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로 아득한 운해(雲海)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사성암을 갈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연석 돌계단, 무언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은 소원바위 부처님의 미소를 만날 수 있는 기도도량이자 수행처이기도 하다. |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네 분이 수행하신 곳이라서 사성암이라 한다. 원래는 오산암(鰲山庵)이었다. 사성암 뒷산이 자라를 닮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오산(鰲山)이다.
네 분의 성인을 따라 사성암(四聖庵)이라고, 사찰의 성격을 잘 나타낸 이름으로 개명을 하니 절의 특징이 분명해져서 더 좋은 것 같다. 얼마나 좋은 터이길래 네 분의 성인이 나오셨을까? 늘 궁금한 절이었다. 오늘에야 소원을 풀었다.
산사순례를 다니다 보면 사찰에 따라 어떤 시간대가 참배하기 좋은지 경험이 생긴다. 어떤 곳은 새벽이나 아침이 좋고, 어떤 곳은 저녁 무렵이 좋기도 하다. 하룻밤 머무를 수 있다면 더 좋다. 사성암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잘 보이는 맑은 날과 오전이 좋을 것이다.
운이 좋은 아침 일찍이면 가끔 발 아래로 아득한 운해(雲海)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행운은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의 절들은 햇볕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침이 참배하기 좋다. 그 시간이 가장 생동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이나 오전에 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새벽 일찍 길을 나서야 한다. 마음은 늘 오전이나 아침나절에 산사에 들어가기를 꿈꾸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도 한낮에 산문을 들어섰더니 이미 상춘객들이 많다. 그러나 어쩌랴. 도(道)는 시공을 초월해서 항상(恒常)하니, 바깥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이 좋으리라.
거기 그 자리에 본래부터 있었을 법한 자연석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만든 계단과 돌담을 따라 부처님을 향해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올라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수행이 된다. 이 돌계단 길이 유명한 드라마에도 등장한 길이라고 한다.
본래부터 있었을 법한 자연석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만든
계단과 돌담을 따라
부처님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올라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수행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수록
발걸음은 무거워도
내 마음의 번뇌는 가벼워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갈수록 발걸음은 무거워도 내 마음의 번뇌는 가벼워진다. 어느새 108계단을 지나 바위에 새겨진 약사여래 부처님을 만난다. 원효대사가 선정 속에서 손톱으로 새겼다고 한다. 음각으로 새겼지만 자연스럽고 신심이 절로 난다. 부처님이 오른 손으로 꼭 뭔가를 주실 것만 같다.
약사여래를 참배하고 밖으로 나오면, 팔공산 데미샘에서 출발한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어쩌면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도 사성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성암에는 특별한 배례석이 있다. 보통 배례석은 탑 앞이나 큰 법당 앞에 있다. 그러나 사성암 배례석은 멀리 섬진강 너머로 화엄사가 잘 보이는 언덕 모퉁이에 있다. 그 옛날 법당이 제대로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수행하셨던 스님들이 화엄사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던 자리라고 한다.
얼마나 고마운 배례석인지 모른다. 관광객이 아직 없을 이른 새벽시간에 좌복을 깔고 화엄사 각황전 부처님을 향하여 예불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소원 한 가지씩은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찰마다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장소가 있다. 사성암에도 소원바위가 있다. 소원문을 써서 붙이고 소원바위 부처님의 미소를 친견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소원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바위부처님의 미소가 어디에 있나 한참을 찾아보았다.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부처님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도선대사 좌선대에 들러 좌선 흉내를 내고 마음을 조금 비웠더니만, 내려오는 길에 부처님의 미소를 발견했다. 나의 소원도 이뤄질 모양이다.
마애부처님 옆 바위벽에는 많은 동전들이 재미있게 붙어 있다. 각자의 가슴 속 소원을 이루고자 붙였는지, 재미삼아 붙여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전들은 각각의 동전마다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귀한 사연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런지, 아니면 각각의 사연을 다 여기다 내려놓고 가려는 주인의 마음인지, 동전들이 햇빛을 받아 살아있는 듯 반짝거린다.
사진을 찍다보니 동전이 담쟁이 넝쿨의 열매나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꼭 일부러 만들어 놓은 설치 미술품 같기도 하다. 천원짜리 지폐를 접어서 꽂아 놓은 사람들도 있다. 알게 모르게 영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리라.
순례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법당이나 한적한 장소에서 참선하는 즐거움이 좋다. 마침 극락전이 조용하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법당마루에 들어와 있는 햇볕이 좋아 보여 동행들에게 잠시 참선수행을 권유하였다. 적당하게 짧은 시간동안 앉아 있었지만, 오랜 휴식을 취한 느낌이다.
극락전은 자리가 좋기도 하겠지만 아미타 부처님의 위신력이 스며있기도 할 것이다. 거기다가 볕이 잘 드는 남향이고 섬진강의 바람이 적당하게 들어 통풍이 잘 되니 습하지 않으며, 바위가 병풍처럼 싸고 있어 고요하다. 정진하기에는 딱 좋은 법당이다.
정진 후에 어떤 분이 “극락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 앉아 있으니, 여기가 극락이네요” 다른 분이 웃으며 얘기한다. “집에 내려가시면, 여기 생각이 많이 나시겠습니다…” 모두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