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周遊天下

초암의 역사기행 - 낙동강, 왜관 그리고 다부동

초암 정만순 2014. 8. 1. 09:47

 

초암의 역사기행- 낙동강, 왜관 그리고 다부동



칠곡 호국의 다리(구 왜관철교)
: 대구ㆍ부산이 함락 위기에 놓였을 때의 격전지

등록문화재 제406호로 지정된 칠곡 호국의 다리(구 왜관철교)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1905년에 개통한 군용철도의 교량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유엔군의 주력부대 사이에 격전이 전개된 중심지역에 있던 철교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이 경간 1개를 폭파했다. 대구와 부산이 함락 위기에 놓였던 1950년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워커라인, 낙동강 교두보)을 구축하고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곳 왜관 일대가 바로 그 중심지였다.
8월 3일 폭파된 경간(經間, 다리의 기둥과 기둥 사이)은 그 해 10월 총반격 때 침목 등으로 긴급 복구한 이후 계속해서 인도교로 활용해왔으며,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호국의 다리'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격전장의 중요한 상징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미지출처 칠곡군청.

위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872번지 외


북한 공산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 말, 공산군은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 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釜山橋頭堡)’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 남북 160㎞로,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 지점인 남지읍(南旨邑)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鎭東里)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 방어선 안의 지역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에서 마산·대구·영천·포항 등의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放射形)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했고, 기동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하여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최소의 전투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을 살리기에 적합한 범위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대비하여 그 후방에 또 하나의 예비방어선을 마련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MacArthur,D.)의 명령에 따라 미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Davidson,G.H.)이 경상남북도 경계를 이루는 산맥과 밀양 북쪽의 유천(楡川), 그리고 그 서쪽의 무안리(務安里)를 거쳐 마산 동쪽의 고지들로 이어지는 총 길이 90㎞의 ‘데이비드슨선’을 구상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 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 책임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연결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북한 공산군은 8월 초까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 보병사단이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방어병력을 적시적소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8월 중 마산 방면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6사단의 공세를 미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선제 역습으로 저지하였다.

창녕에서 남지 사이에 형성된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 공산군 제4사단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대구 서남에서 동북쪽에 이르는 외곽 전선에서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 공산군 수개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포항·기계(杞溪)·안강(安康)을 잇는 동부 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 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하였다. 또한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 공산군의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특히 미 공군은 8월 16일 B·29폭격기 98대로 왜관 전면의 공산군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 공산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했으며, 특히 영천 일대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 이래 가장 큰 전승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 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북한 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이 비극적인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것이 낙동강을 사이에 둔 피아간의 처절한 낙동강전투였음은 내남없이 아는 노릇이다.

개전 이래 전 전선에 걸쳐 후퇴를 거듭하며 차례로 서울·수원·천안·대전을 인민군에게 내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8월 1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워커라인’이라고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설치하여, 왜관에서 마산과 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부방어선은 미군이, 왜관과 동해변의 영덕을 잇는 동부전선은 국군이 사수하도록 했다. 8월 3일에는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낙동강전투는 양측 병사들의 시체가 산야를 뒤덮고 핏물이 강을 붉게 물들이며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낙동강전투에서, 아니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투가 8월 16일에 있었다. 이날 왜관 건너편 낙동강 대안 일대에 인민군 4만 명이 집결, 대규모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왜관이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워커 중장은 일본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폭격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 98대가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의 지역에 퍼부은 폭탄은 960t. 낙동강을 건너려고 한데 모여 있던 인민군 4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꼴로 젊은 목숨이 죽어간 셈이다. 그 이름의 어감과는 너무나 판이한 이른바 ‘융단폭격’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전투의 현장이었던 낙동강에는 고속도로·철도·국도가 지나는 다리가 새로 놓였다. 그리고 그 아래 이따금 사람들만이 오가는 옛 다리 하나가 한적하다. 지금은 ‘호국의 다리’라 불리는 왜관 인도교. 낙동강전투에서 폭파됐던 것을 복구한 것으로, 이제는 서로 적이 되어 죽어간 무수한 동포들의 피로 산하를 물들인 낙동강전투의 상징물로 그렇게 서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또 하나의 전장이 다부동이다. 조선시대에는 다부원(多富院)으로 불리며 역참이 들어서기도 했던 이 작은 한촌(寒村)이 동족이 서로를 살상하는 전쟁의 고비에서 피로 얼룩진 전장이 된 것은 그 지형적인 특징때문이었다. 마을의 서북쪽에 유학산(839m)이, 동쪽으로는 가산(902m)이 솟아 국군으로서는 방어에 유리한 지점이 이곳이었다. 반면 이 지역이 돌파될 경우에는 10㎞ 남쪽의 도덕산(660m) 일대까지 철수해야 하고, 그럴 경우 대구시가 인민군 지상포화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의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여기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은 창과 방패가 되어 1950년 8월 초부터 달포가 넘도록 피로 점철된 전투를 전개했던 것이다.

다부동전투가 끝난 직후 이 전장을 증언한 조지훈 시인의 종군시가 있다. 그 시 「다부원에서」의 말미는 이렇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1981년 정부는 다부동전투를 기리는 전적비 겸 기념관을 유학산 기슭 다부동에 세웠다. 당시 양측의 전투장비와 상황을 설명하는 모형들이 어설프게 진열된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나와도 답답한 가슴은 여전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차라리 먹먹한 가슴으로 유학산 연봉을 올려다보는 것이 여기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던 옛 전장에 걸맞은지도 모르겠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1981년 유학산 기슭에 전적비 겸 기념관을 세워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다부동전투를 되새기고 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
 

다부동전적기념관경북 칠곡군 가산면. 당시 북한군 24,000과 한미 연합군 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을 적에게 붕괴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

 

다부동전투

[ 多富洞戰鬪 ]

 

다부동 전투전적비1950년 6·25 당시 경북 칠곡군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전투.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의 하나이다. 1981년 정부는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길이 증언하게 하였다.

유형 사건
시대 현대
성격 전투, 전쟁
발생·시작 일시 1950년 8월
관련장소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 일대
관련인물·단체 국군 제1사단, 미 제1기갑사단

~~~~~~~~~~~~~~~~~~~~

 

[다부동 전투]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다

 

 

 북한이 불법 남침을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이후

단 1개월만에 북한군은 영덕, 안동, 상주, 진주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국군과 UN군은 더이상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려는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8월 초에는 낙동강선 까지 후퇴하게 되어

이 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낙동강 방어선이라 불렀습니다.

 

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벌어진 낙동강 전투 중

마지막 보루로써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계속했던 다부동 전두,

오늘은 이 다부동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55일간의 혈투,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다부동 전적 기념관

 

1951년 7월 21일,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자

북한군은 8.15 광복행사를 반드시 대구에서 하겠다며

집중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대구 북방의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

 북한군이 집중적으로 총공세를 감행한 곳이었습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아군이 10km 이상을 후퇴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군은 약 2만천여명의 병사들과 T-34전차 20대,

각종 화기 670분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60호 정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다부동을 담당한 국군 제 1사단도 북한군에 비해

매우 적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학도병 500명을 포함하여 7600여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의 열세한 전투력으로 이에 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부동의 치열했던 전투 들은 고지들에서 알 수 있습니다.

8월 18일 북한군의 총 공격으로 요충지인 유학산이 점령되자

백선엽 장군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쏘고,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를 쏘겠다''

라는 말과함께 역습을 강행하여 유학산을 재점령하였습니다.

 

▶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

 

유학산 이외에서 328고지는 12일동안 정상의 주인이 15번이 바뀌었으며

837 고지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국군 제 1사단은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병력증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미 8군 사령부에서는 미 제 27연대를 지원하고 23연대를 추가 배치하였으며

육군본부도 제 8사단을 추가 배속 시켰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지속 되었고,

끝내 간신히 북한군의 공격에서 다부동을 지켜내었지만

북한 군 2만 4천여명과 국군 1만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이 혈전은

6.25 한국 전쟁 중 가장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구국용사 충혼비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292번지 소재 다부동전적기념관은 1981년 11월 30일 준공되어 기념관, 충혼비, 구국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비행기, 탱크 등 93종 174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및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지방도로 908번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유학산(839m)이 북방을 향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그 우측에는 해발 902m의 가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며 지형상 이 방어선이 돌파되면 10km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가 불가피하여 대구가 적 지상포화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방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투적 요충지이다.

국군 제1사단은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 저항선에서 대구를 목표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이른바 생사기로에 직면한 전황을 극복했던 곳이다.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박사는 경찰병력을 팔공산 전투에 투입시켰으며 지역주민들은 밥과 물, 실탄, 포탄 등 군수품을 지게에 지고 전투현장에 제공하는 등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의 위기를민,관 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국면

을 반전시키는데 성공한 전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