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마음을 차분하게 해줄 혈자리
햇볕에 그을릴까봐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법 햇빛이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요즘은 꽤 먼 거리도 시간 여유를 두고 걸어 다닌다.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면 자연 걸음이 늦춰진다.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나무도 쳐다보고, 가판대도 힐끗거리고… '하늘이 언제 이렇게 높았지?' 감탄도 하고… 그러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가을은 봄여름에 펼쳤던 양기를 수렴하는 계절이다. 특히 가을 하늘이 높은 것은 계절이 지닌 침강하는 기운 때문이다. 대기에 떠돌던 탁한 기운이 밑으로 떨어져 하늘이 더욱 맑고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가을의 ‘숙살지기’와도 관련이 있다. 밖으로 퍼져 나가는 기운을 냉혹하게 쳐서 갈무리하는 것. 그것이 잘 여문 열매를 떨어뜨리고 청정한 기운을 만드는 자연의 힘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기운과는 상관없이 요즘 내 일상은 번다하기만 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자꾸 딴 짓을 하고 있다. 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다 인터넷을 하고, 익숙한 음악을 들으며 예전 기억을 되씹고, 꼭 “가을 타네, 고독 씹네”하며 구실을 찾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동네 건달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당연히 일은 진척이 되지 않고, 마감에 쫓겨 마음 졸이는 데 남은 기운을 다 써버리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가을 하늘은 맑기만 한데, 왜 내 마음은 이리도 혼탁한 것인가?
가을 타는 남자, 동동거리는 여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가을의 기운이 청정하다고 하여 사람의 마음이 덩달아 맑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봄바람 나는 처녀, 가을 타는 남자’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음에서 양으로 바뀌는 봄에는 음의 기운이 강한 여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양에서 음으로 바뀌는 가을엔 양기가 강한 남성들이 계절을 탄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을을 타는 게 꼭 남자들만의 일이 아닌 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애잔함과 쓸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정이 메마른 것 아닌가? 가을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 지도 모른다. 물론 비관적인 생각이 떠올라 그것에 너무 몰두하다보면 삶의 의욕을 깎아낼 수도 있으니 주의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발을 동동거리듯 마음이 분주한 것은 왜 그런 걸까?
맨 위에 양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산지박괘!
술(戌)월은 주역으로 보면 산지박 괘에 해당된다. 다섯 효가 모두 음효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있다. 이 한 개의 양효도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모르기에 위태롭다. 붕괴 직전의 상황. 이것은 사람에게 ‘끝’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이제까지의 질서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말이다. 그래서 이 때 사람들은 일부러 따뜻한 기운을 찾아 나서나 보다. 戌시(오후 7시 반-9시 반)는 일터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또한 하루 중 戌시에 술이 술술~ 들어가기 때문에 회식을 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위적인 따뜻함은 일시적인 위안일 뿐! 아무튼 음기로 충만한 가을의 끝에 걸려있는 위태로운 화(火)기는 내 일상을 제대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나 말고도 이 가을에 뭇 생명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승냥이가 짐승과 새를 많이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초목은 누렇게 변해 낙엽이 지고, 동면하는 벌레들이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 입구를 막는다.
─ 『예기』「월령편」
중국 고대사회의 생활의식과 계절의 변화를 다룬 『예기』「월령편」에는 술월에 “음기가 상승하고, 양기가 하강하기 때문에, 만물이 이것을 쫓아서 숨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왜 승냥이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걸까? 실제로야 그럴 수는 없겠지만, 금수를 잡아먹기 전의 일종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잎이 떨어지기 전에 색깔이 바꾸는 것 또한 소멸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겨울은 이렇듯 단순히 우리에게 ‘죽음’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고, 대비하는 분주한 움직임은 생명의 또 다른 숨겨진 리듬인 것이다.
戌월, 갈무리는 잘 되고 계시나요?
절기로 따지면 戌월에는 한로(10월 8일)와 상강(10월 23일)이 들어 있다. 특히, 상강 즈음엔 하늘이 급격히 추워져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서리는 여름 농작물에 냉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부들은 그 전에 수확을 끝내려고 무척 분주하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하지만 결실은 그냥 거두어지는 게 아니다. 끝을 맺기까지는 할 일이 참 많다.
戌은 보통 수확을 끝낸 땅을 의미한다. 나무는 단풍이 들고, 수확을 하여 겉은 풍성해보이지만 이미 영양분을 빼앗겨 건조하고 푸석푸석하다. 동물로는 개를 상징한다. 흔히 戌을 사주에서는 역마살, 그 중에서도 동네 역마라고 부르는데, 개가 분주하게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주에 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화려하고 바쁘지만 실속이 없다는, 즉 마무리를 하는 기운이 약하다고도 한다. 그런데 수확을 해야 하는 戌월에 이처럼 분주한 기운이 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마무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수확을 하는 것, 즉 어떤 일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 때 요구되는 것이 ‘숙살지기’다. 한자를 보자면, ‘숙(肅)’은 붓으로 정교하게 그리는 엄숙함, ‘살(殺)’은 말 그대로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분주해지기 쉬운 戌월에 숙살지기를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결과를 기존에 바라던 대로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생각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발을 동동 구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 지 생각하지 말고 그저 과정을 하나씩 밟아나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분주함 가운데에서도 기본기를 충실히 익히고 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을에 분주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
가을 석 달을 용평(容平)이라고 하는데 천기는 쌀쌀해지고 지기는 맑아진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난다. 닭이 울면 깨어나서 마음을 편하게 하여 가을의 엄한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신기(神氣)를 거두어 준다. 가을 기운을 조절하고 밖으로 마음을 두지 않으며 폐의 기운을 맑게 한다. 이것이 가을기운에 호응하는 것이니 양수(養收)의 방법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폐를 상하고 겨울에 손설이 생겨 간직하는 힘이 적어진다.
─ 『동의보감』,「내경편」, 동의보감출판사, 18쪽
『동의보감』에서는 가을을 용평(容平)이라고 했다. 얼굴(容)을 편하게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平) 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몸과 마음이 요동치기 쉽고, 처리 못 한 일들이 많다고 해도 일상을 지키는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중 하나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듯 외부의 결과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처음 시작했던 마음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외부로 향하는 신기(神氣)를 거두는 것, 곧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아닐까 싶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을에 일상을 청정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일련의 사태다. 그것은 바로 병증으로 나타난다. 폐 관련 질병과 손설이다. 우선, 오장육부 가운데 폐는 가을에 상응한다. 하지만 가을에 폐가 안정되기는 쉽지 않다. 건조하고 추운 날씨 때문에 사기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까지 분주하다면 폐에 병이 들기 쉽지 않은가. 마음이 분주하면 호흡이 들뜨게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폐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일상을 평범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머리의 중심에 백회혈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혈을 자극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몇 가지 혈자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백회(百會)! 백회는 백 가지 혈이 모인다고 하는, 거의 모든 병증에 쓰인다고 할 정도로 아주 기본적인 자리다. 몸의 뒤편에서 흐르는 독맥의 혈자리로, 족태양방광경, 수소양삼초경, 족소양담경, 족궐음간경이 합류한다. 머리의 가장 위, 즉 양쪽 귀에서 머리로 올라가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있다. 기분이 너무 들뜨거나 열이 위로 치솟는 등 지나친 양기를 잡아주고, 반대로 기가 병적으로 하강하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정신력 강화와 신경 안정의 효능이 뛰어나다. 셋째 손가락 끝으로 마사지 하듯 톡톡 두드려도 효과 만점이다.
두 번째, 용천(湧泉)! 용천은 족소음신경의 혈자리로, 요가를 해보았다면 한두 번쯤은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요가 동작 중에 발바닥 가운데를 때리는 것이 있는데, 바로 족소음신경의 용천혈을 자극하는 것이다. 용천혈은 발바닥을 접어 ‘ㅅ’자가 생길 때 두 선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인체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샘과 같아서 수분이 곳곳에 스며들어 의욕과 생기를 샘솟게 해 준다. 날씨 좋은 이 시기에 산책을 하는 것도 침 못지않은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용천의 위치와 자세한 내용은 '전신피로, 온천? 용천!'을 참고하세요.)
내관은 바로 여기!
세 번째로, 내관(內關)! 내관은 수궐음심포경의 낙혈(絡血)이다. 수궐음심포경은 마음을 관장하는 경맥이다. 내관은 팔 안쪽 손목 중앙에 몸 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위에 있다. 마음이 예민해 질 때 이 부분을 지긋이 눌러주면 아마 뻐근함과 동시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관은 몸의 내부와 외부를 소통시키는 혈자리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두통, 신경쇠약 등에 효과적이다.
양쪽 젖가슴 사이에 있는 전중혈
네 번째로, 전중(膻中)! 전중은 임맥의 혈이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심포의 모혈이다. 양쪽 젖가슴을 있는 선의 정 가운데에 있다. 스트레스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답답할 때 엄지손가락의 지문부위로 지압하면 효과 만점이다. 전중에 대한 설명은 지난 혈자리 서당 글을 참고하시길.
그동안 ‘가을’ 하면 결실을 맺는 계절, 그리고 멜랑꼴리한 감정을 떠올렸다. 대체로 이 둘을 함께 놓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결실을 맺고자 할 때, 속도를 따라오지 않는 몸의 상태, 특히 이 멜랑꼴리한 마음을 ‘병증’이라고 생각하고, 떨쳐버리려고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떨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가을’의 일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숙살지기와 분주한 기운이 공존하는 가을, 나는 언젠간 끝이 올 것을 안다. 하지만 열매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속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經穴學 > 혈자리 서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끈한 손바닥 이야기, 노궁(勞宮) (0) | 2016.09.19 |
---|---|
너의 숨소리가 들려?! 청궁혈을 눌러주세요~ (0) | 2016.09.18 |
구급하라! 중충 (0) | 2016.09.18 |
불 빼 드릴까요? 관충(關衝) (0) | 2016.09.17 |
비양(飛揚)을 누르고 허리를 펴다 (0) | 2016.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