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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리산동북부7암자를 찾아서....

초암 정만순 2014. 3. 17. 10:43

 

                      지리 동북부7암자를 찾아서....

산행코스 :운암 해동검도 수련원 ~ 산죽비트 ~ 상대날등 ~ 지장사 암자터 ~ 금낭굴 암자터 ~ 상대날등 장군봉

             ~ 상대날등 꼭지점 ~안락문 ~함양독바위 ~신열암 암자터 ~고열암 암자터 ~의론대 ~선녀굴 암자터

             ~ 다시 4거리 ~유슬이굴 암자터 ~ 황새날등 4거리~ 선열암 암자터 ~ 환희대 ~노장동 마을터

             ~ 운암 해동검도 수련원

 

   지금은 헛집,헛방 헛절로 역사와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실체없는 지리 동북부의 7암자터..

   상대날등과 황새날등을 좌우로 거느린 음달골이 오죽 깊고 험했으면 `그 곳에 가면 사흘안으로는

  나오기 힘들다`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는 이곳은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에서 6·25 민족전쟁을 거치는 동안

   빨치산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곳으로  최근 역사 탐방코스로 인기있는 코스이다.

   한국전쟁 지리산 전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노장동전투에서는 골짜기의 요새같은 지형탓에 수많은 전투로

  인명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자체의 개념도 모른체 좌와 우의 소용돌이에 말려  숱한 고초를 겪은

   곳으로 산자락 구비 구비마다 슬프고 애잔한 사연도 많아 내딛는 발자국마다 그때의 아픔이 진하게 묻어나며 한국

   근대사에 있어 혼돈의 역사...질곡의 역사...슬픈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곳이다.

 

 

 적조암

 새마을지도자의집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보면>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또다른 환희대를 찾아 이곳 암자터 옆으로 진행하는데....길은 희미하나 진행 할만하고~~~ 

 ▽ 지장사터.
    아주 넓은 지대에 기와조각들과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축대도 보이는 등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 금낭굴암자터.
    금낭이란 비단주머니를 뜻하는 말인데 어째서 이 바위를 금낭굴이라고 부르는지 지명의 어원도 알려지지 않았고 이곳에 위치했던 암자에 대한 기록도 전무하며, 다만 지역민들이 '금낭굴 암자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제 금낭굴 좌측 통로로 해서 상대날등으로 진행~~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상대날등 꼭지점 앞에 있는 큰 암벽~~ 좌로 우회하면 상내봉~~   우로 우회하면 안락문

 함양독바위앞사거리

 안락문

 

     -함양 독바위-

  독바위 앞에 ‘함양’이 붙은 것은 지리산 상에 3군데의 독바위가 있기 때문이며, 그 하나가 남부능선상에 있는

  하동독바위이고, 또 하나는 동부능선, 즉 쑥밭재와 새봉사이에 있는 산청독바위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산중에 홀로 외로이 있다해서 홀로독獨자를 쓰기도하고, 독아지 모양을 닮았다해서 옹암甕岩이라 부르는 곳도

  있으며, 상투를 틀어 올린 모습과 같다하여 상투바위라고도 부른다.

  함양 독바위는 유두류록에 독녀암이라 기록해 놓았는데

  “한 부인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득도하여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한다.

 함양 독바위 오르는 길

이곳에서 밧줄을 잡고 박혀있는 볼트를 밝고오른다.

바위 측면을 타고 올라 몸을 옆으로 하여 좁은 틈새를 빠져나가면 정상부에 묶인 보조자일이 있다.

  음달골(음지골)~~

  흐름의 방향이 북향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부른다 한다.

  하지만 안으로 스며들면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함양독바위에서 생성한 상대날등과 황새날등을 좌우로 거느린 음당골이 오죽 깊고 험했으면 "그곳에 가면 사흘안으로는 나오기 힘들다" 는 말까지 전해져 올 지경이다.

한국동란 지리산 전사에도 등재되어 있는 노장동전투에서는 골짜기가 요새같은 지형탓에 피아간에 혈전이 수없이 이우어져 아군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운암마을도 보인다.

 산 끝자락 저 아래는 엄청강이 활처럼 휘어져 흐르고 있다.

 

 함양독바위에서 되돌아 나오자 마자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의 서쪽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2분저도 가서 등로 우측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있는곳(신열암터)

 ▽ 신열암터.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잇고 앞으로 넓은 공터에 주출돌과 기와조각들이 널려있다.

 신열암의샘터흔적

 암자 터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 텅 빈 이 폐허의 자리에서 그저 하룻밤 잠만 자도
도가 닦여질 것 같은 명당 터입니다.

 

       고열암 암자터~~  

 잠필재 김종직 일행이 산에 들어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너른 석굴과 신열암보다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고~~.

 양지바른 방향으로 들어서 있어,한겨울에도 온화하고 따뜻함이 베어있는 듯한 느낌이. 

 

 

 고열암의샘터

 고열암터에서 다시 되돌아 나와 진행방향 좌측바위 앞으로 내려서면 의론대,선녀굴가는길

 의론대에서 바라본 함양독바위

 의론대

예전에 절벽아래 석굴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노숙 우타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이 삼반석에서 대승 소승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우쳤다고 해서 이 곳을 의론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의론대(議論)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승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론대에서 100m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표지목이 서있는 사거리에서 진행방향 좌측의 내리막으로 2분정도 가면 우측에 션녀굴

 

 선녀굴사거리

 선녀굴은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최후의 3인부대로 떠돌던 중 3인중의 한 사람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인 이은조(45세)가 사살된 현장입니다.
1961년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경찰들과 수사관들이 체포당시의 총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한 정순덕을 한 촌부의 지게에 지고서 선녀굴로 향하는데
지나는 마을사람들로부터 돌멩이가 날아들었다는 얘기가 있기도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나뭇꾼과 선녀”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곳 션녀굴

 

 

 선녀굴에서 다시 솔봉능선 표지목 사거리로 되돌아 와서 진행방향 직진으로 들어섭니다.
이 길은 예전에 선녀동과 노장동 마을을 오가는 옛길로서 묵은 길이지만
아직도 희미하게 길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정확하게 길의 분기점인 사거리표지목에서 환희대가 있는 문수사 능선까지
약 600여m 문수사 상부 골짝을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처음 약 100m 정도는 길이 있다가 다음부터는 너덜지대로 길 흔적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도변화 없이 앞쪽에 보이는 큰 바위(유슬이굴)를 향해 약 200m 더 직진을 합니다.
다래넝쿨과 잡목들이 광케이블처럼 엉클어진 덤불 속에 입구가 삼각형인 석굴이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슬이굴

 다래넝쿨과 잡목들이 광케이블처럼 엉클어진 덤불 속에 입구가 삼각형인 석굴이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유씨성을 가진 어느 사람의 기도 터 이어서 유슬이굴 이라고 했다는데 주변에 아주

 오래된 기왓장들이 널려있음이 암자 터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마치 안방 같은 굴 내부는 수도 정진하기에 딱 좋은 모습이다.

언제 적에 탄생하고 사라졌는지 절의 역사는 알길 없지만 덤불 속에는 암자와 석굴을 연결해주는 돌계단도 선명합니다.
절터의 고즈넉함과 마치 안방 같은 굴 내부의 넉넉함이 궁합을 이루어서 학승의 공부도량으로 딱 좋은 곳 입니다.

 유슬이굴에서 고도변화 없이 북쪽으로 300m쯤 진행을 하면
문수사와 노장동에서 올라오는 능선에 닿습니다. (고도 920m)
능선에서는 우측의 독바위 가는 길과 좌측의 노장동 가는 길도 버리고 역시 고도변화 없이 직진하여 약 100여m 산 사면을 이어가다 작은 능선을 넘어서 구릉지대로 내려서면 선열암터 입니다.

 성곽의 요새 같은 함양독바위가 버티고 있는 황새날등의 꼬리부분에 자리한 선열암터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 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곳으로 지형이 절묘하고 예사롭지 않습니다.

 *선열암터
주변에는 하루 한 끼니 분의 쌀이 나왔다는 식장산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바위굴도 있다고 도합니다.
쌀바위의 전설하나만 믿고 이 골짝에 들어왔던 비결장이들이 절터아래 노장동의 원주민이며
억지로 절터 벼랑 아래로 내려가 보면 기와조각과 청자, 백자 파편들이 얼추 한 트럭 분량은 흩어져 있습니다.

 환희대

이 바위가 "유두류록" 탐구에서 환희대라고 추정하는 곳 망바위 입니다.
망바위 앞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내림 길을 따라 10분정도만 가면 노장동 마을터 입니다. 
 [유두류록에]

  환희대(歡喜) : 김종직의 기록에 지장사에서 “1리쯤 되는 곳에 있다.

  그 아래로 천 길쯤 되는 절벽이 있고 金坮庵·紅蓮庵·白蓮庵 등 여러 암자가 보인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직접 와보니 천길은 아닌듯 하외다~~ 

 

 노장동 마을터~~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6.25전쟁 때까지는 열두 가구정도 삶을 꾸려 왔다는 노장동 마을터.

  [진주민란(1862년)이 일어나기 전..청학의  이상향을 찾아 나선 것처럼 함양에 재법 많은 재산을

  가지고 거주하던 A씨 집안 사람들은 함양독바위 아래의 지역을 하늘로 올라가는 길지라 생각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들어가 살면서 [노장대마을]의 유래가 시작 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기는커녕 산골짜기에서 정리하고 온 재산은 점점 없어지니 함양에서 이웃하던

  B씨 집안 사람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나 살기 힘들어 지니 그 마을로 이주를 하면 안심할 수 있는

  땅이라 유인을 했다 합니다.

  그리고 사전 조사차 B씨 집안 사람들이 방문을 할 때면 [상대굴]로 데려가서 손을 굴속에 집어

  넣으면 방문한 사람의 수만큼의 쌀이 나오도록 만들어 두었습니다.

  어수선한 전쟁 통에 그렇지 않아도 피난처를 찾던 B씨 집안으로서는 쌀이 절로 나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이상향이라 믿고 가산을 정리하여 [노장대마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장대마을]은 A씨와 B씨의 집안으로 형성된 집성촌이 되었다는...

 

 돌아오는길에 오도재에서....

 눈으로 본 것은 전무해도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에 담은 감동은 풍성한것 같습니다.
진실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차원의 세계로 가는 길이 있다면 아마 이런 길일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버겁고 삶에 대한 회의가 오거든 집도절도 없는 칠암자를 한바퀴 둘러보면
절해고도와도 같은 산중에서 인고의 세월을 살다간 구도자들의 삶을 만나면서
재충전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것 같습니다.

출처 : 그곳에 내가있고 산이있다
글쓴이 : 봄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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