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의 밀교승들은 죽음의 세계까지도 분석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한 본격적인 분석이었다.
인간이란 살아가며 죽어가고, 죽어가며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자칫 쾌락주의에 빠지기 쉬울 것이며, 죽어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염세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다. 쾌락주의도 염세주의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손등과 손바닥을 함께 볼 때 손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고 볼 때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시실리섬 시민들의 생활을 비판한,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내일 죽을 것처럼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또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있다.”라는 것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넘치는 저 사치풍조는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집착했기에 전개되는 문제가 아닌가.
티베트밀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배워라. 그러면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티베트밀교에 의한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사자(死者)의 서(書)(Book of Dead)》29)는 수천 년 동안 티베트에 비밀로 전해오다가 서양의 학계에 소개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9) 티베트의 《사자의 서》는 불교적 시간관에 기초를 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의 의례(儀禮)를 통하여 처음에는 사자(死者)가 생(生)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고, 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 책이다. 파드마삼바바가 지었으며, 1927년 에반스 웬즈에 의하여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어 서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경서원 1984. 류시화<티베트 사자의 서>정신세계사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음천도밀법〉은 일천 수백 년 동안 전해져 온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임종, 그리고 재탄생까지 49일간의 모습이 선명한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고,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갖지 않은 상태인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고 다만 영혼의 무한한 여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갓난아기가 이 세상에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 죽은 자는 사후세계에 눈을 떠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W·Y·웬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다.
참다운 과학적, 요가적 방법에 의한 인간이라고 하는 그 알지 못할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구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차원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육체가 달 또는 금성 그리고 그 어떤 천체 위에 서 본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지식에 보탬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못한 지식을 좀더 걷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책에서의 현인(guru)의 가르침처럼 사물을 넘어선 초월, 바로 그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는 인간이 사후 다른 생을 얻기까지 49일 동안 흔히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을 현대적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 인간들에게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종 때,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은 육체의 중추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처음에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곧 밝고 맑은 빛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평온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많은 영혼은 그것을 겁낼 것이다. 즉,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는 죽었지만 새로운 몸이 생겼다고 많은 영혼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몸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게 무게가 없으며 공중에 떠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육체의 죽음을 알고 절망하거나, 혹은 육체가 죽은 것을 잘 모르고 죽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은 빛 속을 더욱 날아가서 전에 죽은 육친과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다.
그 후 영혼은 이상한 거울도 보게 될 것이다. 이 거울에는 생전에 그 사람이 행한 행위와 생각의 모든 것이 비쳐진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나쁜 행위와 나쁜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시련을 불에 데는 것처럼 느끼는 영혼도 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무서운 한랭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더욱 밝은 빛 속으로 날아가는 영혼도 있다.
이 여행은 길다. 혹은 짧다. 도중에 암흑과 빛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리고 조만간 많은 영혼이 무한한 하늘을 빠져나가 마지막 어두운 길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길은 좁고, 괴롭고, 길고,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그 길의 저 쪽에 다시금 빛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혼의 세계의 빛이 아니라 다시금 이 세상의 빛이다. 많은 영혼은 이렇게 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전에 살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영혼이 아주 다른 곳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둡거나 혹은 밝고, 길거나 혹은 짧은 육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밝음·어둠·길·거울·번갯불 등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받기 위하여 생전에 자기 자신이 지은 업(業, Karma), 즉 카르마의 환각을 체험하며 49일간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하루하루는 자기 자신의 의식구조 속에 고여 있던 이 세상에서의 업이 가시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살아서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산 사람은 역시 죽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기심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 서》에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음계를 여행하는 사자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모두 환각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더불어 그 어느 환각에도 휩쓸리지 않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아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에서는 인간의 초심리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를 보면 《사자의 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점이 서구인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연속되는 환각으로 하여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감정에도 물들게 하지 말자. 네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그 세계의 ‘비전’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온 재물들과 소지품들이 타인의 손에 넘어감을 보고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너를 어둠과 괴로움의 세계로 끌고 갈 뿐이다. 설령 너에게 속계의 재물을 준다 해도 너는 가질 수 없다. 집착을 버려라. ……
결론적으로 여러 불교의 죽음관을 검토해 본 결과 정확하게 판결된 뇌사상태는 죽음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불교의 죽음관은 뇌사를 죽음으로 봄으로써 장기이식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뇌사를 인정하는 데도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뇌가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존재는 이생을 위해서도 다음 생을 위해서도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시키면서 심장의 박동을 작동시킨다 해도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육체’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관계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뇌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들의 식을 발생시키는 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어 버리고, 식이 발생할 수 없게 되면 행, 즉 의지작용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지작용이 발생되지 않으면 업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업이 만들어지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전의 표현대로 ‘무덤에 버려진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의지작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는 이미 만들어 놓은 자신의 업에도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지만, 미래의 생존을 위한 여하한 업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장기가 누구에게 주어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있었을 때 자의에 의해서 사후에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경우여야만이 선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뇌사가 된 상태의 우리의 장기를 누가 잘라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음 생의 우리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사자의서와 불교에서의죽음
죽음은 우주적 소멸의 과정을 구성하는데, 이는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주적 원소들이 점진적으로 서로에게 녹아든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원소인 흙은 원소인 물에 ‘흘러’ 들어가고, 물은 불에 흘러들어가는 식으로, 한 우주적 원소의 각 융합은 명백히 새로운 퇴행이며, 이 과정의 끝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던 우주는 소멸한다―마치 대순환(mahā-yuga)의 끝에 우주가 소멸하듯이, 각 퇴행은 죽어가는 사람에 의해 생리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원소인 흙이 원소인 물에 녹아들면, 육체는 그 지주(문자 그대로는 그의 ‘받침목’), 즉 그 결집력을 잃는다. 그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해체된다.
소멸의 과정이 완결되면, 죽어가는 자는 달빛과 같은 빛을 인지하게 되고, 이어서 햇빛과 같은 빛을 본 뒤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자신의 고유 자아와의 만남으로, 이는 범인도적인 교의에 따라, 궁극적인 실재이며 절대존재이다.『티베트 사자의 서』(중음천도밀법, 中陰遷度密法)는 이 빛을 ‘순수한 진리’라 명명하고, “섬세하고 찬란하고 빛나며, 눈부시고 영광스러우며, 휘황함 속에 공포심을 주는” 것으로 묘사한다. 책은 망자에게 명한다. “주눅 들거나 두려워 마라. 이는 그대 참된 본성의 광휘이니 이를 올바로 인식하라!” 순간 이 빛의 중심으로부터 수천 개의 천둥소리를 합친 듯한 굉음이 울려나온다. “이는 그대의 실재 자아의 본성의 소리다”라고 책은 명시한다. “두려워하지 마라!…그대는 이미 혈육으로 된 육신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떠한 소리나 빛이나 광선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나니, 그대는 죽을 수 없다. 이 환각들이 그대 자신의 사고형태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되느니라. 이 모든 것이 중음(中陰, bardo)임을 인식하라.”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망자는 이 충고를 실천하지 못한다. 업력(業力)에 묶인 그는 중음의 특징적인 발현들의 순환과정 속에 힘없이 이끌려든다.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망자는 여러 광선과 신을 보리라는 통지를 받는다. “하늘은 온통 짙은 푸른색으로 보일 것이오.” 망자는 흰색의 비로자나(Bhagavān Vairocana)를 보게 되고 곧 그 중심으로부터 법계의 지혜(법계체성지, 法界體性智)가 나타나는데, 이 역시 흰색이며, 빛나고 투명하며 폭발적인, 너무나 강렬하여 마주 볼 수 없는 빛이다. “동시에, 신들에게서 나오는 우중충한 백색광이 그대의 이마를 때릴 것이오.” 악업의 힘으로 인해 망자는 찬란한 법계의 빛을 두려워하고 우중충한 신들의 백색광에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망자가 신들의 광선에 집착하여 결국 윤회육도(輪廻六道)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고 생각을 비로자나불에 몰두하라고 격려한다. 이리하여 망자는 마침내―무지갯빛 후광(halo) 속에서―비로자나의 품속으로 녹아들고, 삼보가카야(Sambhoga-kāva, 報身)의 중심에서 부처의 상태를 얻는다.
망자는 이후로도 엿새 동안―해탈과 부처의 본질로의 동화를 의미하는―순수한 빛들과, 어떤 형태로든 내생(來生), 즉 지상으로의 귀환을 상징하는 불순한 빛들 사이에서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청백색 빛들 다음으로 노란빛, 붉은빛, 초록빛을 보게 되고, 마지막으로 모든 빛을 함께 보게 된다.
이 극히 중요한 책을 그에 걸맞게 논평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에 직접 관련된 몇 가지 고찰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에 보았듯이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해탈을 위해서는 그가 이 순간에 체험하는 청정한 빛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인도의 모든 사상에서―모든 사람이 그 행위의 과실을 수확하리라는―업이 지닌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는 언뜻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무명 속에 사는 인간의 행위들은 업을 이루는데, 이를 죽음의 순간에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업의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 무지한 혼은 순수한 빛의 부름을 외면하고, 하등한 존재양식을 뜻하는 오염된 빛에 이끌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전에 요가를 수행한 사람들은 청정한 빛 속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부처의 본질로 녹아든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대면하는 빛은 여러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과 동일시되는 바로 그 내면의 빛이다. 생전에 이 빛에 접근하는 것은, 요가 수련이나 영지에 의해 정신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죽음의 순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빛은 모두에게 드러나지만, 입문자들만이 이를 수락하고 받아들인다. 사실 이 『사자의 서』는 임종 시와 그 후의 며칠 동안 라마승이 망자에게 읽어주는 책으로, 이 높은 목소리의 낭송은 마지막 호소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망자 자신이다. 바로 그가 청정한 빛을 선택할 의지와 내생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새로운 입문의 기회를 주미만, 이 입문 역시 다른 입문들과 마찬가지로 대결하고 극복해야 할 일련의 시련을 포함하고 있다. 사후의 빛의 경험은 최후의, 그리고 아마도 가장 어려운 입문적인 시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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