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수도 종교

성통공완 (본성을 통하고 공적을 완수함)

초암 정만순 2014. 2. 4. 12:55

 

성통공완 (본성을 통하고 공적을 완수함)

 

성(性 :원신元神,陽神,해탈)

 

한족은 “수신제가 가제국치이 천하평”을 말하지만,

우리 민족은 성통공완, 홍익인간, 재세이화 말한다.

이 사상은 매개 우리 민족의 핏줄을 가진 자의 자기도 모르는 하나의 유전인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리 민족은 예로부터 수행을 즐겼다.

만천성에 가면 우리 민족 전설을 담은 조각상들이 서 있는데,그중 곰과 범이 환웅을 만나 사람이 되려고 하자, 환웅은 마늘 스무 조각과 쑥을 주면서 백일간 동굴에서 수행하라고 한다.

곰은 그래서 수행을 통해 웅녀로 되여 우리 민족의 시모로 되었다.

 

전 세계에서 우리 민족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민족은 얼마 안 될 것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인도에서 상당한 기간을 가부좌로 앉아 수행하는 법이 사라졌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스님이 심산 속에서 수행하던 중 원숭이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보고 모방해서 옛 법을 다시 재현시켰다 한다.

올방좌는 가부좌든 앉아만 있노라면 저절로 수승화강이 되면서 수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춤을 보면 참으로 성수가 나는데,그 이유는 춤의 모양이 마치 중국의 태극권을 치는것 같아 온몸의 기혈의 흐름을 원만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우리 민족에게 있는 자기 수행의 증거라 하겠다.

이외에도 우리 민족의 수행을 즐기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다.

이처럼 수행은 우리 민족에게 떨어질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민족경전 삼일신고에서는 수행에 대하여 이렇게 계시한다.

“철은 지감止感하고 조식調息하고 금촉禁觸하여.일의화행하고 반망즉진하여 발대신기하나니 성통공완이 시니라”

즉 감각에 이념을 두지 말고, 호흡을 조절하고, 접촉을 금하면 원 자리(본성)로 돌아가서 크게 이룸으로써 성은 통하고 공은 이루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수행을 즐기는 원인은 다름 아닌 최고경지 즉 성통공완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성이 통한다는 말은 수행을 통해 하늘이 내려주신 사명을 깨달음으로써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위업을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오직 천손만이 갖출 수 있는 피에 섞여 어쩔 수 없는 이런 천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여 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지감(止感)수련 - 사고와 감각의 느낌을 멈춤으로 정신통일이 되어 기를 느끼고 감정과 생각에서 벗어나 내부의식에 드는것.

지감의 의미는 느낌을  그치는 것이며, 감정의 움직임에 동요됨이 없이 마음을 맑고 고요히 가지는 것을 말한다.

 정신통일이 되는순간  오감의 감각을  초월하여 육감이 발현된다.

육감은 기운을 느낄수 있는 감각으로  이때 사고와 오감의 느낌을 멈추는 것을 지감(止感)이라 한다.지감은 감각(오감)으로 부터 오는  정보의 자극 즉 감정의 망상을 초월하여 순수한 정신통일의  상태, 명상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 과 감정  관념 속에서는  심기신(心氣身)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욕심과 망상으로 생명의 순행을 역행한다.

그러므로 지감을 통해 심기신의 조화를 이루고 본원적인 감각을 회복하여 영육의 조화와 안정 진화를 이루게 된다.

 

잠시라도 눈을 감고 자기 내면에  귀기울여 보면 마음이 얼마나 분주한지, 얼마나 쉴새없이 떠드는지 알수있다. 이러한  마음의 소음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감정들은 없애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소음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 그러한 소음들에 휩쓸려 따라가지 않게 해야하며  이를 위하여 몸의 감각과 기를 활용한 수행법이 지감수련이다.

 

기운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뇌파가 알파파(alpha파) 이하로 떨어졌을때 , 다시말해 생가과 감정이 가라앉았으므로 몸의 감각을 깨워 기운의 섬세한 흐름을  느끼게 함으로써 쉽고 빠르게 지감에 들수있다.

처음에는 손과 같이 감각이 예민한 부분부터 시작하다가  이섬세한 감각을  확대 시켜 나중에는 단전에 몸의 에너지중심을 형성하여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온전히 둘수 있는 상태로까지 깊어지는데 이때가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하는 때이다.

 

평소 자기안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이 자신이라고  알고 살지만  생각과 감정은  의식의 대양(大洋)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지감이 깊어져 마음의 파도가 잔잔히 가라앉을때 비로소 우리는 맑고 밝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감은 기적감각을  통한 구도심을  갖기위한 준비이며  지감을 이루는 정신통일, 정신집중 을  통해 진기가 발생된다. 지감수련은 본성의 감각을 회복하는 수련이며 정성을 통해 수도할수 있는 마음자세와 육차원 이상의 감각을 계발시킨다.  또 지감수련을 통해 정성을 배우게 되고 지극한 정성속에서 신의가 생기고 구도심이 생긴다.

                   

 

조식(調息) 수련 - 숨을 고른다는  뜻

 

생명의 에너지가  호흡을 통해 인체에 들어오기 때문에  호흡을 통해 기운의 흐름을  조절할수 있고 기운의 세기와 성질도  뜻대로 바꿀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의 마음도 다룰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단순히 생각과  감정에 이끌리고 동요되지 않는 차원에서 벗어나 그러한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의 에너지 형태로서  뜻대로  다룰수 있는것이다.

 

이렇듯  단지 바르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맑고  상쾌해 져서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얻고 나아가 기운의 흐름을  조절하고 마음의 작용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정성스럽게  숨을 쉬다 보면 호흡의 더 깊은 의미, 곧 생명의 참모습을 알게되며  인체 본연의 율려를 따라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는것이 기본이다. 숨을 고르는 것은  숨결이 지극히 고요하게 느낄만큼 부드럽게 다스리는 것이다.

호흡이 길던 짧던 자신의 숨결에 집중하여 정신과 의식이 동화되는 가운데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생명리듬을  되찾게 되어  영육의 조화가 절로 이루어 진다. 몸이 이완되고 영육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정신이  통일되면 절로 숨이 고르게 되어 조식을 이루고 조식이 오래 행해지면 정신은 맑고 마음이 밝아져 심신이 자연에 순응하여  양심에 따라 사리와  도리를  지키게 된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의 맨 밑바닥 가장 중심 되는곳에  생명이 있고  호흡은  바로 그 생명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며 쉼 없이 드나들고  흐르는 숨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의 실상이다. 생명을  다른말로 목숨이라 하는 것도 이러한 일면의 표현이다. 호흡을 따라 날숨때 허공과 하나되고 하늘에 감사하며  들숨때 몸과 하나되고  몸에 감사하다 보면 절로 안팎의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수 없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호흡은 태어 나면서 부터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하는것 이자만  그 참의미를 알게되면 조식을 터득하게 되고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수련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금촉수련 은 다음장에 계속)

 

 

금촉(禁觸)수련 - 감각의 욕망을 끊어 육체적 만족과 본능적 쾌락을 초월하는 것으로 도와 일체가 되어 도에 어긋나는 사념이나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초의식의 상태.

 

금촉은 부딪힘을 금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부딪힘은 갈등이나 알력 분쟁과 같은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외부의 물리적인 자극이 우리의 감각 가관과 부딪힐때 형성된다.  이것이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의 다섯가지 기본적인 감각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금촉이라는것은  다섯가지 감각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금하고 의식이 온전히 내면에 집중되었을때 자아에 있는 근본적인 생명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뇌의 신경생리학적 기능으로 보자면 우리의 의식이  뇌의 신피질 과 구피질 너머에 있는 기본적인 생명 기능을 관장하는  뇌간에 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단순한 음악 율동  이미지들의  유도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뇌간에 접촉하고 격렬한 에너지 체험으로 강력한 정화나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할수도 있다.(예 진동수련)

 

금촉수련은 삼대 수행법(지감,조식,금촉)중의 하나로 깨달음을  생활속에서 완전히 체율체득 하는 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고대 삼대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는 소리와 빛갈과 냄새, 맛, 음탕함, 그리고 만짐으로 이루어진 부딪힘(觸)에 빠지는 것을  잘 다스려 욕망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욕망에 빠지게 되면 기운이 역상하여 정신이 혼미해 지므로 감각을 통해 오는 욕망을 조절하여 기운과 정신을 다스리는 한 방법이다.

금촉하는 의미는 개인과 전체 완성을 향한 수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 늘 자신을 성찰함에 있다. 금촉은 깨닫기 까지의 과정이며 지키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다. 깨닫고 나서는  자유로워 진다.

 

금촉수련을 통해 깨달은 사람은 촉감에서 오는 욕망에 매이지 않아 진정 자유롭게 삶을 즐길수 있고 외부의 분별에서 벗어나 본성에 따라 공덕을  쌓을수 있게 된다. 금촉이 완성되면 본성에 어긋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선과악의 개념이 없어지고 어떤 행위도  도에 어긋남이 없다.

 

금촉수련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저급한 욕망(명예욕, 외로움, 배고픔)들을 보게 되며 그것이 참아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습과 업이  사라지고 진아(본성)을 자각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식욕과  수면욕을 초월하는  단식과  정좌불와 가 있다.처음에는 식욕과 수면욕을 극복하기가  힘들지만  점차 욕망이 끊어지고  집착에서 벗어나 순간 본성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