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 경주 분황사

초암 정만순 2022. 7. 28. 12:07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경주 분황사

 
 

원효, 요석궁으로 간 까닭을 말하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화강암보다 더 단단한 안산암을 벽돌처럼 만들어 9층으로 쌓아 올렸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신라 경주의 모습을 <삼국유사>에서는 “절과 절은 뭇별처럼 늘어서 맞닿아 있고, 탑과 탑은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 솟아있다(寺寺星長 塔塔雁行)”고 했다.

왕릉의 부드러운 곡선과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이 놀랍고 희유하지만 이것만 경주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분황사에는 세상 사람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품은 원효가 있어 좋다.

원효는 <판비량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등 107종 231권 대부분을 분황사에서 저술했다.

특히 <화엄경소>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고 말았는데 보현보살의 원행(願行)만이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임을 느끼고 중생구제를 위해 분황사에서 사람냄새가 나는 저잣거리로 나아갔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634년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자로 지은 절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첫 여왕 덕만(德曼)은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랬다.

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백정’,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부처님의 부모 이름과 같다.

덕만 또한 <현재현겁천불경>에 등장하는 ‘덕만불’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평왕은 딸이 부처가 될 것을 바랐다.

 

 

분황사 북쪽 벽에는 솔거가 그린 <천수관음보살>이 있었다.

희명이라는 눈먼 아이가 천수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노래를 불렀더니 눈을 떴다는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가 전해지고 있다

 

 

.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나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지셨으니 눈이 없는 저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세요. 아아! 저에게 주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크실까!”

기도는 이렇듯 아이처럼 해야 한다.

간절함과 순수함으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 “가장 중요한 문화재 모전석탑”

 

분황사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는 바로 선덕여왕 때 벽돌을 쌓아 올리듯 만든 모전석탑이다.

화강암보다 더 단단한 안산암을 길이 30cm, 두께 5cm 정도 크기의 벽돌처럼 만들어 9층탑으로 쌓아 올렸다. 지금은 3층만 남아있지만. 신이한 조각가는 탑의 사면 입구에 생동감 넘치는 8금강신을 두어 부처님의 사리를 수호케 했다.

또한 기단 위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남동쪽에 두 마리의 물개를,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서북쪽에 두 마리의 사자를 세워 호국의 의지를 표현했다.

 

 

분황사에는 경덕왕 14년(756) 강고내말이 주조하여 봉안한 약사여래 형상불이 있었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아홉 배였다고 하니 약 43m 정도 되었을 것이고 무게는 30만6700근이라 하니 가히 놀랍다.

지금 보광전에는 옛날의 10분의1 크기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한 모습의 약사여래가 서 계신다.

또 분황사에는 창건당시 조성된 특별한 우물이 있다.

 

보광전 약사여래불.

당초 황룡사 장육존상의 아홉 배, 약 43m 정도 되는 여래상을 모셨지만, 지금은 그 10분의1 크기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모습의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돼 있다.
 

사찰의 우물이란 중생의 갈애를 풀어주고 번뇌를 식혀 불도에 들게 하는 상징성이 있다.

우물은 큰 바위를 통 돌로 깎아서 겉은 팔각으로 팔정도를, 내부 원형은 원만한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었음을 나타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 당나라의 사신이 호국용을 세 마리를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몰래 가져가려던 것을 원성왕이 되찾아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효스님 진영.

 

➲ ‘대성화쟁국사’와 ‘소성거사’

 

원효는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시호나 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고려 숙종은 1101년에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비석을 세웠다.

현재는 비의 받침 부분만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다.

‘화쟁’이란 서로 다른 생각과 이론을 인정하고 보다 높은 불교의 차원에서 통합을 이룬다는 원효의 통 큰 사상이다.

 

분황사에는 스치는 바람에도 원효의 땀 냄새가 일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도 원효의 무애춤을 볼 수 있다. 원효는 661년 마흔다섯이라는 젊지 않은 나이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2차 유학길을 떠나 비 내리는 밤 서해 남양만 당항성 근처 무덤 안에서 노숙했다.

그날 밤이 없었다면 원효에게는 요석도, 설총도, 저잣거리 무애춤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자신의 삶을 바꿔 놓은 경우를 종종 봐오지 않았던가.

밤에 해골 물을 마시고 감로수처럼 맛있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아침에 일어나 그 물이 해골물이라 구역질 하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원효는 “마음이 일어나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감로수와 무덤 속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더 이상 법을 구하지 않겠다”며 신라로 되돌아 왔고, 의상은 중국으로 갔다.

원효는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의 마음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원효는 <화엄경>의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구절을 좋아해서 무애가와 무애춤을 세상에 전했다.

 

 

삶과 죽음,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원효는 분황사를 나와 남쪽 반월성 왕궁 옆을 지나며 이렇게 소리쳤다.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떠 바칠 기둥을 깎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자루 빠진 도끼처럼 전장에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요석공주는 어느 모로 보나 쓸모없는 왕가의 보도(寶刀)였다.

자루 빠진 도끼의 빈 구멍에 자루를 박듯 신라에 큰 인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효가 필요함을 왕궁에 알렸다.

 

 

추운 겨울 원효는 해질 무렵 문천(蚊川)에 놓인 느릅나무 다리 밑으로 짐짓 떨어졌다.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들어가 사흘간 눌러 앉아 아들까지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의 첫 인물 설총이다.

이로 인해 작은 느릅나무 다리는 원효가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진 다리가 되었고, 부처와 중생을 잇는 자비의 다리가 되었다.

 

원효는 요석궁을 나온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파계란 무엇인가? 중생들을 돌보지 않음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었다는 우물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세 마리의 호국용이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된 전설도 전해온다.

 

➲ 모든 사람에게 희망 주는 첫 새벽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가 혈사에서 입적하자 유해는 설총에 의해 잘게 부수어져 진흙에 개어서 다시 원효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분황사에 모셨다.

어느 날 설총이 인사를 드리니 진흙 형상의 원효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원효는 칠십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아 왔지만, 어떠한 틀도 부수어버리는 서슬 퍼런 도끼였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새벽바다였다.

원효성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는 세상을 열고자 중생들과 뒤섞여 지내면서 목이 굽은 호로박(호리모양의 박, 조롱박)을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하여 민초들을 위로했다.

원효(元曉)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첫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