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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가지산 석남사

초암 정만순 2020. 11. 5. 08:11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가지산 석남사

 

 

 

대붕(大鵬) 뜻 비웃는 ‘뱁새’들에 막혀 머문 자리
 

도의선사 남종선 선법 이어
이땅에 ‘선종씨앗’을 뿌려
정변으로 경주 입성 좌절
가지산 자락에 석남사 창건

인홍스님 의해 다시 일어서
탑 부도 등 국사 자취 남아  


석남사 대웅전 앞의 대석탑. 

 

중국의 선법을 이 땅에 처음 도입한 도의국사가 창건한 석남사에 천년을 넘어 국사의 자취와 숨결을 보여준다.
세속 집안에 처음 가문을 연 선조(先祖)처럼 한국 선종 본가(本家) 조계종에도 종문(宗門)을 연 조사(祖師)가 있다. 

도의(道義)국사가 조계종 종조(宗祖)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음의 문을 연 이래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퍼져 한 줄기는 남방으로, 한 줄기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 

중국으로 건너간 불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마음 자리를 바로 보고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으로 발전한다. 

그 시조가 달마대사다. 

달마의 심법(心法)은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거쳐 혜능에 이른다. ‘

본래 부처’임을 설파했던 혜능의 법은 남악회양을 거쳐 마조도일 대에 이르러 중국선으로 자리 잡는다. 

마조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선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니 강서(江西)의 마조와 호남(湖南)의 석두 두 선사 문하를 일러 강호제현(江湖諸賢)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139명의 입실 제자 중에서도 서당지장(735~814), 백장회해, 남전보원 3명이 가장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 서당이 마조가 입적한 뒤 대중들의 청에 의해 개원사에서 법을 이었다. 

그 문하에 스승 못지 않은 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신라에서 온 도의 홍척 혜철도 있었다. 

도의선사는 760년경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북한군(北漢郡)에서 태어났다. 

신라 경주에서 한 참 떨어진 변방 출신이다. 

출가하여 법명이 명적(明寂)이었다. 

선덕왕 5년 784년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신라에 화엄을 전파한 자장율사 처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예참했다. 

명적은 당에서 37년 동안 수행하면서 남종선의 조사선(祖師禪)을 공부한다. 중국 전역에 선이 전파될 때니 명적 역시 자연스럽게 신불교를 접했을 것이다. 

명적은 선에 심취하여 육조혜능이 ‘단경(壇經)’을 설한 보단사(지금의 대감사)를 참배하고 구족계를 수지했다. 

육조 진신상을 모신 보림사(寶林寺)로 가서 조사당에 참배하려 하자 들어가고 나올 때에 문빗장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고 한다. 

명적은 보림사를 참배한 뒤 마조가 주석했던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선사의 법을 이었다. 

선사가 “마치 돌 속에서 미옥(美玉)을 고른 듯 하고 조개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하다”고 기뻐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말하며 깨달음을 인가하고, 법호를 ‘도의(道義)’ 라 했다. 

도의국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百丈, 749~814)선사를 찾아가 문답하니 백장선사도 깨달음을 인가하며 “강서(江西, 마조선사를 뜻함)의 선맥이 모두 동국(東國, 신라)으로 가는구나!” 라고 말했다. 

서당의 예언처럼 중국에서 발원한 선법(禪法)은 당송을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도의로부터 시작한 동국(東國)의 선은 구산선문을 거쳐 보조국사, 태고보우, 나옹화상, 청허휴정, 경허성우, 용성진종 등 수많은 종장을 배출하고 오늘날 조계종으로 꽃을 피웠다. 

조계종 종헌과 전문(前文)에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전문에 “공유컨데 아 종조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하사 가지영역에서 종당을 게양하심으로부터 구산문이 열게하고 오교파가 병립하여 선풍교학이 근역에 미만하였더니”라고 했으며 종헌 제2장 제6조에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 서당 지장 선사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법맥을 계계 승승한다”고 했다. 

821(헌덕왕 13)년 도의국사는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3년 뒤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는 영남 9봉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큰 가지산에 석남사(石南寺)라는 절을 짓고 선법을 전파했다. 

지난 4일 찾은 석남사는 고요했다. 

선이 이 땅에 처음 뿌리 내린 역사를 자랑하듯 현재의 석남사는 비구니선원으로 명성이 높다. 

석남사를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으로 조성한 주인공은 인홍스님이다. 

오대산에서 한암스님을 모시고 득도수계하였으며 사불산 대승사, 희양산 봉암사 등지에서 자운·성철·향곡·보문 등 당대의 선지식을 만나 정진하여 일대사인연을 깨친 스님은 1957년 석남사 주지에 정식 취임하여 대중을 이끌고 가람을 보수하며 선원 강원을 개설하고, 안거정진에 전력하여 오늘의 석남사로 중창했으니 도의선사의 법이 천년을 넘어 다시 가지산에 퍼졌다. 

한 겨울이라 관광객도 신도들의 발길도 끊겼다. 

계곡은 얼어붙고 가지산은 차가운 바람만 휘감았다. 

그러나 석남사 경내는 뜨거웠다. 

동안거 결제를 나는 선객들이 내뿜는 열기가 한기 마저 녹이는 듯 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경내를 거닐며 도의선사의 자취를 더듬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와 대웅전 앞으로 다가가자 큰 탑이 맞는다. 

대석탑이다. 1973년에 세운 이 탑은 연원이 도의 선사가 세웠다는 15층 석탑에 닿는다. 

도의국사 부도로 추정되는 울주 석남사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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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파괴돼 일부 부재만 남아있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봉안하면서 개축했다. 

대웅전 옆을 지나 명상길처럼 조성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온존한 부도가 나온다. 

보물 제369호인 이 부도는 도의국사가 개창조인 가지산문의 본산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와 닮았다. 

조성연대와 가지산문과 관련성 등으로 도의국사 부도로 추정한다. 

석남사 창건과 역사를 같이하는 소석탑, 조사전의 진영 등 도의국사의 흔적은 석남사 곳곳에 서려 있었다.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의 개창조로 추앙받지만 선법은 이곳 석남사가 아니라 설악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법손에 의해 남쪽 땅 장흥 보림사에서 활짝 핀다. 

그는 석남사를 떠나 설악산 진전사에 머물며 제자 체징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한다. 

선사는 왜 경주를 벗어난 외곽 산중에 기거했으며 그 마저도 얼마 있지 못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갔을까? 

신라말 최치원은 이렇게 썼다.

 “원숭이의 마음으로 분주한 망상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북쪽으로 달리는 얕은 길을 옹호하고 뱁새가 날개를 자랑해서 남해(南海)를 횡단하려는 대붕(大鵬)의 뜻을 비웃었다. 

송언(誦言)에만 심취하여 선법(禪法)을 비웃으며 마어(魔語)라고 비방하였다.

 스님은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빛을 행랑채 지붕 아래 숨기고 자취를 깊은 곳에 감추었다.” 

‘본래 부처’라는 선사상을 신라의 귀족과 승려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절을 짓는 대작불사와 경전 편찬이 곧 불교라고 생각했다. 

양무제를 만나 심법(心法)을 일러주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북쪽의 숭산(崇山)으로 들어가 소림사를 창건하고 세월을 기다렸던 달마처럼 도의도 서울을 떠나 북으로 갔다. 

도의선사의 경주 입성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신라 후대의 불안정한 정정(政情)이었다. 

하대(下代)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최고 번성기를 구가한 태종무열왕계가 몰락하고 내물왕계가 집권한, 전혀 다른 왕조였다. 

몰락한 태종무열왕계의 후손 김헌창이 도의선사가 귀국한 이듬해 난을 일으켜 옛 백제 지역 땅 대부분을 장악하여 장안(長安)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헌덕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하다 귀족세력들의 저항에 부딪히는데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배경이다. 

헌덕왕의 개혁정치 속에는 불사(佛事) 억제책도 있었으니 불사나 경전 편찬 같은 유형보다 마음을 중시한 도의선사의 가르침이 왕으로부터 배척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난이 평정된 뒤 귀국한 홍척과 혜소는 왕실의 열렬한 영접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반란과 같은 전쟁만 없었더라도 도의선사의 법은 더 오래 석남사에 머물렀는지 모른다. 

그러면 또 무엇하겠는가? 

“참선자는 분별 망상 떠나는 길 뿐! 강풍은 만고에 불고 있고, 명월은 천추에 변함이 없네…” 인홍선사의 게송처럼 도의선사가 전하고자 한 진리는 오직 하나 ‘분별망상을 떠나는 길’ 그 뿐이었는데. 

처음이니 두 번째니 분별과 흔적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