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제11전투비행단 초청 관광여행 -
송해공원 / 동화사
공군 제11전투비행단 초청으로 오전 중 11비 경내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중식을 한 후 오후에는 관광행사에 나섰다
송해공원에서는 대자연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송해선생의 굴곡진 삶을 반추해 보았으며, 동화사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원력으로 우매한 중생의 백팔번뇌를 씻어내는 가피를 내려주시길 기원하였다
송해공원과 동화사를 관람 후 팔공산온천관광호텔에서 샤워로 땀과 피로를 씻어내었다
이 후 K-2 경내 식당에서 만찬을 마친 후 기념선물을 받고 귀가하였디
옛 동료들을 만나서 즐겁게 하루를 보내게 해주신 11비 단장님과 관계 요원분들께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이병주님께도 개인적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행사일 :
2022. 5. 24 (맑음)
♥ 행사경로 :
공군 제11전투비행단(간담회) - 오찬 - 송해공원 - 동화사 - 팔공산온천관광호텔 - 만찬
♥ 참가인 :
초암과 공군 퇴직 군무원
■ 송해공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옥연지 일대에 조성된 호수공원이다
송해공원은 국민 MC로 칭해지고 있는 송해의 이름을 따서 조성한 공원이다.
송해는 대구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할 때 기세리에서 출생한 석옥이와 결혼하였다.
실향민인 송해는 수시로 옥연지를 찾아 실향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처가인 기세리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겨 1983년 옥연지가 보이는 산기슭에 본인의 묘자리를 마련하였다.
달성군은 이러한 인연으로 옥연지 일대에 조성하는 공원에 ‘송해공원’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송해공원은 4대강 살리기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온 옥연지의 둑 높이기 사업과 연계한 수변 개발을 통해 주민들의 휴식 및 여가 공간을 제공하고 매력적인 도시 경관을 창출하기 위하여 개발되었다.
2015년 1월부터 9월까지 옥연지 송해공원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2016년 1월부터 6월까지 주차장 조명타워를 설치하고 LED 16등을 달았다.
또한 화목류와 초화류, 수생식물을 심었다.
2016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백세교 설치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6년 8월부터 10월까지는 백세정과 경관 조명 설치 공사를 진행하였다.
2016년 6월부터 11월까지는 물레방아 설치 공사를, 2017년 1월부터 5월까지는 공원 주변 조경 공사를 진행하였다.
2018년 12월 완공하였다.
송해공원은 옥연저수지 일원 4만7천300㎡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송해 둘레길, 데크로드, 전망쉼터 출렁다리, 대형 물레방아, 송해 백세교(百歲橋)와 백세정(百歲亭)으로 이름 붙여진 수중다리와 정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둘레길은 옥연지를 한 바퀴 돌아오는 3.5㎞ 코스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둘레길 서편에는 1㎞ 구간의 숲길 데크로드와 옥연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4곳이 설치되어 있다.
또 둘레길 중간에는 '사랑나무'로 통하는 연리목[상수리나무, 고욤나무], 연리지[감태나무]를 만날 수 있다.
‘백세교’는 S자형태의 태극문양을 형상화한 교량으로써 2016년 3월 착공하여 2016년 10월 8일 준공하였다
금동굴은 폐금광을 관광자원으로 조성한 곳으로 더운 날씨에도 내부는 엄청 시원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 동화사
팔공산순환도로에서 갈라져 동화사 입구로 접어들면 이내 ‘八公山桐華寺鳳凰門’(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란 편액을 단 일주문이 나선다.
일주문을 지나고도 경사가 만만찮은 길을 한참 올라야 절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절은 크게 대웅전 영역, 영산전 영역, 금당암 영역의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대웅전 영역은 동화사의 중심영역이라 하겠는데 대웅전, 누각인 봉서루(鳳棲樓), 사무실과 요사로 쓰이는 강생원(降生院)과 심검당, 그밖에 대웅전 서쪽으로 줄지어 선 고만고만한 전각들로 이루어진다.
영산전·천태각이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영산전 영역은 대웅전을 오른쪽으로 비껴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금당암 영역은 계곡 하나를 건너 동쪽에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이 정진하는 선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동화사는 큰절말고도 비로암·부도암·양진암·내원암·약수암·염불암 등 6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며, 보물 6점, 대구광역시 지정 문화재 7점을 소유한,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동화지
동화사 산문 입구에 조성된 동화지는 풍수적으로 동화사골의 기운을 저장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구나 동화지에서 바라보는 팔공산 연봉은 비로봉과 동봉 그리고 서봉이 그림처름 아름답게 도열하고있다
대웅전
큰 절의 법당치고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으나 높직한 기단 위에 올라 앉아 있어 훤칠하게 보인다. 꽃창살이 매우 다채롭다.
동화사 대웅전은 꽃창살이 다채롭고 귀기둥이 특출하며 옆모습이 아름답다.
앞면의 문들을 꽃살문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더러 볼 수 있지만 동화사 대웅전처럼 옆문에다 뒷문까지 꽃살문을 단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꽃살무늬조차 어간과 협간이 다른데다 옆면이 다르고 뒷면도 달라서 보는 눈을 반짝이게 한다.
귀기둥은 모두 다른 기둥보다 훨씬 굵은 아름드리 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삼았다.
쉬운 일 같지만 집 짓는 대목이나 일을 시키는 주인이나 또 시주자가 있었다면 시주자의 뜻이 서로 어긋나서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인공 속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지혜요 자연과의 교감이다.
정면에서 보는 맛도 좋지만 동쪽 마당에서 바라보는 법당의 옆모습은 특히 좋다.
기단은 한 단 더 높아 보이고 귀기둥의 구부러진 모습이 드러나며 하늘을 배경으로 합각마루·귀마루·처마선이 이루는 곡선이 크고 넉넉하되 무겁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과 옆면의 칸수가 같지만 앞면의 칸살이 더 넓어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영조 3년(1727)에서 같은 임금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이다.
대웅전과 마주보이는 봉서루 뒤편에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화사는 영남의 승군 총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절이고, 사명스님이 그 지휘자였다.
편액은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동화사에는 이밖에도 ‘사명당대장’(泗溟堂大將)이라고 ‘대장’이라는 호칭을 붙인 사명스님의 진영을 비롯하여 승병활동을 알려주는 몇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금당암 극락전의 측면 동서로 나뉘어 서 있는 신라시대 일반형 쌍탑이다.
쌍탑이라고는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두 탑이 사뭇 다르다.
동탑을 후대에 보수했기 때문이다.
허훈(許薰, 1836~1907)이라는 조선 말기의 인물이 쓴 「금당탑기」(金堂塔記)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그 무렵 보수가 이루어진 듯한데, 이때의 보수가 얼토당토않아 심하게 조화와 짜임새를 잃고 있을 뿐더러 서탑의 모양과도 상당히 다른 결과가 되었다.
기단의 대부분을 교체했는데 부드러움이 전혀 없고 무거우며 둔할 뿐이다.
탱주나 우주가 있어야 할 곳에 대나무 마디를 새긴 것도 낯설고, 상층기단의 중대석은 지나치게 폭이 좁아 탑 전체를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상층기단 갑석 윗부분은 균형과 비례에 이상이 없는 안정된 자태이다.
탑신은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넷이라는 점을 빼면 일반적이다.
특히 노반, 복발, 앙화, 2개의 보륜, 보개, 1개의 보주 등 상륜부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신라 석탑의 상륜부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귀한 탑이다.
높이가 동탑은 5.62m, 서탑은 5.24m이다. 허훈의 「금당탑기」에는 신라 경문왕 3년(863) 왕이 죽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 7과(顆)를 봉안하여 석탑을 세웠으며, 헌강왕 1년(875) 삼강대사(三剛大師)가 탑을 금당으로 옮겨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그 글은 분명히 탑을 보수할 때 탑 안에 갈무리되었던 기록에 근거했을 것이므로 두 탑은 863년에 세워졌음에 거의 틀림이 없다.
같은 산중의 비로암 삼층석탑 또한 이 해에 세워진 것이 확실해 이를 뒷받침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두 탑이 전각의 앞쪽에 놓이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극락전의 양 옆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혹 삼강스님이 옮기면서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추측일 따름이다.
동서 두 탑이 함께 보물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
금당선원 서편, 두 탑을 좌우로 거느리고 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 극락전이다.
광해군 14년(1622)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낡은 대로 단청이 환하면서도 고색을 머금어 눈길을 끌지만 극락전에서 주목해야 할 곳은 그 기단과 초석들이다.
신라 통일기의 건축 기단은 가장 아래 길게 다듬은 돌을 이어 외벌대의 지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안으로 약간 들여 군데군데 돌기둥을 새기거나 세우고 그 사이에 넓적한 면석을 끼워 벽체를 이룬 다음, 다시 벽체보다 앞으로 내밀어 넓은 덮개돌, 곧 갑석을 덮어 마무리한다. 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이런 기단을 보통 가구식 기단이라고 부른다.
갑석의 일부가 없어져 새 돌로 보충하기는 했지만 극락전 기단이 바로 가구식 기단이다.
신라시대의 것임에 분명한 이 기단에서 매력 있는 곳은 네 귀퉁이의 갑석이다.
돌 하나를 꺾쇠 모양으로 다듬은 귓돌에는 탑의 지붕돌 모서리처럼 마루를 중심으로 가볍게 물매를 지워 멋을 내었다.
흘려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기단에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구석이니, 아마도 그 위에 올라앉았던 신라 때의 건물 또한 무척 격조 있는 건물이었으리라.
인악대사비
동화사의 비전(碑田)은 큰 절과 금당선원이 갈리는 길머리에 있다.
중수비·송덕비·사적비 따위가 꽤 여럿 비각의 안팎에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仁岳堂’(인악당)이라는 편액을 붙인 허름한 비각 안에 인악(仁岳)스님의 비가 있다.
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비와 별로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
다만 귀부는 달리 볼 수 없는 야릇한 모양을 하고 있으니, 거북이 아니라 알을 품고 있는 닭과 흡사하게 생긴 봉황이 웅크리고 앉았다.
풍수적으로 동화사가 봉황과 관계가 깊다보니 이런 발상이 나온 것 같다.
예로부터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동화사는 그 터가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 전해지고 또 절을 지을 때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절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지 않는가.
일주문의 이름은 봉황문, 누각의 이름 또한 봉황이 깃들인다는 뜻의 봉서루. 대충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비의 받침을 봉황으로 만든 듯하다.
솜씨야 하잘것없지만 발상이 재미있다.
보통 거북으로 이루어지는 비 받침과는 달리 봉황으로 비의 받침을 삼았다.
비문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이 짓고 글씨도 썼다.
행서로 써내려간 글씨가 대단히 유려하며 물방울이 떨어지듯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당간지주
통일신라 하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높이 3.1m의 당간지주이다.
비각 바로 옆에 두 지주가 64㎝의 간격을 두고 마주서 있다.
안쪽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밖의 3면에도 꺾이는 곳에 모를 살짝 죽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다만 등의 중심을 아래에서 위로 가로지르는 긴 능선(稜線)을 새기고 지주의 가운데쯤에서 3면을 얕게 깎아내어 변화를 주고 있을 뿐이다.
꼭대기에는 지주의 안쪽으로 네모진 홈을 만들고, 밑동에는 둥그런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했다.
당간을 세웠던 간대는 남아 있지 않다.
아랫부분의 폭 74㎝ 두께 34㎝ 높이 3.1m의 크기이다.
위로 갈수록 폭과 두께가 줄어들기는 하나 그 정도가 약해 넓적하고 펑퍼짐할 뿐 상승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254호이다.
부도
당간지주의 뒤쪽 소나무 그늘 아래 호젓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마을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지대석을 제외하곤 모두 팔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형태가 안정되고 균형이 잘 잡힌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지대석을 공들여 깎았다.
네모진 평면 위로 세 줄의 굄대를 올린 뒤 석탑기단의 중대석처럼 허리를 줄였다가 다시 제일 위쪽 굄대의 폭으로 넓혀서 평평하게 마무리하여 하대석을 받칠 수 있도록 했다.
허리 부분에는 면마다 가늘고 긴 4개씩의 안상을 자잘하게 새겼다.
하대석과 중대석을 통돌로 만들고 상대석은 별개의 돌로 만들었다.
상대석에는 열여섯 잎 연꽃이 푸짐하게 피어난다. 몸돌은 면마다
양쪽으로 우주를 하나씩 세우고 윗부분에는 인방을 지른 뒤 첨차까지 새겨 목조가구의 흉내를 내었다.
귀마루를 굵게 새긴 지붕돌은 바닥의 반전이 심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몸돌과 만나는 안쪽까지 들여다보인다.
귀마루가 흘러내리는 모서리마다 끝이 깨져 나간 걸로 보아 귀마다 귀꽃이 달려 있었던 듯하다.
상륜은 없어진 것을 만들어 얹었으나 어색하다.
높이 1.72m로 작고 대단한 기교를 부린 바도 아니지만 형태가 안정되고 균형 잡혀 가벼운 미감을 유발하는 참한 부도다.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공식 명칭은 도학동 승탑, 보물 제601호이다.
◆ 보호수
인악대사 나무(느티나무)
심지대사 나무(오동나무)
◆ 사진첩
'雲水 天下 > 近郊山河'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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