어서 찾아왔소"하는게 아닌가.

 

그때만 해도 나는 천주교 신자인지라 그저 불교는 미신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더 많은 대화도 나눌 수도 있을 터인데.....그때 그 스님은 이렇게 일러주셨다.

 

"지금은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오. 다만 장독대 위에 대주 밥그릇과 옥수를 떠 놓고 매일 108번씩 절을 하면서 하늘에 기도하시오."

 

또한 스님은 100일동안 매일 찬물에 머리를 감으라고 하셨다. 이 기도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스스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천주교 신자인지라 그럴수가 없다고 답했는데, 옆에 계신 최선생님께서 아무래도 너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것 같으니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아주 힘든 때인지라 우선 한 달만 해보기로 마음을 다져 먹었다. 문에 손이 쩍쩍 들러붙는 추운 겨울이었다. 우선 돗자리를 깔고 옥수를 떠놓고 108배를 했다. 그러고 나면 다리는 굳어 뒤뚱 뒤뚱하고 머리카락엔 얼음이 얼어붙었다.

 

"성모 마리아, 요셉이여, 도와주소서. 황씨 집에 시집와서 불교를 믿지 않은 내 탓이라 하오니 용서해주시업소서. 어쩔 수 없이 약속하였기에 정성을 다하오니 도와주소서."

 

나는 매일 자시子時마다 기도를 했는데, 그 추위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더너 마지막 날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갑자기 물그릇이 돌아가는데 그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금불상이 보였다. 그것이 발하는 광채가 너무나 밝아 거의 하늘에 닿은 것 같았다. 정신없이 바라보는데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데 어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단 말인가? 나는 다음날 최 선생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꼭 비밀로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나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가기 시작했다.

 

 

유리겔라와 양파 사건

 

한때 유리 겔라라는 이스라엘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흔든 적이 있었다. 그는 스푼을 손도 대지 않고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펴고 했다. 이른바 '스푼 밴딩'이라는 것인데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유리 겔라는 우리나라에도 와서 스푼을 구부리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등 초능력을 선보인 적이 있다.

 

후일 유리겔라의 초능력은 사기로 판명이 되었다. 몰래 구부려 놓은 스푼을 가지고 눈속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카메라가 찍지 않았으면 끝까지 초능력으로 믿고 넘어갈 뻔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대를 이을 초능력자를 선발하는 리얼리티 쇼도 주최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 당시에는 나도 초능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여러가지 초능력과 이적을 체험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유리 겔라의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학교선생이었는데, 학생들도 유리겔라에 대해 아주 호기심이 많았다. 나는 "마음을 통일하면 무한한 에너지를 지닐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말해주면서 나와 함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고 제안했다.

 

마침 교실 창문 옆에는 실험용 양파가 있었다. 아직 뿌리와 싹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양파에서 뿌리와 싹이 나오도록 하자."

 

나는 양파 하나를 골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눈을 감고 마음과 기운을 모았다.

 

얼마 후 학생들이 눈을 뜨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양파의 뿌리가 무려 10센티미터나 자라 있었고 위로도 싹이 나와 있었다. 단 10분만에 생긴 변화였다.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그러자 수업중이던 옆 교실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온 학교에 난리법석이 벌어진 것이다.

 

그날의 주인공인 양파는 교실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얼마 후 교장실로 불려가야만 했다.

 

 

예언과 치유의 능력이 찾아오다

 

예언과 치유의 능력은 내가 교사이던 시절에도 수시로 찾아왔다. 무엇이든 먼저 보이고 자연스레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한 기회에 마인드 컨트롤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채 3주도 지나지 않아 벌써 제 3의 눈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또 다른 현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내 몸이 벽을 뚫고 문도 없는 연구실로 들어가 조언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조언자(예수 혹은 석가모니)는 입만 열 뿐 정작 대답은 나 자신이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너무나 신기하고 두려웠다. 허나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내 마음을 스스로 조정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환부를 투시하고 치료까지 할 수 있었다. 양호실에 누워있는 아픈 아이들을 만져주기만 해도 다 낫곤 했다.

 

하루는 양호실에 찾아오는 학생들 중에 얼굴이 누렇게 뜨고 배가 아픈 아이가 있었다. 나는 어디가 아픈가 하고 눈을 감고 보았다. 그러자 뱃속의 누런 덩어리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어딘가에 가서 붉은 색깔의 약을 들고 와서 그 학생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자 학생은 그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모든 일이 찰나지간에 일어났고 꼭 실제처럼 보였다. 그 이후 학생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양호실엔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하루는 몇 번씩 발작하는 학생을 치유하기도 했다. 저절로 학생들은 나의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기적과 같은 일들이 꽤 많았다.

 

때로는 동료들의 몸에 안 좋은 곳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 동료가 정말로 병원에 갔다 오면 내 말이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동료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의문이 많았다.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것은 과연 무슨 힘일까?'

 

한번은 간질 학생의 발작을 풀어주자 내 몸에서 힘이 없어졌다. 그래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앉아서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며 기도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손바닥에 바람이 일어나면서 장심으로 뜨거운 기운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온몸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무수한 체험들이 나로 하여금 도문에 들어오게 한 것이다.

 

 

하늘의 소리를 듣다

 

처음 선도에 입문했을 때, 나는 소리에 의해 만물이 죽고 사는 생생한 장면을 꿈으로 보게 되었다. 어느날 열두 나무 대문이 달린 가운데 방에서 우렁차고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보았으나 주인은 안보이고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사람과 만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깥을 보아라."

 

그러자 마당에 있던 개와 고양이는 물론 방과 마루에 있던 사람들까지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오직 나만 살아 있었다. 그때 다시 백발노인이 우렁찬 소리로

 

"알겠느냐? 명심하거라. 이제 나는 간다."

 

고 말하자 그 즉시 방에서 빛을 발하는 둥근 불덩어리가 나와 서쪽 하늘을 향해 날아 갔다.

 

이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점차 사라져가는 둥글고 빛나는 불덩어리를 보다가 "아....가셨구나"하고 되돌아 안으로 들어오는데, 자연스럽게 문들이 탕탕탕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혀버렸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고양이와 개와 새와 사람들이 모두 기지개를 켜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움직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그때만 하도 내게는 의문이 정말로 많았다. 실로 몽중인이 되어 깨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간절하게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신각神覺이 옴을 알게 된다. 또한 선인지로仙人之路가 열려 저절로 도움을 주고 가르쳐준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최상법인 도기가 항상 존재함으로써 묘유의 힘이 생긴다. 모습은 없으나 볼 수 있고,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산 수행 체험

 

막상 수행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으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누구에게 물어볼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스님이나 도인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서 말이다.

 

그러다 조계사 근처를 찾아가게 되었다. 우선 불교를 알려면 책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연이란 신기한 것이다. 나는 알음알음 이렇게 인연줄을 드리우다가 어느 법사의 도움으로 <불교학 개론>과 <반야심경>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용맹정진 불교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불교강의도 듣고, 큰스님과의 인연도 이어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명언이었다. 막막할 것 같았던 구도의 길에 반딧불같은 희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화두를 들고 고뇌를 해보기도 하고 참선도 하면서 서서히 수행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조용한 수행터를 찾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 몸은 산으로 향했다. 이른바 산 수행, 산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동서고금의 탁월한 종교 지도자들이 산에서 기도하고 산에서 응답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산은 위대한 스승이요, 어머니요, 계시자요, 구원의 품이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산속에만 들어가면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했다. 산에는 기운이 있었고, 그 기운은 생기복덕 같은 것이었다.

 

세계의 지붕이라 할 히말라야 산맥도 최근세에 등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신비의 기도터였다. 당연히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수많은 등반가들이 8천미터 급의 고봉들을 오르내렸어도 네팔이나 티베트인들에게 산은 그 자체가 불멸과 신비의 어머니였고 위대한 신이었다.

 

다울라기리, 칸첸중가, 마나슬루, 초모랑마, 마칼루 같은 세계 최고봉들은 존재 그 자체가 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히말라야보다 비록 낮으나 신성한 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리설산, 마차푸차레, 카일라스 같은 산들은 지금도 신성한 산으로 함부로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한다.

 

이러한 산들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등반가와 여행가들이 네팔이나 티베트의 히말라야를 찾아든다. 히말라야 산군이 잘 관망되는 장소에 가면 처음으로 웅장한 설산을 본 사람들의 기도와 절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감동은 전율이요 충격이다.

 

내가 구도와 수행에 인생을 건 이후 산을 찾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산에서 수행해야만 공포와 어둠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했다. 구도행을 하면 할 수록 마장도 더 생기는 법이다. 도고일척이면 마고 일장이라는 말도 있다. 도가 한 자면 마는 한 길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구도자의 삶은 극기와 인내로 점철된 삶인 것이다.

 

눈이 오건 비바람이 불건 나는 산을 찾았다. 심지어 학교에서 퇴근하고 깜깜한 밤에도 산을 찾았다. 절대고독, 절대적막, 절대어둠 속에서 치열한 구도의 수행은 이어졌다. 수많은 구도의 선배들도 다 이런 길을 걸었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명산은 다 올라가서 기도와 수행을 했다.

 

한번은 도봉산을 오를 때였다. 비록 서울에 있어서 그렇지, 도봉산도 알고 보면 천하의 명산이다. 아마 이 도봉산이 지방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명성이 더 높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의 들머리로 들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수천 마리의 뱀들이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온몸에서 소름이 돋고 식은 땀이 흘렀다. 그러나 백척간두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감히 누가 가는데 앞길을 막느냐! 당장 물러서라!"

 

나도 모르게 이런 당찬 대갈일성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거짓말처럼 그 무섭던 뱀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산신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서 더더욱 나의 산 수행은 치열해져 갔다.

 

또 한번은 내가 수행하는 근처에서 굿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굿이 안 되었는지 어떤 남자가 찾아왔다.

 

"도인이신가봐요. 그런데 여자네."

 

그는 나를 보고 놀라더니 굿이 안 되어서 그러니 자리를 비켜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퉁부처처럼 한치도 흔들림 없이 수행에 몰입했다. 이것도 일종의 시험이요 마장이기 때문이다.

 

어떨 땐 눈이 엄청나게 내린 산속에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붙들인 적도 있었다. 폭설이 내린 그 깜깜한 밤에 여자가, 그것도 학교 선생이란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으니 경찰들로서도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이런 수행의 근기가 있었기 때문에 후일 힘들었던 화산 수행도 마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도문으로 들게 한 스승을 만나다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선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에 따라선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없고, 만나고 싶은 친구도 못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조금이라도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은 놓아버리고 오로지 꿈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괴롭고 힘들더라도 목표를 향해 쉼없이 걸어갔다.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 문제를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교직이 생활고를 해결해주었다. 나는 교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되 나머지 시간을 목숨과 같이 여겼다. 집에서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그러면서도 시간을 쪼개서 내 부족한 수행을 메우려고 노력에 노력을 다했다.

 

대학에 가기 전, 아버님께서 선거에 낙선하셔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꼐 효도하기 위해 사범대를 갔다. 당시에는 소질을 인정받으면 사범대에 장학생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이후 다시 복직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상담심리를 전공했다.

 

이때부터 무엇이든 알아야 하겠다는 탐구열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불교 교리에 깊이 심취했다. 또한 심리학과 유식철학을 비교 연구하면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이미 이때 나는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인드 컨트롤 교육을 받았는데 여러가지로 실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원래 내 속에 갖고 있는 힘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서서히 우주철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타고난 수가 미치는 연월일시를 가지고 원방각 수천 장을 그렸다. 더불어 천지인 삼재의 이치와 간지를 연구했다.

 

이렇게 우주변화의 진리를 터득하면서 숫자와 이치로 나의 일생을 풀어 대학노트 39권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나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그러나 근원을 찾아가면 갈수록 참선만 해서는 거기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성명쌍수를 할 수 있는 도문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럴 즈음 큰스님의 소개로 도인 문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자정이 넘었는데 전화가 왔다. 한 도인이 광주에서 올라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도인을 만나러 간다'

 

검은 고무신에 때에 찌든 소매, 그리고 와이셔츠 칼라와 물들인 무명바지. 턱 밑에는 많지도 않던 수염과 작은 키에 배는 포대화상처럼 둥글고 컸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간절했다.

 

내 사정을 들은 문선생님은 웃으시면서 "다 된 밥에 홍두깨식으로 내 앞에 왔구나" 하시며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전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면 생활도 공부도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서 몇 개월 후 추석이 되었다. 나는 다시 문선생님을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동지에 시작할테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공부할 것은 아무데나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이런 조건에 맞으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옥상이 있는 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방을 구하느라 서울 시내를 여기저기 헤매기도 했다.

 

우선 서로 의기가 투합되는 몇 분과 함께 수행이 시작되었다. 네 사람이 도반이 되었고 100일 동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심히 수행을 끝냈다. 이렇게 수행을 하는 동안 많은 것을 체험했기에 도를 향한 나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 갔다.

 

보통 자시공이 끝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3시가 넘었다. 이때부터 잠자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도를 향한 수행과정은 신비로우면서도 치열했다. 학식호흡을 할 떄는 수천마리의 학이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폭풍과 같았다. 이때 쓰러지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이겨내었다.

 

또 여러가지 시험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무난히 이겨내었고, 특히 독소가 빠져나갈 때의 고통도 잘 이겨내었다.

 

한편 옥상에서는 별 공부를 했다. 이때 별과의 영적 만남도 있었고 영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정리가 되지 않은 몽중인이었다.

 

정말로 신기하고 두렵기도 했다. 허공속에서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보통사람이 알 수 없는 참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인생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 일어나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행이 끝나갈 무렵 나에게 천부령이 내려졌고 나는 천부인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도반들이 함께 우리 집에 모여 3년 동안 18경신을 이겨낸 일이다.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신을 이겨냐야 하는데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정에 시작하면 밤은 견디기가 쉬운데 낮이 되면 참으로 힘들었다. 기운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눈앞을 스치면 세수를 하면서 걸어다녔다. 어떨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토록 서로 격려하고 관찰하면서 이겨나갔다.

 

마지막 날 밤 12시가 되었을 때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곤 눈 깜빡할 사이에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승리감을 맛보면 참으로 통쾌하였다.

 

이런 과정들을 모두 거친 지금, 나는 무위를 지키면서 청정으로 나의 심신을 보호하고 있다. 현玄을 요달하고 도성道性을 깨달았기에 마음에 취하는 바는 없다. 하지만 유위공덕으로 법규를 견지하면서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점차적으로 도문에 들어오게 하려 한다.

 

속세의 변화에 따라가면 인과고락이 있게 되지만, 무상대법은 일체를 이루는 무량법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