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종류
참선을 할 때는 주로 좌선(坐禪)을 한다.
좌선(坐禪)은 사려분별을 끊어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방법으로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디아나의 음역인 선나(禪那)의 나(那)를 생략하고, 중국어인 좌를 더한 것이다. 정려(靜慮)로 의역한다. |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활동하는 주인공인 나 자신의 근원(根源)을 묻게 되면 말이 막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온갖 일을 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낱 욕망이나 관습이나 환경 조건에 적응해 가면서 굴러가다가 마침내는 알길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 밖에 되지 못한다.
이러한 자기 상실의 인간에게 참된 자아를 회복시키고, 사람과 천지 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참선이란 원래 서고 앉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서고 앉는 데 걸림이 없어 공부를 지어가다 보면 조용하게 앉는 데서 가장 힘을 얻게 된다. 즉 참선하는데 있어서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좌선(坐禪)이라고 말하며 참선 그 자체를 좌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선의 방법은 종파에 따라서 규정이 다르지만, 종색선사(宗賾禪師)가 저술한 좌선의(坐禪儀)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좌선(dhyāna)을 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 두꺼운 방석을 깔고, 허리띠를 너그럽게 매고, 위의(威儀)를 단정히 한 후에 결가부좌를 한다.
결가부좌(結跏趺坐)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는다. 혹 반가부좌할 수도 있으나, 이때는 왼쪽 발로 오른쪽 발을 누른다. 다음은 오른쪽 손을 왼쪽 발 위에 놓고,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놓아 두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서서히 몸을 일으켜 전후좌우로 여러 번 움직여서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우리나라의 선원(禪院)에서 행(行)하고 있는 좌선의 자세는 대체로 이 좌선의의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보편적으로 결가부좌보다는 반가부좌를 취하고 있다.
좌선은 인도의 모든 종교가 사용한 수행 방법으로, 불교의 좌선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단좌정사(端坐靜思)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 직후 삼칠일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그 후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되어 원시불교의 3학(三學, 戒·定·慧), 대승불교의 6바라밀(六波羅蜜,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중국에서는 달마(達磨)이후 좌선을 종지(宗旨)로 하는 선종(禪宗)이 성립되어 그 종풍을 크게 떨쳤다. 선종에서는 선이 3학·6바라밀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그리고 단좌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모든 일상생활이 선 수행으로 간주되어 소극적·형식주의적인 좌선이 아니라 적극적 자유주의적 좌선이 선양(宣揚)되었다.
올바른 좌선의 형식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놓든가(結跏趺坐), 또는 단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는데(半跏跌坐), 단지 다리를 놓는 형식뿐만 아니라 손의 모양, 허리를 세우는 것, 혀의 위치, 호흡의 방법, 눈을 뜨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일정한 규범에 따라 육체를 올바르게 보존하며, 단정히 앉는 것(正身端坐)이 좌선의 본질이다. 따라서 좌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非思量), 육체를 올바르게 하여 정신단좌(正身端坐하는 순수한 행위이다.
가) 선정(禪定) :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되어 선(禪)에 들어 삼매 상태에 이르는 것,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이다.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성적등지(惺寂等持),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한다. 마음이 지(止)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動搖)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는 지혜(智慧)가 나온다.
① 사마타(samatha, 奢摩他) : 마음을 하나의 대상(對象)에 집중하는 수행이다. 지(止)라고 번역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준비(準備)단계이자 전제조건으로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치게 된다.
사마타(samatha)는 sam(to be quiet)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로서 원 의미는 고요함, 맑음 등이다. 모든 해로운不善法 상태가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다.
이 단어는 삼매(sama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Abhidhamma)에서의 사마타는 8가지 선정의 경지(samapatti, 等持, 4가지의 색계禪과 4가지의 무색계禪)에서의 마음의 집중(心一境, cittassa ekaggata)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사념처 수행이라고 하여 계․정․혜 삼학을 열심히 수행하여 마음을 잘 다스려 고요히 가라앉아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는 상태를 사마타(고요함)라고 하는 것이다.
☞ 아비담마(Abhidhamma) :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에 대하여(Abhi)라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평생 설하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제자들의 노력이 정착된 것
위빠사나란 이러한 사마타의 경지위에서 지관 명상을 통하여 분별심이나 아상(我相)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떠한 미혹(迷惑)이나 흔들림도 완전히 사라져 모든 번뇌와 집착을 완전히 여윈 공(空)의 상태로 가는 수행이다.
한편 위바위니 띠까에서는 사마타(samatha)를 5가지 장애들을 고요하게 한다는 뜻으로(nivarananam samanatthena), 위빠사나를 무상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본다는 뜻으로(aniccadi-vividhakarato dassanatthena) 설명하고 있다.
위빠사나(vipassana) 명상은 초기 불전에 등장하는 수행법으로서 상좌부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고 있다.
② 위빠사나(Vipassana) : 관(觀) 또는 관법이라 번역한다.
위빠사나는 vi(분리)+drs(to se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분리해서 본다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in-sight)을 의미하며 동남아시아(남방불교 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위빠사나(vipassana, 정신, 마음 집중 법)는 꿰뚫어 봄, 통찰(洞察)을 의미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으며, 이 성불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더러움으로 가득한 현재의 상태를 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는 바로 이 인간의 현 상태를 온갖 욕망 등의 번뇌(煩惱)에 얽힌 존재라고 하고 이 번뇌는 성불의 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방해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불교의 수도(修道)란 한없는 번뇌의 응시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환경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설하셨다. 번뇌를 극복하고 퇴치하는 방법도 또한 각자에 알맞은 것이 설해졌는데, 불교의 수도론(修道論)이 여러 가지로 전개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 수행 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瞑想)법으로서, 한역(漢譯)에서는 관(觀) 혹은 능견(能見), 정견(正見), 관찰(觀察) 등으로 옮겼고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한다. 영어로는 insight로 정착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하여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가령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면 인간의 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생각으로 관하여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이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가능하면 좌선하는 자세로 자신의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데 집중하여 이것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마음을 하나로 전심(專心)하여 지혜로써 불(佛과 법(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염(念)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인데, 위에서 말한 부정관(不淨觀)처럼 여러 가지 형상적인 생각을 마음에 떠올려서 관하는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형상적인 것에 기탁된 교의(敎義)나 불교의 철리를 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은 다양하다.
맛지마 니까야(중부, Majjhima Nikaya)의 131번경부터 134번경까지의 4경은 부처님이 읊은 경사스런 하나에의 몰입(bhaddekaratta)이라 부르는 게송에 대한 설명과 관계된 것이다.
이 게송의 핵심(核心)은 과거(過去)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未來)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찰하라! 로 옮긴 원문은 다름 아닌 위빠사띠(vipassati)인데 위빠사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이처럼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물심(物心)의 현상에 대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tivedha, 洞察)을 뜻한다.
이것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향하는 통찰지(洞察智, panna)의 마음부수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마음(識), 마음부수(受, 想, 行), 물질(物質, 色)로 나누어 이들을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관찰(觀察)하는 것이 바로 아비담마(Abhidhamma)다.
이처럼 위빠사나가 아비담마요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이다.
나) 오정심관(五停心觀) :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거한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5가지 중생의 마음을 정지시키는 관법을 말한다.
❶ 부정관(不淨觀) :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 육체의 부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탐욕과 애욕을 조절하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❷ 자비관(慈悲觀) : 사람들이 성내고 다투는 마음을 그쳐 자비로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다.
❸ 인연관(因緣觀) : 인연(因緣)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치를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것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는 것이다.
❹ 계분별관(界分別觀)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십팔계(十八界) 등을 관(觀)하여 사물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밝히는 관법이다.
- 불상관(佛像觀) :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관하여 중생의 업장(業障)을 다스리는 관법이다.
❺ 수식관(數息觀) : 참선 시 호흡(呼吸)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입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散亂)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 선(禪) :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이라 했는데 이것은 마음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깨달을 때 얻어지는 경계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마음가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경행법(經行法) : 좌선을 오래하여 피로했을 때나, 졸음이 올 때 일어나 차수(叉手)를 하고 방안을 천천히 걷는 것을 경행(經行) 또는 포행(布行)이라고 한다.
방선(放禪) : 선(禪)에 들어 소정(所定)의 시간이 되어서 선정을 쉬는 것이다.
① 간화선(看話禪) : 북방아시아권에서 행해지며,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수행법이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우주(宇宙), 인생(人生)의 근원을 철저히 규명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정형화되어 있는 어떤 사항을 참구(參究)하면서 수행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는 것이고, 화(話)는 공안(公案)이라는 것으로서 즉 공안을 보고 그것을 참구하여 마침내는 크게 그리고 철저하게 깨닫는다는 선(禪)이다.
간화선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대혜 종고(1089-1163)선사는 대혜보각선사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다만 망상(妄想)으로 뒤바뀐 마음,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보고 아는 마음, 고요함을 추구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시에 놓아 버리고, 그 놓은 곳에 나아가 하나의 화두(話頭)를 보라.
간화선은 묵조선(黙照禪)이라고 하는 조동종(曹洞宗)의 선풍에 대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일컫는데,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禪法)은 간화선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 화두(話頭) : 공안(公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안이라 하는 것은 본래 관청에서 사용되는 문서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공정하여 범치 못할 법령이라는 뜻이 있고, 고칙이란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라는 뜻이다.
규봉(圭峰)선사는 규봉광록산방야화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공(公)은 옛날 덕이 높은 어른들이 도를 행한 흔적으로서 천하의 길을 보이는,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치를 말함이고, 안(案)이란 옛날의 덕이 높은 어른들이 보인 그 진리를 기록한 문서이다.
이 화두는 진리를 깨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이나 몸짓으로 보이되 실제로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거기에는 범부(凡夫)의 생각이나 말로써는 가늠할 수 없는 불조(佛祖)의 깨달은 법, 진리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참선(參禪) 공부의 문제지라고 할 수 있는 이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고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참선 수행자에게 큰 의심을 품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화두 즉 공안에는 1천 7백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널리 참구되는 것으로 무(無)자 화두가 있다.
어느 때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하기를 무(無)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없다. 란 말은 무자(無字)를 풀이한 말이다. 조주 선사는 풀이로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無)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조주선사는 무(無)라고 대답했다. 이 무(無)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지만, 조주 선사의 무(無)는 그런 의미의 무(無)가 아니다.
여기서 무엇 때문에 무(無)라고 했는가를 뚫어내는 문제가 화두다.
② 묵조선(黙照禪) :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묵조(黙照)란 말은 마음자리의 본래 그대로의 체(體)를 반조(返照)해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묵조선이란 어떠한 문제의식인 화두와 같은 것을 갖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선(禪), 즉 고요히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참선하는 선법이다. 이러한 묵조선의 입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에 지관타좌(只管打坐)란 말이 있다. 여기서 지관이란 한길, 타는 강조, 좌는 좌선의 뜻으로서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으로 좌선할 따름이라는 말이다.
묵조선은 새롭게 생긴 선법(禪法)이 아니다.
보리달마가 선법을 중국에 전(專)한 이래 임제 선사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법은 공안(公案)을 제자에게 직접 주어서 공부시키지는 않았다.
제자가 의문 나는 점을 물어 오면 그에 대해서 일러줄 따름이었다.
선(禪)이란 본래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즉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敎)밖에서 달리 전한 것이라 하여,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묵조선이라는 이름은 묵조선가(黙照禪家) 자신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혜 종고선사가 그의 가르침이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가고 쉬어가게 한다 하여, 이를 비난하기 위하여 묵조 사선이라고 지칭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묵조선의 대표적인 거장은 천동굉지(天童宏智, 1087-1157)선사로 조동(曹洞)의 10세 법손이요 단하천연(丹霞天然)의 제자로서 임제종의 대혜선사와 쌍벽을 이루는 대 종장이다. 그는 가풍이 치밀하고 위의가 정중한 종사로서 일시적으로 쇠퇴하던 조동종을 다시 크게 부흥시켰다.
3) 좌선(坐禪) 시 주의해야할 3 요소
가) 조신(調身) : 참선의 몸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 흑산귀굴 경계
- 흑산귀굴(黑山鬼窟) : 참선 초학자는 눈을 감기 쉽다. 옛 조사는 눈감고 참선하는 자를 흑산귀굴(黑山鬼窟)이라 하였다.
반드시 눈을 떠야 한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듯하지만, 어느덧 혼침(昏沈)에 떨어지기 쉽다.
나) 조식(調息) : 참선시의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 수식관(數息觀)
다) 조심(調心) : 화두 드는 방법⇒ 마장(魔障) 경계
- 경안(輕安)과 마장(魔障) : 좌선에 익어 마음이 고요해지고 삼매(三昧)에 들게 되면 경안(輕安)이라고 하여 온몸이 환희심(歡喜心)에 젖거나 신비(神秘)한 경계(境界)를 보게 되는데, 이를 마장(魔障)이라고 한다. 여기에 집착(執着)하면 절대 아니 되고, 반드시 큰스님들에게 물어 지도(指導)를 받아야 한다.
- 결가부좌(結跏趺坐) : 부처가 보리수(菩提樹) 밑에서 좌선(坐禪)을 하였을 때 취한 편안한 자세로 가부좌(跏趺坐) 또는 전(全)가부좌, 본(本)가부좌라고도 하며, 가(跏)는 발바닥, 부(趺)는 발등을 말한다.
부처님은 반드시 이렇게 앉으므로 불좌(佛坐), 금강좌(金剛坐), 선정좌(禪定坐), 여래좌(如來坐)라고도 한다. 또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길상좌(吉祥坐), 오른쪽 다리로 왼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항복좌(降伏坐) 또는 항마좌(降魔坐)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간다라 불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길상좌를 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불상에서도 길상좌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많다. 한편, 왼쪽 발을 그대로 오른쪽 발밑에 두고 오른쪽 발만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는 것을 반가부좌(半跏趺坐) 또는 반가좌(半跏坐), 보살좌(菩薩坐)라고 한다.
선정인(禪定印)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에서 왼쪽 손바닥을 위로 하여 단전(丹田)앞에 놓고 오른손 손바닥도 위로 하여 왼쪽 손바닥 위에 손가락 부분을 겹쳐 놓되 양쪽 엄지손가락을 맞대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좌선(坐禪)시의 수인(手印)이다. 때로는 비로자나불이 선정인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고 한다.
◆ 용맹정진(勇猛精進) : 일반적으로 정진이라고 하면 악함을 끊고 부지런히 착함을 향해 용기(勇氣)있게 매진(邁進)하는 행위를 통틀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래적 의미에서 보면 성불을 향해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의 한 항목으로 정진바라밀이 있고 팔정도의 한 덕목으로 정정진(正精進)이 있는 것처럼, 정진이야말로 불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수행법에는 염불(念佛)정진, 참선(參禪)정진, 기도(祈禱)정진 등의 정진(精進)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가 선 불교(禪佛敎)적 입장에 서면서부터 정진이라는 어휘는 다분히 참선(參禪), 그 중에서도 좌선(坐禪)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되었고, 여기에 덧붙여 좌선을 어떤 모습으로 얼마만큼 하는가 하는 것을 구분하여 일상적인 정진과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말하고 있는 용맹정진이란 일정한 기간 동안 자리에 눕지 않고 잠자지 않으면서 참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졸음을 막기 위하여 서로 마주보면서 좌선을 하는가 하면, 책임자가 장군 죽비를 가지고 다니며 졸고 있는 사람을 경책(警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용맹정진이기 때문에 그 기한을 너무 오래할 수는 없다. 한 안거(安居) 동안에 1회를 하는데, 하안거 때는 해제 날의 7일전에 마칠 수 있게 하고 동안거 때는 부처님이 성도한 날인 섣달 초여드레에 마칠 수 있게 날짜를 정하며 기간은 주로 7일이나 보름간이다.
이렇게 용맹정진을 하는 이유를 땅에 말뚝을 박는 데 비유하고 있다. 즉 말뚝을 땅에 박을 때 계속해서 망치질을 할 수는 없다. 몇 번은 살살 두드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크게 내려칠 때 말뚝은 땅 속으로 깊이 박히게 된다.
참선도 이와 같아서 평상의 정진(精進)에 의해서 얻어진 힘의 바탕 위에 용맹정진을 통하여 선정의 힘이 크게 증장(增長)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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