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수도 종교

무심결

초암 정만순 2014. 4. 9. 13:55

심결 

 
有物能爲萬象主(傳大士偈)
한 물건이 있어서 삼라만상의 주인공이 되고 일체가 마음의 짓는 바로서 우주 만유가 모두 마음의 화현이므로 마음이 곧 조물주인 까닭이니라.

 覓理只在一念心(誌公頌)
진리를 찾으려면 다만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이 바로 만사 만리의 근본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心無處所不可得(臨濟)
마음은 처소가 없는 것이므로 가히 얻어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이란 원래 형상이 없는 존재로서 출물무쌍하고 은현 자재 해서 일정한 처소가 없는 것이므로 그 실체를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

道如虛空復何修(本淨)
도라는 것이 허공과 같은 것인데 다시 무엇을 닦을 것인가 도라는 것이 본래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형상이 없는 것이므로 무엇을 닦으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저 다만 악취 망연과 사심 잡념 등만 제멸시켜서 청정 일념에 주하게 되면 도는 은연중 그 가운데 들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無名無字亦无形(壇經)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성품 자리에는 본래 한 이름도, 한 문자도, 한 형체도 없이 다만 공공적적(空空寂寂)하고 고고역력(孤孤歷歷)하기만 한 것이다.

 無去無來亦無住(壇經)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또한 주한 바도 없다 성품 자리는 본래 형상이 없는 것인지라,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또한 주한 바도 없이 그저 여여 자연으로 시간과 공간을 두루 하여 종횡으로 무량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諸心非心名謂心(金剛經)
모든 마음이 마음이 아니므로 이름을 마음이라 일컫는 것이며 모든 마음이 객관적인 외경을 따라 피동적으로 환생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본심이 아닌 객심이다. 그래서 이것을 강연히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덕경에서 이른바 명가명(名可名)이면 비상명(非常名)이란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於念不念名無念(壇經)
생각할 때 생각하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한다 유념과 무념을 구별해서 분석한다면, 유념은 자기 몸과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름이요. 무념은 떳떳한 도와 공도를 위하는 마음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유념에 집착하면 덕을 상실하고 무념하면 지극한 덕을 낳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양무제의 소무공덕(所無功德)은 유념이라 할 수 있고, 요순의 성덕(盛德)은 무념이라 할 수 있다.(有功而不德이 厚之至也=孔子의 말씀)

迷倒隨色摩尼珠(指月錄)
혼미 전도가 되어 끌리게 되는 색 경계도 마니보주가 되고 원래 티끌 하나 없이 청정무애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와 해탈을 얻어 삼계 육도를 임의로 수용하게 되니 모든 유색 경계가 모두 여의보주로 화한다.

 識取秘密金剛體(玄沙法語)
비밀을 알아내니 금강체로다 원래에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이 상주 불멸로 여여 자연하여 항상 만고에 길이 불멸하는 자성불을 깨치고 보니 이것이 바로 금강 불괴신(金剛不壞身) 임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견성(見性)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것이요. 어리석은 중생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비밀체인 것이다.

 天不能盖地不載(慧師)
하늘도 능히 덮지 못하고 땅도 실지 못하는 것이며 사람의 심량은 너무나 광대 무량해서 천지를 덮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지라 천지의 넓음으로도 이 심량은 덮거나 실을 수 없는 것이다.

 火不能燒水不溺(臨濟)
불로도 능히 태울 수 없고 물에도 빠뜨릴 수 없다 마음의 모습은 원래 형체가 없는 것인지라, 이것은 불에다 태울 수도 없는 것이며 또는 물에다 빠뜨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취부득(取不得) 사부득(捨不得)이다. 이것이 또한 금강체(金剛體)의 한 모습인 것이다.
 
語默聲色盡佛事(黃蘗)
말하고 묵묵하고 듣고 보는 것들이 다 부처의 일이며 이것을 몰아서 말하자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작용하는 바가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부처의 일 아님이 없는 것이다. 몸은 만사 만리의 근본이라고 하듯 부처를 이루는 근본이 된다.
 
草木瓦礫是法身(時蔚)
풀 나무 기와 자갈 이것이 법신이로다 천지의 일체 만물이 모두 각각 법신체로 생겨나서 서로 해하지 않고 공생 공영하고 있는 것이다.
 
鏡照形影莫存一(大乘讚)
거울에 비치는 얼굴 그림자를 하나도 두지 않으며 색신을 비롯한 기타 일체 만물들은 마치 거울 속에 잠깐 비쳤다가 잠깐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이 허망한 것들이니 이러한 허망한 것들은 하나도 챙기지 말고 오직 진실한 참 성품만을 잘 챙기고 잘 간직하라는 요지이다.
 
燈光體用實無兩(壇經)
등잔과 불빛이 실은 둘이 아니다 등은 체요 불빛은 용이다. 등이 없는 불빛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말이 다시 합하여 하나의 이치가 되어서 체와 용이 둘 아닌 하나인 이치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일체 사물이 체와 용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선 첫째 사람으로 말하면 정신은 체요 심신 작용은 용이다. 그런데 문제의 초점은 기본적인 체가 견실해야 결과적인 용이 광명을 발휘하게 된다는 요지이다.
 
水不洗水物本無(南泉)
물로 물을 씻지 않는 것은 물건이 근본 없기 때문이다 물로 물을 씻지 않는 것은 그 물 자체가 근본적으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품 자리도 원래에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이므로 무엇을 닦으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깨끗한 그대로의 성품만 사용할 뿐인 것이다.
 
心不自心色故有(馬祖)
마음이 자기 마음이 아니라 색 경계가 짐짓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모든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본심이 아니요 객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객심에 끌려 마음이 혼란해지거나 변동되지 않아야 정력을 얻었다 할 것이다. 일상 수행의 요법에서 밝혔듯이 심지는 원래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하였으니, 경계를 당하여 원래의 마음을 대조해야 한다. 그러면 원래의 참마음인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 될 것이다.
 
性覺必明能所始(楞嚴經)
자성을 깨치면 반드시 능히 시작되는 바가 밝혀지는 것이며 허령불매(虛靈不昧)해서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현현묘묘(玄玄妙妙)한 자성불을 깨치면 반드시 거기에서부터 만지(萬智) 만능(萬能)이 만덕(萬德)이 시작되는 바가 밝혀지는 것이다.
 
識神誤認生死本(招賢禪師)
식신이 들어서 생사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미한 중생들은 영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분별식심으로 단생만을 알고 있어서 생사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고 있는 것이니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正見邪見盡打却(壇經)
정견도 사견도 다 처 물리쳐 버려야 하며 자성 본래에는 정견이니 사견이니 하는 아무런 분별이 없이 순일무구하고 본연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에 정견이니 사견이니 하는 분별이 있게 되면 이것은 벌써 하나의 잡념으로서 순일무구한 자성에 오염이 되는 것이다.
 
眞性妄性亦本空(本淨)
진성도 망성도 또한 근본은 비어 버린 것이다 성품 자리에는 본래 진성이니 망성이니 하는 분별이 없이 그저 순일 담박할 뿐이다.

浮雲雷電生死觀(誌公頌)
뜬구름 사라지 듯하고 번갯불 치듯하는 생사관이요 우리의 색신은 생로병사로 한정된 몸이다. 이것을 영생 불멸한 진신에 비해 볼 때 마치 떴다 가라 않는 구름과도 같고 번쩍 지나가는 번갯불같이 허망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색신은 가신이요 성품은 진신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허망 무실한 가신에 얽매이지 말고 놓아 버려야 속박을 여의고 해탈을 얻을 것이며 겸하여 무량수를 얻게 된다.
 
寒月氷水心性辨(忠國師)
찬 달과 얼음물처럼 생긴 심성 자리다 심성 자리는 원래 일점의 오염도 일호의 잡됨도 없어서 명철하기가 찬 달빛과 같으며 또는 원근 친소와 증애 호오가 없어서 냉철하기가 얼음물과 같다.
 
捨頭覓頭不歇狂(楞嚴經)
머리를 놓아두고 머리를 찾는다면 미친 짓이 쉬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자성불을 여의고 다른 곳에서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자기 머리를 놓아두고 다른 곳에서 자기 머리를 찾으려는 것과 같은 일이어서 종일토록 찾아도 부처는 못 만나 볼 것이니 미친 짓이 쉬지 않을 것이다.
 
將心用心豈非錯(信心銘)
마음을 거느리고 마음을 사용하니 어찌 어긋나지 않을 것인가 혜안으로써 진리 소재를 직관해서 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사량 계교와 분별 식심만으로 마음을 쓰게 되면 생각 생각이 전불상응(轉不相應)으로 적중이 되지못할 것이다. 어찌 무슨 일이 어긋나지 않으랴.
 
見聞覺知離不離(黃蘗)
보고 듣고 깨쳐서 아는 것은 떠 날래야 떠나지 못하는 것이며 무엇을 보고 듣고 깨쳐 아는 것들은 모두 人間의 선천적 본능으로서의 자연적 현상이다. 이것을 떠날 도리가 없는 것이므로 다만 무엇이고 바르게 보고 듣고, 바르게 깨쳐 알고, 바르게 응용하면 그만이다.
 
罪福因果空不空(證道歌)
죄복과 인과가 비고도 비지 않았다 성품 본래에는 죄복이니 인과이니 하는 분별이 비어 버렸다. 그러나 현실로는 분명히 죄복과 인과가 있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알아서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을 아울러 계속해 나가야 된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無依無着無分別(黃蘗)
의지할 것도 없고 착할 것도 없고 분별도 없다 성품 자리는 본래 의존 한데도 없고 주착된 바도 없고 또한 아무 분별도 없이 그저 고고역력(孤孤歷歷)하고 외외올올(巍巍兀兀)해서 해탈자재한 것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독생 독존 독로한 자리다.
 
無取無捨無憎愛(本淨)
취할 것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하고 사랑할 것도 없다 성품 자리는 원래 아무런 분별이 없으므로 무엇을 취하고 버리는 것도 없고 또 무엇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도 없이 그저 일체가 담담하고 일체가 평등할 뿐이다.
 
無趣無向無造作(馬祖)
마음 부치는 데도 없고, 마음가는 데도 없고, 만드는 것도 없다 성품 자리는 일체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마음 부치는데도 없고, 마음가는데도 없고, 또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 것도 없이 그저 무위 자연할 뿐인 것이다.

 無我無人無勝負(黃蘗)
나도 없고 남도 없기 때문에 이기고 질 것도 없는 것이다 성품 자리는 원래 형체도 분별도 없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이것이니 저것이니 나니 너니 하는 대상이 끊겼다. 그러므로 이기고 질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 상생도 상극도 은혜와 원수도 없이 지극히 평만스럽기만한 것이다.

心旣推窮又返觀(本淨)
마음을 이미 추궁하였거든 또 돌이키어 관해야 할 지며 마음 공부를 해서 이미 본심을 추궁하였거든 이것을 잊지 말고 다시 되돌아보고 살피고 해서 확충을 시켜야 한다.
 
物不將來猶放下(趙州)
물건을 데리고 오질 말고 오히려 놓아 버려야 한다 성품 본래에는 한 물건도 없이 깨끗이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그 한 물건 마저 비어 버려야 자성 본연에 돌아와 자유와 해탈을 얻게 된다.
 
忘心忘境忘憶智(黃蘗)
마음도 잊어버리고 경계도 잊어버리고 생각해 내는 지혜심도 잊어버려야 하며 안으로 마음도 잊어버리고 밖으로 경계도 잊어버리고 또 지혜를 얻으려는 생각마저 놔 버리고 무념삼매에 들어야 앞이 통현명백(洞然明白)해지는 것이다.
 
絶思絶慮絶對待(四祖, 六祖)
생각도 끊고 염려도 끊고 상대도 기대도 끊어야 한다 사람이 생각과 염려가 많고 보면 그 생각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걱정하지 않아야 할 일을 걱정하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일을 생각하게 된다. 분심초려로 번뇌 망상을 끄리다 보며 실신자와 정신이상자가 되기 쉽다. 늘 정신을 모으고 하나로 만드는 공부를 해야 한다.
 
在世隨緣無 (張拙居士)
속세에 있어서의 끌리는 인연도 구애되는 것이 없으며 원래에 티끌 하나도 없이 깨끗하기 만한 자성불을 깨쳐서 속박을 여의고 해탈을 얻어서 마음의 자유가 생기고 보니 속세의 모든 진연도 아무런 구애가 없이 모두가 정토로 화한다.
 
終日任運若愚痴(黃蘗)
종일토록 임의로 운심을 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듯하다 안으로 모든 마음과 밖으로 모든 경계를 다 비워 버리고 하염없이 앉아서 임운등등 (任運騰騰)하고 등등임운(騰騰任運)해서 조금도 어디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마음을 운용하고 있으니 남 보기에 어리석은 듯하구나.
 
善惡是非莫思量(六祖)
시비와 선악을 가려 생각지 말며 자성 본래는 시비와 선악이 돈공해서 순일무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에 시비 선악의 간택이 생기게 되면 이것은 벌써 청정무구한 자성 본연에 상처를 입게 주게 된다.
 
喜怒愛惡不發生(臨濟)
기뻐하고 성내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성품 자리에는 원래 희노애오 등 일체 감동이 돈공하여서 지극히 평등 공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에 희노애오의 차별 감정이 생기게 되면 지공무사한 자성 본연에 또한 물들게 되는 것이다.
 
卽立三學除三業(傳心法要)
바로 삼학을 세워서 삼업을 제거시킬 것이며 계정혜 삼학 공부로써의 삼대력을 얻어서 신구의 삼업을 제거시켜야 한다. 이 삼대력이 아니면 삼업을 제거시킬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삼학 공부는 만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 정법인 것이다. 이 공부를 천번 만번 억 만번 닦아 삼업을 청산하여야 하겠다.
 
須達一相幷一行(壇經)
반드시 한 상에 요달해 가지고 한 행까지 아울러야 한다 자성 본연의 적적 성성한 일상삼매(一相三昧)를 요달해 가지고 일행삼매(一行三昧)까지 아울러야 본말과 체용(體用)이 일치 부합되어 도가 완숙되었다 할 것이다.
 
離四句兮絶百非(楞嚴經)
사구 게를 여의여야 백가지 비행이 끊어진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사상을 여의어야 일체 비행이 근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상이 들어 있고 보면 모든 차별관이 생기게 되고, 차별관이 생기고 보면 거침없이 만행을 감행하기 쉽기 때문이다. 도에 드는 근원은 상을 떼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사상 외에도 무엇이든 얽매이는 상을 떼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비행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다.
 
第一義兮不二法(維摩經)
제일 의는 둘 아닌 법이로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첫째 성품 자리에 있어서는 천만인이 다 똑같은 성품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진리도 하나요, 일체 만법도 한 근원이요, 우주 만유도 한 체성이어서 모두가 둘 아닌 하나이다.
 
當處便是莫妄想(黃蘗)
당처가 바로 이것이니 망령된 생각을 하지 말 지며 사람의 심신 그 당처가 바로 불성 자리다. 그러므로 자기 불성 자리를 여의고 다른 데에서 부처를 구하려 하는 그러한 망상은 하지 말 것이니라. 만일 그런 망상을 지니게 되면 백천겁을 지내도 부처는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卽時豁然還本心(維摩經)
즉시에 활짝 열려서 본심에 돌아온다 자기 자성불을 향해서 지성으로 부처를 찾으면 즉시 활연개오해서 자기 본면목을 만나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본래 면목을 찾는 공부 길로 삼학팔조의 수행을 하게 하였다. 이를 지성으로 하면 반드시 본심을 찾게 되고 불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離於華峠覺圓照(圓覺經)
화예를 여의면 깨쳐서 뚜렷이 비치는 것이며 수도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속세에 있어서 허식적인 명예심과 사기심을 제거시켜서 심신 청정하면 자연 두렷이 깨쳐서 앞이 환히 밝아지는 것이다.

除却 垢光始現(證道歌)
흔적인 때 다하면 비로소 빛이 나타난다 수도를 하자는 데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누습과 악취며 기타 모든 욕심만 제거시키면 차차 자성 광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自現一體佛法僧(大珠)
스스로 불법승이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원래에 불법승 삼보가 각각이 아닌 것이다. 자성불만 깨치게 되면 불법승 삼보가 삼위일체와 합하여 한 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莫認三際去來今(傳心法要)
과거 현재 미래 삼제를 인식하지 말라 원래에 생사와 거래가 없는 성품 자리에는 과거니 장래니 현재니 하는 삼세관의 분별이 없는 것이니 만일 마음에 삼세관의 인식을 지니게 되면 단생관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금강경에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라 하였다. 삼세심이 불가득(三世心不可得)의 이치를 알면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非心非佛亦非物(馬祖)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또한 물건도 아니다 성품 자리는 아무 분별이 없으니 이것은 마음도 아니요 한 법도 아니요 도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 또한 한 형상도 없으니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無死無生亦無道(忠國師)
죽는 것도 없고 나는 것도 없고 또한 도도 없는 것이다 성품 자리는 원래 형상이 없는 진공 체인지라 죽는 것도 낳는 것도 없고 또한 도란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심행처가 멸하고 언어도가 끊어진 곳이다.

迷不失悟亦不得(黃蘗)
미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고 깨친다고 얻는 것도 아니며 성품 자리는 부처님이나 일체 중생이나 다 똑같이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나 못 깨치나 그 성품 자리는 그대로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못 깬다고 특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깨치고 못 깨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本無生今亦無滅(六祖)
근본 생겨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 와서 멸함도 없다 성품 자리는 본래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 와서 없어질 것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시무종이다. 그래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이요 금강같이 부서지지 않는 것이다. 이 자리를 일러 불괴(佛壞), 불염(不染), 불매(不昧)하다고 한다.
 
宗通說通及心通(永嘉, 六祖)
심종이 열리면 말도 또한 열리고 마음도 또한 열리는 것이다. 심종 즉 자성이 열리면 이에 따라 자성 법문이 열리기도 하고 또한 마음도 막힘이 없이 열려서 사통오달로 구애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比知現知約敎知(永明)
비교하여 알게 되거나 나타난 것이나 알게 된다면 대략 교법은 알아 볼 것이다 모든 사리를 혜안으로써 직관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교 사량으로 무얼 좀 알게 되거나 또는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나 육안으로 보아 알게 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이 설해 놓으신 문자적인 교법은 약간 알아 볼 것이나 부처님의 교외별전인 이심전심으로서 의 정통은 이어받지 못하는 것이다. 관물외지물(觀物外之物)하라.
 
夢覺境不殊顚倒(誌公)
꿈과 깨우침의 경계가 전도와 다르지 않다 수도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혹은 매 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혹은 밝아지는 때도 있으며 혹은 정념이 서는 때가 있는가 하면 혹은 사심이 침노하는 때도 있는 것이니 이것이 법마 상전으로서 도가 아직 완숙이 되지못한 증거로써 전도와 다름이 없는 경지다. 그러나 여기에서 낙심하거나 퇴굴심을 내지 말고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교시이다.
生死心皆是汚染(馬祖)
생과 사의 마음 이것이 오염인 것이다 시비 선악간 들랑날랑하는 마음이 바로 얼룩진 마음인 것이다. 이것은 본래 티끌 하나 없이 본연 청정한 자성을 먹칠하게 되는 것이다.
 
盡十方智者入宗(信心銘)
시방을 두루 다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라야 종통에 들게 되는 것이며 본성을 깨쳐서 지혜 광명이 능히 시방 세계를 두루 비춰 볼 수 있는 자만이 이심전심의 정통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심 상연이 되기 때문이다.

無一切心故降魔(忠國師)
한 마음도 없는 고로 항마다 일체의 마음을 다 비어 버리고 보면 마음에 아무런 구애가 없게 되고 구애가 없고 보면 이에 따라 두려움과 전도와 몽상이 없어 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항마인 것이다.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나면 항마인 것이다.

昭昭靈靈認賊子(現滅)
소소 영령해서 도적놈의 새끼인 줄을 알겠으며 원래에 털끝만치도 숨김과 거짓이 없이 명명백백하고 소소영령한 자성불을 깨치고 나서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 십팔아뢰야식이 들어서 본심을 빼앗아 가는 도적놈의 새끼인 줄 알겠다.

澄澄湛湛忘物我(時蔚)
맑고 맑고 맑고 맑아서 물건도 나도 잊어 버렸다 자성 본체는 한 형상도 없고 아무런 분별도 없으므로 거기에는 너니 나니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일체 대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그저 담담하고 적적할 뿐이다. 망물아 (忘物我)하여야 진경에 드는 것이다.

無字經常放光明(詩蔚)
문자 없는 경이라야 항상 광명을 발한다 성품 자리는 일체 만법의 본원으로서 역시 팔만장경의 원판이다. 그래서 이것을 일러 무자경(無字經)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을 늘 연마해서 회광반조가 되고 보면 거기에 자성 광명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산 경전을 보아 항상 광명이 발하여야 삼계의 대권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有爲法猶如夢幻(金剛經)
하염 있는 법은 오히려 꿈과 허깨비 같나니라 일생의 행복과 영화를 누리기 위한 인간의 모든 영위는 인간의 흥망성쇠와 만물의 성주괴공의 자연 법칙과 질서에 따라 모두가 전환되거나 소멸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모두 허망스럽기가 꿈결과 허깨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유위법에 집착되지 말아야 한가롭고 진실하고 자유로운 생활이 되어서 현실 극락을 누릴 것이니라.
 
有情覓佛山網魚(誌公)
의식적으로 부처를 찾는 것은 산 위에다 고기 그물을 친 것이요 만일 부처를 찾겠다는 집념을 지니고 부처를 찾으러 든다면 이것은 흡사 산 위에다 고기 그물을 친 것이 되어 만나 볼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만나려거든 일체 심을 완전히 비어 버리고 오직 무념삼매에 들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홀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다.

空心坐禪天雨花(指月錄)
마음을 비고 앉아서 선을 하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마음을 텅 비고 앉아서 선정에 들게 되니 자연 수승화강이 되고 심화 기화가 되어 열반경에 들게 되니 마치 하늘서 꽃비라도 내리는 듯하다.
 
無比無似言語斷(本淨)
비교할 것도 없고 비슷한 것도 없어서 말 길이 끊겼으며 성품 자리는 본래 한 형상도 없고, 한 물건도 없고, 한 문자도 없고, 한 법도 없고, 도도 없이 일체가 텅 비어야만 있으니 이것을 어디에 비할 데도 없고 또 비슷한 것도 없고 해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표현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도를 떠난 것이다.
 
全揀全收見解空(都序)
온전히 가리고 온전히 거둬 버리니 견해가 비어 버린다 선과 악이며, 옳고 그름, 공과 사며, 대와 소며, 참과 거짓이며, 기타 일체 법을 다 가릴 것을 가리고 거들 것은 거둬 버리니 아무런 견해마저 비어 버린다. 분별 시비를 다 놓아 버리니 그 자리는 어떠한 견해로도 사의치 못한다.
 
是法平等無高下(金剛經)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은 것이 없으며 성품 자리는 부처님이나 일체 중생이나 다 똑같이 지니게 됨과 동시에 부처라고 더한 것도 아니며 중생이라고 덜한 것도 아니라 일체가 평등한 것이다. 다만 깨닫고 못 깨달음의 차이일 뿐이다.
 
般若妙行有淺深(忠國師)
반야의 묘행은 얕고 깊은 데가 있다 불보살 성현들이 중생들을 교화해 나갈 때 각자 근기에 따라 천만 방편을 베풀어 쓰는 것이며, 또는 모든 법을 응용함에 그 때와 장소며 시기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적중시켜 나가기 때문에 그 반야묘행이 앝고 깊은 대목이 있는 것이다.

見惟對物是因緣(南泉)
보고 생각하고 물건을 대하는 이것이 인연이 되는 것이요 보고 생각하고 물건을 상대하는 것은 인간 자연의 이치이다. 이것을 피할 수도 없으며 또 피하려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보는 것을 똑바로 보고, 생각하는 것을 올바로 생각하고, 물건을 올바로 대해서 공정하고 원만한 취사로써 모두가 선연이 되도록 하면 그만인 것이다.
 
念若着境卽煩惱(壇經)
생각이 만일 경계에 집착되면 바로 번뇌가 된다 한 생각만 어떠한 경계에 집착되면 바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의 첫 단계에 있어서는 피경으로 기초를 다지고 다음에는 대경(對境)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求法應不着法求(傳心法要)
법을 구하되 응하여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 법을 구해야 겠다는 집념으로 법을 구하려 들면 절대로 법을 만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저 다만 일체 심을 텅 비어 버리고 무념삼매(無念三昧) 선정삼매 (禪定三昧)에 들어야 무위이화로 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轉物愼勿爲物轉(楞嚴經)
물건을 굴리기는 할지언정 물건에 굴려지지는 말지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임과 동시에 만물의 주재자이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모든 물건을 유효 적절하게 활용은 할지언정 물질욕에 끌려 질질 끌려 다니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아니된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이 이 뜻을 두고 한 말이다.
 
光呑萬象月孤懸(寶積)
명랑한 달빛이 삼라만상을 다 집어삼키고 달만 또렷이 매 달렸네 안으로 천만 생각과 밖으로 천만 경계를 다 집어 삼켜 버리고 고요히 앉아서 선정 삼매에 들고 보니 소소 영령하고 고고 역력하게 자성 광명만 또렷이 나타난다.

打成一片花頓發(黃蘗)
다 때려 부셔서 한 조각을 만드니 꽃이 별안간 피는구나 일시화발 만세춘(一時花發萬歲春)이라. 온갖 역경 난경을 겪고나니 일시에 꽃이 만발하여 만세의 봄이 되는 경지다.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진 마음을 다 때려 부셔서 한 맘으로 똘똘 뭉쳐 버리니 심기가 화창해져서 별안간 꽃이 핀 듯하다.

莫存知解入此門(禪錄)
지혜를 지니고 이 문에 들지 말 지며 만일 선도를 얻기 위하여 선문에 들어오려거든 상식이나 모든 학식과 자기 지견을 완전히 비어 버리고 깨끗이 백지로 환원해 가지고 입참해야 도를 온전히 받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탈전수(全奪全授)가 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만일 자기 지견을 가지고 이리저리 계교하게 되면 현혹이 되고 교란이 되어서 응합이 되지못하므로 도를 얻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수화(甘水化) 백수채(白水彩)라고 한다. 도를 구하려면 전신전수(全信全受)해야 된다. 그렇지 아니하고 반만 믿으면 반만 밖에 되고, 믿지 않으면 받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도를 구하려 왔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진리에 맡겨 버려야 한다.

但依知慧到彼岸(心經)
다만 지혜에 의지하여야 저 언덕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지혜란 배우고 아는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깨달음에 나오는 원래의 참 지혜 광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량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래 돈공한 자성 본원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를 의지하여야만 극락 정토인 저 언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處處淸淸無佛魔(臨濟)
곳곳마다 맑고 맑아서 부처도 마도 없다 본연 청정하고 원만 무애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삼계 육도를 임의로 수용케 되니 어느 곳을 가나 모두 깨끗하기만 하여 부처도 마도 없이 진대지가 정토 아님이 없다.

歷歷孤明聽法人(臨濟)
역력히 뚜렷이 밝게 법을 듣는 사람이로다 일체 마음과 일체 경계를 깨끗이 비어 버리고 고요히 앉아서 선정 삼매에 들어 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적적 성성한 가운데서 고고 역력하게 자성 법문을 밝게 듣고 있는 사람이로다.
 
不變異故不?惑(忠國師)
변동치 않는 고로 속거나 현혹하지 않는다 정법 수행에는 무엇보다도 첫째 신심이다. 신심이 철저히 굳혀야만 다시는 어떠한 사도와 외도에 속거나 유혹을 당해서 변동되는 일이 없이 초지 일관으로 불과를 이루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대불이(四大不二) 신심으로 진리와 법과 회상과 스승님께 변하지 않는 신이 서야 딴 세상으로 흐르지 않는다.
 
無 故無恐怖(心經)
두려웁고 걸림이 없는 고로 공포도 없다 일체 마음을 다 비어 버리고, 일체 경계를 다 여의고 보면 마음에 아무런 구애가 없는 것甄? 구애됨이 없고 보면 아무도 두려운 것이 없고 공포가 없는 것이다.
 
眞佛無口不說法(黃蘗)
참 부처는 입이 없으므로 법을 설하지 못한다 자성불은 원래에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도 설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말 없는 법문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야 불지에 들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 설하지 않는 법이 삼천 대천 세계를 쟁쟁히 울리는 것이다.

眞如有性能起念(壇經)
참다운 성품이 있기 때문에 능히 생각을 일으킨다 성품 자리는 원래 티끌 하나 없이 텅 빈 그것이나 그 가운데 일체 만법이 빈틈 하나 없이 갊아져 있어서 마음 한 번 내키면 일체 만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운전해 나가는 것이다.

念若住卽名繫縛(六祖)
생각이 만일 주착 되면 바로 계박이라 하는 것이다 자칫 한 생각만 어디에 주착 되면 그놈에게 붙잡히고 매달려서 심신의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속박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양력을 쌓아 정력을 얻어서 어떠한 경계에도 적연부동이 되어야 비로소 해탈이라 하겠다.

心旣無隨處解脫(臨濟)
마음이 벌써 끌리는 데가 없으면 해탈이다 마음이 끌리는 데가 없고 보면 마음이 구애되지 않아서 심신 작용이 자유롭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해탈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나 어떠한 장소에 끌리지 않고 자유자재함을 이른다.
 
一切皆空心淸淨(黃蘗)
일체가 다 비니 마음이 깨끗해지고 시비 선악간 일체 마음을 다 비어 버리고 나니 맘에 무엇이 끼고 섞인 것도 없고 얼룩진 것이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하다.

十方常照性圓明(臨濟)
시방 세계가 항상 비치니 자성이 두렷이 밝은 탓이다 시방 세계가 항상 눈앞에 환히 비치게 되는 것은 이것이 자성이 두렷이 밝아진 까닭이다.
 
虛明自照心不勞(信心銘)
픽??밝게 스스로 비치니 마음이 수고롭지 않으며 수도 정진해서 자성 광명이 솟구쳐서 천만 사리가 막힘이 없이 눈앞에 저절로 환히 비쳐서 무불통지가 되니 모든 사리 면에 있어서 무엇을 생각하거나 연구를 할 필요나 여지가 없게 되니 마음이 하나도 수고로울 것이 없다.
 
逈然獨脫不拘物(臨濟)
형연이 홀로 해탈하니 물건에 구애되지 않으며 오욕 칠정으로 물든 세속의 티끌의 속박에서 훨씬 멀리 벗어나서 유유자적하고 초탈하고 보니 세상 물질에는 아무런 구애가 없다.
 
但盡凡情無聖解(天皇悟)
다만 범부의 정취만 없애고 성인이라는 견해는 지니지 말라 범부를 여윈 부처는 없다. 범부가 깨쳐서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범부니 부처니 하는 차별하는 생각과 현애상을 지닐 필요는 없다. 다만 세간에 있어서의 범부의 정취만 씻어 버리고 청정 일념에 주하게 되면 거기에서 초범입성(超凡入聖)이 되는 것이다.
 
惟息諸見不求眞(信心銘)
오직 모든 견해만 쉴 뿐 참은 구하지 알라 구도를 하자는 데는 제일 먼저 자기의 망령된 견해를 다 놓아 버리고, 다음에 참 도를 구한다는 생각마저 버려라. 그러면 자연히 진여자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一切法皆是佛法(金剛經)
일체의 법이 다 이 부처님 법이니라 일체 법이 다 깨치는 일이며 일체 만법이 다 마음의 화현이니 이것이 바로 자성불을 깨치게 되는 각성(覺性)이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이 불법(佛法) 아닌 것이 없다.

一切名皆是心名(馬祖)
일체 이름들이 다 이 마음의 이름인 것이다 우주의 일체 만물이 각자 이름을 지니고 생겨난 물건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모두가 생겨난 후 사람 마음으로 지은 이름들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도 또한 도덕경에 이른바 명가명(名可名)이면 비상명(非常名)이란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但有劍斬阿賴識(大慧)
다만 칼을 지니고 아뢰야식을 베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육근 육경 육식, 이 십팔 아뢰야식이 모든 번뇌 망상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또는 모든 번뇌 망상은 모든 죄고의 씨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이 아뢰야식이 들어서 우리를 죄고에 몰아넣는 큰 도적이고 보니, 우리가 죄고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칼을 지니고 이 도적의 목부터 베어 버려야 하겠다.
 
實無法發菩提心(金剛經)
실은 법이 없어야 보리심이 발하는 것이며 자성 본래에는 한 법도 없이 깨끗이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증득하여 법의 근원을 거둬 버리면 그것이 바로 청정 보리심인 것이다.

無念三昧卽見性(六祖)
무념 삼매가 바로 견성인 것이다 자성 본래에는 아무런 분별심이 없이 적적한 것이다. 일체 사려를 다 놓아 버리고 무념에 들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不得一法是傳心(黃蘗)
한 법도 얻을 것 없는 것이 이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법이란 사사로이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고 얻었다 하면 법이 아닌 것이고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한 법도 {나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으니 오직 이심전심으로 주고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