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기공 명상

호흡 수행법

초암 정만순 2021. 8. 14. 14:37

호흡 수행법

 

                                                                 

 

 

호흡은 보다 내면적인 생명활동과 관계가 있다.

동물이 살아가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자율신경계의 작용에 의하며, 인간의 오장육부도 어느 것 하나 이 작용의 지배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생명활동은 자신의 뜻대로는 전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유일하게 의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폐의 작용 즉 호흡작용이다.

예를 들어 호흡을 느리게 하면 심장의 박동이 따라서 느려지고 뇌파의 사이클이 뒤따라서 느려진다.

이것은 곧 호흡에 의해 자율신경계가 지배를 받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생명력을 조절할 수 있다면 호흡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오래사는 동물중에 거북이와 고래가 있다.

특히 고래같은 경우에는 한번 숨을 쉬면 거북이와 버금가는 시간동안 (30분간) 이나 물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의 호흡법은 무엇일까.

고대인들의 생각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결국 요가의 체위나 명상, 선도, 불도 등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운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호흡을 통하지 않고는 궁극적인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수행순서

1. 단전호흡 
2. 안반수의(수식관) 
3. 비단관
4. 연정관 
5. 바스트리카 호흡법
6. 쿰박 
7. 연기연신관 
8. 생정관
9. 내시반청 
10. 용호비결
11. 쿤달리니 명상
12. 소주천 - 소약
13. 대주천 - 대약
14. 접입불루 (Tantra Yoga)
15. 다주선 (Tantra Yoga)
16. 화두선
17. 묵조선
18. 위빠사나
19. 전생관 (觀法)
20. 선불계관 (觀法)
21. 만트라(Mantra Yoga)/진언
22. 양신(陽神)

1. 단전호흡

 


단전호흡이란 말 그대로 폐식호흡이 아닌 단전으로 숨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단전에는 호흡을 할 만한 기관이 없다.
다만 신비적으로 알려져 있는 "마니푸라챠크라"가 여기 해당 된다.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 체내의 내분비 홀몬계와 공기중의 산소가 특수한 화학적 작용을 일으킬때 발생하는 특이한 물질이 단전에서 형성된다.

이 물질의 영향력으로 예를들어 쾌감 호르몬인 도파민과 엔돌핀이 체내에서 증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단전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면 선도에서 말하는 "氣"와 요가에서 말하는 "프라나"등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특이한 물질의 발현이 인체와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가 관건이며 어떻게 해서 이 상태에 이르는가가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흡수행에 관심을 갖고 책과 실전을 통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실제적 현상에 직면 못하는 이유는 제반수행 과정이 전반적으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 이해될수 있다는 것에 그 문제점이 있다고 하겠다.


단전호흡의 경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호흡을 장기간 규칙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적어도 하루에 1시간씩 전체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는 수행을 해야 한다.
꾸준한 수행이 되었을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또는 마음속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올바른 영감과 확고한 신념이 일어나게 되며 수행에 대한 자부심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 과정까지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도달해 보지만 명확한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전반적인 수행에 관한 체계가 없이 수행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과정에 관한 기대심이 없는것이 보편적인 과정인 것으로 보여진다.

단전호흡은 선도에 있어서 제일 첫번째 과정이며, 다음 과정에 관한 분명하고도 좋은 기대심이 없다면 신속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단전호흡을 시작하는 실제적 방법은 일반적 자세인 "반가부좌" 상태이다.

몸통이 곧바르고 치우치지 않도록 단정하게 하여야 한다.

척추가 가장 안정된 자세로 되어서 어떤 특정한 곳에만 힘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목뼈는 수직으로 곧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턱을 약간 당겨 붙여야 한다. 

엉덩이는 약간 밖으로 튀어나가도록 앉아야 편안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앉을때 엉덩이를 자리에 붙인 채 몸통을 약간 앞으로 당기면서 내려 앉는다.

가슴은 약간 앞쪽으로 굽는듯 하고 아랫배에 전체의 중심이 실리도록 한다.

그러나 척추가 너무 굽어서는 안된다.

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오른손위에 왼손을 얻은 상태로 양쪽 엄지손가락을 맞닿게 하면 둥그렇게 말리는데 이때 하단전위치에 가만히 가져다 두면 된다. 

혓바닥은 입천장에 붙이는데  그렇게 하면  수행중 침이 잘나오게 된다.

 

몸을 닦고 성품을 잘 기르려고(修身養性)한다면 기를 모아 신을 이루어야(結氣成神) 하는데 우선 정신을 고요히 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정신을 고요히 할 때 모든 소리를 되돌려 인체 내부를 주시해야하며(返聽內視),

마음이 망령되게 일어나게 해서는 안되며(心不妄念),

입으로는 망령되게 말해서도 안되며(口不妄言),

몸 또한 망령되게 움직여서도 안된다(形不妄動).”   

 

기를 오르게 하려면 눈으로 위를 보고 기를 내려가게 하려면 아래를 보면 된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대개가 몸의 위쪽은 기가 성하고 아래쪽은 기가 허해서 아플때는 상기가 되어 아래 위가 교류하지 못하므로 늘 기가 아래로 내려가도록 기 수련시에 아래로 내리는 것이 좋다.

 

 

이러한 상태에서 단전에 관한 명확한 의식집중이 필요하다.

본래 선천의 기는 진폭이 일정하고 순하여 청량함을 주지만 호흡에 의한 후천의 기는 진폭이 크고 일정하지 않으며 거칠고 뜨겁다.

그러므로 숨을 고르는 조식이 필요한 것이다.

조식의 첫번째 과정은 기의 흐르는 방향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기를 아래로 보내되 대략 소변 볼때와 같이 하면 된다.

그러면 더운 열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보통 왼쪽 갈비뼈 아래로 흘러서 단전으로 모이는것을 느낄수 있다.

 

 

단전호흡의 실제적 과정은 대략 3가지 인데 그것은 "입식 - 출식 - 유기"이며 입식은 숨을 들여 마시는 것이고, 출식은 숨을 배출하는것이다.

유기는 요가나 선도에서 말하는 "지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하복부 내지는 전신에 호흡이 출식된 상태에서 잠깐식 숨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에 멈추게 한다.(엄밀히 말해 숨[息]이 아니라 기운을 닫는다는 것이다.)
입식과 출식시에는 호흡을 각성하지만 입。출식이 아닌 상태에서 하단전에 金과 가을의 기운이 일치하는 찰나의 시간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유기"라고 하며 단전호흡의 핵심이다.
이 "유기"의 시간을 명료하게 자각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수련의 셩패를 가름한다.

유기는 또한 기의 경로에 따라 이동 경로를 인식하는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호흡을 하는 가장 큰 전체적 이유는 "소약과 대약"의 재료가 되는 약물을 얻기 위함인데, 올바른 유기경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시간을 호흡에 주시하면 각각의 유기상태가 분리되어 느껴지며 일정 경로를 가진다는 것을 알수있다.

유기상태는 매 호흡마다 다르다.
첫번째와 두번째 호흡, 세번째의 호흡에서 유기상태가 각각 다르다

 

수행에 있어서 하단전이 열리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 수행자는 반복적인 호흡수련을 통해서 첫번째, 양쪽 비공의 호흡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랜 시간 호흡을 하면 오른쪽 비공은 뜨거워지고, 왼쪽 비공의 호흡은 차가워진다.
뜨거운 용광로의 불과 차거운 계곡 사이에서 흐르는 한기를 양비공에서 분명히 느낄수 있게 되며, 이 두가지 음양의 실제적 기운은 즉각적으로 육체적인 활력과 말할 수 없는 신비감에 젖어들게 한다.

두번째, 호흡이 들어와서 어디를 지나서 어디에 가서 멈추어 지는지, 호흡의 정착지가 어딘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매번 들여마시는 숨의 상태는 각각 다르다.

마찬가지로 숨이 나갈때의 압력과 기분도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맛볼수 있는 감각의 종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이때 수행자 는 기본적으로 몇천년 동안을 내려 오는 동방의 전체적인 수련에 대한 기본적인 동경과 갈망이 이루어진다.


호흡훈련중 어느때는 들어온 숨이 일상적인 것과는 달리 단전에 유입되는 순간 하단전에서 극단적인 통증이 발생하는데 점점 다른 부위로 번져 팔, 어깨 또는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굉장히 고통스럽다.

반복될수록 고통은 약화되지만 이런 고통이 어떤 물질적 과정을 거쳐서 일어 나는지 현재로서 생화학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다.

이런 통증은 신체 전부분에 걸쳐서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당황하게 된다.

이런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르며, 이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현상의 전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해서 과연 무엇을 얻게 되는가, 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고통의 과정이 지나가고 어느날 호흡중에 단전에서 매 호흡마다 "氣"덩어리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홀연히 보여지게 된다.
아름다운 빛으로 된 물질이 매 호흡마다 하단전에서 모여지고, 흩어지는 현상을 겪게 된다.

수만번, 수십만번이 매 호흡이 분명히 달라지며 대략적인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지루하고 반복적인 호흡을 하는 동안 심폐의 무리한 사용으로 인하여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이 엉킨다.
이때 재체기나 구토 등이 발생한다.

2) 하단전 부위의 떨림, 진동이 발생한다.
몇분내지 몇십분간 발생한다.

3) 하단전에서 7가지 색깔의 빛구슬이 발생한다.

각각의 색깔을 청, 적 , 백, 흑, 황, 금색, 자색 등이며 이것은 오장육부의 선천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 몸에는 빛으로 된 샘이 있는데 까르마에 의한 뜨거운 막이 평상시에는 가리고 있지만 호흡을 통한 규칙적 각성으로 이 막은 어느날 걷혀지며 지옥과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빛구슬의 상태는 보편적으로 무겁고, 가볍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딱딱하고, 뜨겁고, 차겁고, 전기적인 여러가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 이러한 성질은 분리된 상태이지만 오랫동안 깊고 깊은 명료한 호흡을 통하여 이러한 성질들은 점차적으로 종합되게 된다.


이때 수행자는 비교적 가벼운 의식이 사라진 초선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입정상태에서 말할수 없는 용기와 환희로움과 행복감 등의 의식이 일어나지만, 이것도 올바른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현상일뿐이며 이것에 집착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러한 빛구슬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며 눈을 뜨고 감는 것에 문제되지 않고 주변의 환경과도 무관하게 명백히 보여진다.
대낮에는 태양빛보다 더 밝게,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이럴때 약간의 신비감이 발생하지만, 그러나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조차도 집착하여서는 안된다.

4) 매 호흡마다 새로움과 확장된 감각이 발생하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호흡은 즐거움을 일으키고, 어떤 호흡은 슬픔을 일으키며, 감미로움과 맑고 깨끗한 순수함, 환희심, 청량감, 여러가지 종류의 감각적인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겪는 동안은 수행이 심화되고 있다고 분명하게 자각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결코 불분명한 실체라는 것을 영리한 수행자는 알아차리게 된다.


5) 이러한 과정이 지나가고 많은 비젼이 일어나게 된다.

일반적인 상상력과 공상력의 영역을 분명히 벗어난, 태어나서 한번도 교육 받지 않은 여러가지 다양한 신과 영과 신선에서 부처에 이르기 까지 환상이라 할 수 없고, 실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특수한 화면이 보여지게 된다.

6) 호흡을 하는 동안에 예지력과 신통력을 경험하게 되며 꿈속에서도 미래를 예측하게 되고 생시에도 그날 있을 일이 자연스럽게 예측되는데 이것이 호흡을 통한 소약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이 깊어짐에 따라 예지력과 통찰력이 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인내심 있는 꾸준한 수행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라고도 말할 수 있다.

 

2. 안반수의(불가의 수식관)

안반수의의 말뜻은 안은 들숨, 반은 날숨, 수의는 호흡을 지켜봄에 해당된다.

 

호흡이란 능히 혈맥으로 하여금 두루 돌게 하여 임맥과 독맥이 모두 통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련하는 길은 반드시 폐기하는 것으로 시작의 첫걸음으로 하여, 다리를 포개고 손을 단정히 하며 얼굴을 펴서 온화한 빛이 돌게 하고, 눈은 발을 드리운 듯 아래를 보아, 반드시 신과 기가 배꼽 아래 단전 가운데 머물게 하면 몸의 위쪽에 있는 풍사가 마치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내리듯 흘러내려서 먼저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게 된다.

이 길을 얻은 연후에는 몸이 화평해지고 땀이 촉촉히 나면서 온몸의 모든 맥이 두루 돌게 되니, 곧 마음이 텅 빈듯하여 눈 앞에 백설이 펄펄 내리는 듯 느껴지고 내가 육신에 깃들어 있는지 육신이 내 속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매우 고요하고 아득하여 황홀한 경지가 되어 자신은 이미 음과 양이 나누어지기 이전 즉 태극이 갈리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태식 (태에 있을때의 호흡 :호흡이 있는듯 없는듯하지만 코와 입 사이에는 한줌의 숨이 남아있어야 한다.) 이 능해진 후에는 기가 부드럽고 온화해지고 안정이 되어 마침내 호흡이 없는듯한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화에는 안과 밖, 느리고 빠름이 있다.

수련의 초기에는 기와 혈이 모두 허하므로 폐기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화후가 일어나기 쉽지만 배꼽과 배 사이에 기가 한동안 흩어지지 아니하면 반드시 따뜻한 기운이 그 사이에서 나오게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기혈이 점점 실해지고 화기가 더뎌진다.

 

불가의 수식관이 선도의 조식과 크게 다른점은  사상적인 전개 과정에 있어서 취하는 양상이 상이하다.

 

불교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방식대로 무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우주중심에 들어가 태극을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열반이라 하며 열반에 들기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화두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는 생명의 근원인 의식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응용 한 명상기법이다.

그러기 위해서 의문을 가지고 계속 자신의  근원을 추적해 나가야 한다.

 

불가에서 화두를 들때 단전으로 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상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은연중에 호흡을 이용하여 화두에 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집중에는 기가 발생하고 그 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하는 묵조선에 다음과 같은 수행이 있다.

첫째 조용히 앉을 것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생각을 하지 말것

새째 어떠한 경우에도 졸지말 것

 

이 세가지중 아래 두가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행의 방편으로 무지막지한 요구이다.

묵조선의 경우 졸지 않으려면 절대로 소주천이 되어야 한다.

즉 척추를 따라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온 한줄기 기의흐름에 의하여 신기가 형성되어 졸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소유"를 쓰신 법정스님이 하신 말씀중에서 "수행인은 허리아래로 부터 소식이 있으면 곧 도를 이루게 된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불가의 최대 기공능력자인 "성철"스님 역시 면벽수행을 1년간 하시면서 자리에 눕지 않았다고 한다.

 

선 수행과 선도의차이는 지향하는 바를 달리한다.

불도는 우선 집착을 끊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서 부처가 되는 것이며 이는 거짓 자아를 소멸시킴으로써 이루어 진다.

선도는 한마디로 "신선"이 되는 것으로 이는 축기 나 기의 운용등과 관련되어있다.

불도에서 기는 깨달음을 위한 작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수행중 탈만 나지 않을 정도로만 생각하고 모이던 말던, 흐르던 말던 그냥 내버려 둔다.

만약 기에 마음을 지나치게 두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불도가 아닌 선도가 된다.

불도에서는 신선이나 부처가 되겠다는 집착 까지 없어야 비로소 수행을 시작할수 있는것으로 이는 오직 집착을 끊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수행의 목표를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도와 불도는 그 길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선도적 차원에서 불도를 짐작하는 것은 전혀 가능치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안반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차한 말로 수행법적인 효과를 살펴보며 접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안반수의의 전체적인 과정은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  등으로 나누어 지며 세밀화 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의 본질적인 체계를 이해하는데 있다.
왜 호흡을 하는 것이며 이 호흡수행이 어떤 과정을 경유해서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가에 대한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뚜렷한 이해력이 먼저 갖추어져야 할 요건이다.

1) 수식 :

수식이란 숨을 세면서 들숨, 날숨의 정확한 수를 헤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수를 헤아리는것의 종교적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빈 골짜기에 비가 내리면 열려진 길을 따라 물이 흘러가듯이 올바른 수식이 몸에 익숙하게 되었을때 다음 과정은 자연히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심자의 경우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수행의 효과를 막바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예를들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계속해서 호흡의 숫자를 헤아리는것은 단순한 노동 같고 따분하고 지루하기도 하며 때로는 몹시 힘들고 괴롭기도 하다.

책이나 이론을 신뢰하고 수행하는 경우 절망감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몇년씩 규칙적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은 전통적인 서적에서 말하는 수행과정이 일어나지 않는것에 대한 회의감이 일어나고 능력, 자질, 근기 등에 관해서도 불안해 할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동양의 행법은 시간적인 제한성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초기 과정이 빠르고, 어떤 사람은 종반부터 잘되는 사람 이 있을 것이다.

일률적으로 학교수업 과정 같이 행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수행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각각의 체험과정에 대한 비교의식은 수행에 관한 안목이 깊어지기 전에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수행자가 가질수 있는 마음자세는 몹시 중요하다.

정성을 지극히 한다는 기본적인 조건은 지난 세월의 옛 이야기 같지만 동양수행에 있어서는 모든 부분에 공통되는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수식을 세는 방법은 몇몇 가지가 있다.

일반수행의 경우 들숨, 날숨이 숫자를 헤아리는데 열까지만 헤어린다.
들숨은 1,3,5,7,9.
날숨은 2,4,6,8,10.
순서가 바뀌어져도 안되며 숫자가 남거나 모자라서도 안된다.
숨을 쉬면서 숫자를 헤아리는 의식적인 노력은 잡념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조용한 경우에도 한결같이 행해져야 된다.

이런 식으로 배꼽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호흡시간을 점차 늘려가는 것이다.

 

이 시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몸의 안팎에 여러가지 찬란한 색깔의 빛 이 보일것이며 그밖의 여러가지 형태의 비젼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티벳의 만다라나 차트라를 이해하게 되며, 일반적인 의식세계를 초월하는 경우를 장시간 하게 된다.

이때의 기분은 대단히 유쾌한 것이며, 수행의 신비적인 부분에 마음을 많이 빼앗길 수도 있다.

또는 몸이 안팎에서 프라나(기)가 이합집산 되는 여러가지 형태를 경험할 수 도 있으며 또는 여러가지 영계나 신계를 보거나 듣거나 할 수도 있다.

이때부터 호흡을 규칙적으로 행하는 것 보다는 호흡을 통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내면적인 상황에 마음이 빠질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수행의 진전에 유익하지 못한것이다.
수식을 행하는 동안에 특수한 현상과 신비한 체험을 하더라도 잠깐 보고 말것이며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물론 그러한 비젼들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나 의심이 일어날수 도 있다.

특별한 경우에 수식을 행하는 중 자신의 전생이나 타인의 전생, 미래에 닥칠 일들을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서 정확한 상태로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류의 사람들도 전생에 많은 종류의 선정을 수습한 까닭이므로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2) 상수 :

상수란 수식이 오랫동안 행해져서 마음과 의식이 주의하지 않아도 호흡이 한결같이 행해지며 몸과 마음과 호흡이 서로 어우러져서 벗어 나지 않는 상태를 말함이다.

굳이 가부좌를 틀고 앉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거나 장작을 패고 있어도 호흡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에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호흡이 되며, 호흡을 위해 특별히 정신을 집중할 필요도 없다.

 

이때부터는 호흡을 통한 에너지의 느낌, 경험되지 않던 무의식의 세계가 명료하게 보여진다.

몸의 오장육부가 보여지는 것도 그 한 예요, 오로라가 보여지는 것도, 그 예이며 자연계의 길흉사가 예지되어 지는것도 그 한 예이다.

이때 수행자는 삼매와 선정에 관한 분명한 이해와 존재계 전체에 관한 순수한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몸과 마음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실질적으로 보여지거나 자각될 수 있으며 자연계라는가 행성, 태양계, 내지는 전반적인 우주적 질서와 순환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이루워지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호흡에 모든 의식과 정
력을 쏟아 부어야 하며 꿈속에서도 호흡이 분명하게 각성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수식과 상수를 체험적으로 분명히 구분하기 어렵다.

비록 초보자라도 수식을 행하는 어느 순간에 상수와 가까운 상태를 잠깐씩 맛볼 수도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 시간은 비록 짧지만 10분이 한시간되는 것처럼 반복적인 수식을 통해서 상수라는 거대한 조화는 점차로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수식이 상수를 넘어가는 과정에 호흡상태는 아주 깊고 고요해질 것이며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며 기본적인 소주천이나 대주천 쿤달리니 상태 등등의 현현이 일어나게 된다.

수식과 상수 사이의 여러 과정 중에 실제적인 호흡의 관찰은 아래와 같다.

가) 호흡에 들어가면서 나가기 까지 전체적 압력에 관한 관찰
나) 들어온 호흡과 오장육부에 관한 연관관계 관찰
다) 나가는 호흡이 마음과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 관찰들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홀연히 주시되어지기 시작한다.

 

대상은 이때 분리된 상태로만 존재하며 주관적인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

호흡은 더욱 길어지며 호흡도 의식도 관찰도 주시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세계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수행자의 육체와 정신은 많은 변화를 보게 되지만 이 상태라면 향후 수행에 관한 희망을 어느정도 기대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미 전체적 상태가 다음 상황인 지(止)에 관한 수련을 위한 기본적인 준비과정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3) 지(止) :

지(위빠싸나)란 마음의 동요를 그쳐서 고요하게 갖는것을 말한다.

 

지 수행중 사념처라는 것이 있는데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네 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1) 신념처

자신의 몸과 관련된 현상, 즉 호흡·동작 등을 관찰하여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몸 안팎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육신은 죽어서 썩을 부정(不淨)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2) 수념처

느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감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깨달아 음행·자녀·재물 등의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苦]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3) 심념처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욕심이 있다면 욕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다면 욕심이 없는 참뜻을 알아 모든 마음의 참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4) 법념처

정신적 대상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앞의 세 가지 외에는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통하여 생기는 번뇌의 생멸에 대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안반수의에 있어서 지의 정확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대적정, 대열반으로써의 의미도 있고 과정과 과정사이의 단락적인 지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락적인 의미에서 지의 의미로 마음과 호흡과 의식이 멈춰지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지의 상태란 날숨과 들숨을 통해 여러가지 의식들이 모두 끊어져 숨을 쉬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를 수습한다는 것은 상수를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에게도 어려운 과정일 수 있다.

왜냐하면 체험을 설명하는데 언어가 지닌 한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4) 관(觀) :

관(사마타)이란 일체만물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무수하게 많이 주어진 화두와 같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머리로 해서는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

자칫하면 기가 머리로 상승하여 상기병에 걸릴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스승들은 '배꼽 밑에 두고 관하라'고 권장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만, 마음의 시선을 배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몸과 마음과 기가 평온해지고 화기를 누르게 되면 자유로워진 영혼이 모든것에 해답을 준다고 한다.

 

자연스럽고 올바른 숨멈춤인 지의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 되었을 때 많은 새로운 의식과 에너지가 발현된다.

수식과 상수를 통해서 지의 상태가 경험되어졌다면, 이상태에서 여러가지 과정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하단전에 강력한 에너지가 모일 것이고 이 에너지는 여러가지 형태의 유동성을 지니게 되며, 많은 의식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확실한 관의 상태란 이러한 여러가지 다양성 속에서 집중도 분리도 아닌 주관과 객관이 모호한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를 주시하는 것을 말하며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한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이런 상태는 수식과 상수, 지의 상태를 명확하게 연습한 수행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수행자의 의식은 다만 자연스럽게 그것을 인지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여기에서 부터 인간의 모든 의식이 꽃피어 나지만 이것은 결코 꿈일뿐 진아의 올바른 현현은 아닌것이다.

진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무지에도 속하지 않는다.


5) 환(還) : 

경전적인 의미에서의 환이란 바로 진지(眞知)를 성취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진지란 지 자체로서의 지도 아니며 생멸과 관계하는 지의 의미도 아니다

자아와 존재, 자연계와 우주계 전체의 현실적인 실상이 주객이 끊어진 가운데에서 저절로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어린시절이나 전생의 자신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나타남에 대한 개인적인 이입과 동화가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겪은 선사들은 무(無)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유(有)라고 말했다 한들 어떠하겠는가.

6) 정(淨) :

육체적으로 정의 상태는 호흡에 관한 의식과 작용이 끊어지는 것 을 의미한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서 우주도 나도 없는 모든 것이 적멸한 상태이다.

푸른빛만 있거나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공간 또는 회오리 같은 태극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의식이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편의상 열반이라고 이름하며 법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은 안반수의에 있어서 전체의 의미이며 진공모유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름이다.

 

 

 

11. 쿤달리니 명상

 

힌두교 : 힌두교는 아트만(진아) 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되는 수행을 하는 것이고,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방식대로 "무아의 선언"을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명상을 아무나 할수 없다.

그러한 고행은 특정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할수 있으며 그 이유는 전생의 업(카르마)때문이다.

이들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1~25세까지 학업을  하고, 25~50세까지는 결혼하여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며,  51세가 되어야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버리고 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가 소유한 모든것을 버릴때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것이 힌두교의 사상이다.

 

 차크라

차크라는 산스크리트 어로 '바퀴'  혹은 '원형' 을 의미한다.

선도 수련에서의  '단전' 과 같은 개념 이다.

한마디로 인체의 프라나(prana) 또는척추에 자리한 것으로  기(氣)에너지가 모이는 장소(기맥)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체에는 모두 7개의 차크라가 있다.

 

1차크라 - 항문과 생식기 사이 [ 생명력과 성에너지 ]--------회음-------------붉은색(후각)----물라다라 차크라

2차크라 - 척추 맨 끝 꼬리뼈 [ 성과 창조의 에너지 ]---------단전-------------분홍색(미각)----스와디스타나 차크라

3차크라 - 배꼽뒤 척추 내벽 [ 신체의 소화,동화작용 담당 ]---위장-------------노란색(시각)----마니푸라 차크라

4차크라 - 심장 뒤의 척추 내벽 [ 인간적인 자질과 정서 ]-----심장-------------초록색(촉각)----아나하타 차크라

5차크라 - 척추 내의 목 부위 [ 정화와 조화의 에너지 ]-------경동맥(인중)------하늘색(청각)----비슈다 차크라

6차크라 - 두뇌 중앙의 뇌간 [ 영혼의 자각과 지각 ]---------송과선(양 미간)---파란색(마음의눈)----아즈나 차크라

7차크라 - 머리끝 정수리 [ 육체,감정,영혼의 완전한 통합 ]---정수리-----------보라색----사하스라라 차크라

 

각 차크라는 육체와 정신의 각 영역을 담당한다.

위로 올라갈 수록 낮은 단계의 육체적 수준에서 고도의 정신,영혼적 수준으로 발전하며 7차크라를 열었을때는 신선이 된다고 한다.

 

만트라

석가의 깨달음이나 서원(誓願)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들(진언)을 의미한다.

선을 일으키고 악을 누르는 힘을 뜻하는 것으로서, 비교적 짧은 주를 진언, 긴 주를 다라니(陀羅尼)라고도 한다.

 

수트라

물건을 꿰매는 데 쓰이는 '노끈'이라는 뜻으로 간단히 설명한 규칙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석가가 설교한 교법을 후세에 전하는 문장· 어구를 의미한다.

 

탄트라

힌두교·불교·자이나교 등의 종파에서 하는 밀의적 수행법 또는 그 수행법을 담은 경전을 말한다.

꼬리뼈에 있는 샤크티를 일깨워  정수리의 시바와 만나게 하는 수행법으로 쿤달리니와 같으나 남녀교접에 의한 수행을 포함한다.

 

샤크티

샤크티신은 힘, 능력을 뜻하는 최고의 여신이다.

사람의 꼬리뼈를 상징하며, 각 영혼의 신체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힘이라고 여겨 이것을 깨워 일으켜야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나디 

에너지가 흐르는 신체의 관모양의 기관으로 한의학의 경락의 이치와 비슷하다.

 

수슘나(Sushumna)

척추의 중앙을 타고 흐르는 기의 통로이다.

생명에너지인 프라나(prana)는 수슘나를 통해 상승과 하강을 한다.

수슘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핑갈라(Pingala)의 양의 기운이 흐르고, 왼쪽은 이다(Ida)의 음의 기운이 흐른다.

프라나는 이다와 핑갈라를 나선형으로 번갈아 상승,하강 한다고 한다,

쿤달리니

척추의 기에너지 통로인 수슘나를 따라서 정수리까지 기에너지가 올라가는 현상으로 또아리를 튼 뱀으로 상징된다.

쿤달리니는 건전지이며 나디는 건전지에 연결된 전기선이라고 이해할수 있다.
  

요가의 종류

 

바크티요가(Bhakti yoga)        감정순화에 의한 獻身의 요가

지나나요가(Jnana yoga)        이성 개발에 의한 지식의 요가

라자요가(Raja yoga)             심리적 통제에 의한 심신과학의 요가

카르마요가(Karma yoga)        사회활동에 대한 행동규제의 요가

탄트라요가(Tantra yoga)        욕정통제에 의한 육신해방의 요가

하타요가(Hatha yoga)            음양조화에 의한 심신조화의 요가

쿤달리니요가(Kundalini yoga) 신경력을 단계별로로 개발하는 요가

만트라요가(Mantra yoga )      발성통제를 통한 요가

1) 쿤달리니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종교 및 수행 과정에서 나오는 가장 핵심적이고 실제적인 종목이며, 인간에게 잠재된 초월적, 신비적 에너지로서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성되지 않은 상태로 잠들어 있다.

이 에너지가 어떤 수행을 통해 깨어나면 활홀경을 겪게 되고 비젼을 보게 되어 그 사람의 몸과 마음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쿤달리니의 힘은 지구 중력과 상대되는 것으로서 위로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의 교주나 성자들이 누린 초능력 내지는 신통력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이다.

이 쿤달리니의 각성법은 여러가지 조건으로 각 종교의 비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이다.

 

쿤달리니를 상징하는 상징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처에서 수없이 찾아볼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상이나 선악과나무를 휘감고 있는 뱀, 힌두교의 춤추는 시바상, 히포크라테스의 문양, 불상 머리의 육개상, 용의 승천, 샤아마니즘의 신수 등이 바로 이 쿤달리니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이 쿤달리니 힘의 전체적인 메카니즘은 인간의 꼬리 뼈에 잠들어 있는 성력(성 호르몬)이 어떤 방편을 통해 깨어나 척추를 타고 각 에너지 센터(챠크라)들을 거쳐서 정수리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이 에너지가 정수리에까지 이르면 두뇌활동이 활성화되고 일반인들에게 사용되지 않는 두뇌의 여러 부분들이 깨어나서 활동하게 되어 초자연력의 발현과 삼매를 체험을 하게 된다.

옛부터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성자, 신인, 진인, 초인, 붓다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시키기 위한 수행법은 지금까지 한번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그 문헌도 매우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상징을 통해 전해져 왔기 때문에 마치 쳐다만 볼 뿐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강물처럼 인상지어져 왔다.


쿤달리니란 인간 내적 기관에 잠자고 있는 무한한 잠재적인 힘이며 쿤달리니 에너지의 출발 위치는 미골(회음: 항문과 성기사이)이다.

여성신체의 경우에는 자궁경부에서부터 그 에너지가 출발한다.
전통적 요가수행의 용어를 빌리면 물라다라 챠크라로 총칭된다.

물라다나 차크라를 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숨을 마시면서 항문을 단전까지 끌어당기듯이 쪼으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숨을 멈추고 여덟까지 수를 세고 다시 이완시키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 회음부위가 활성화가 되어 다음 수행으로 넘어갈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지라도 보통사람들 누구에게나 그 힘은 미미하지만 작용되어지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미 기경 팔맥은 존재하며 사람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쁨, 공포, 깊은 슬품, 충격적인 감정일 때 전율이 온다.

이러한 전율 또한 쿤달리니 에너지의 발현이다.

폭탄을 깨뜨리거나 강하게 압박한다고 해서 터지지 않는 것처럼 쿤달리니라는 것도 동면하는 에너지인데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뇌관을 때리는 작업  즉 불가, 선도, 또는 요가적 기법이 당연히 필요하다. 
선도, 도장서적에서는 「규」와「만」. 즉 항구라고도 표현해 놓았다.
항구에 배가 드나들듯이 이 구멍에 물이 들락날락한다

항구에 물이 들어오면 그 물을 막바로 상승시키지 않고 일단 미려에 가둬야 한다.

 

선도에서 말하는 축기와 같으며 쿤달리니에서는 이것을 기체로 변화 시켜 재구성 시키는 과정이 있다.
발기했을 경우 섹스의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쿤달리니 에너지의 출발점인 회음으로 간다.

그 발기된 에너지가 사정되지 않고 오래 지나가면 몸이 자연히 건강해 진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할 때 노수에 잠자고 있는 일곱개의 챠크라를 모두 차례로 깨어나게 한다.

챠크라는 구체(원형)로 형성되었을 때 정확하게 챠크라라고 부른다.

마치 복숭아 씨앗이 완전히 복숭아로 되었을 때처럼 잘 익은 챠크라가 된다.

그래서 호흡하는 사람이 복부나 미간에 황금빛의 구슬이 보이는 것이 정확한 챠크라가 형성 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을 때는 두뇌의 개화가 마치 동면하던 꽃이 피어나듯이 잠자고 있던 두뇌 영역이 서서히 개화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올라갔을때 뇌의 뒷면 우측이 폭발되면 그것은 감성적인 에너지로 발달되고 뇌의 좌측이 폭발되면 이지적인 에너지로 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을 때 우리가 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폭발로 일어나서 실제 요가에서 말하는 천개의 꽃잎이 개화되는 것을 말한다.

아주 미묘하고 황홀하게 아름다운 꽃들이 어떤 사람은 미려부에서 또는 가슴, 두뇌 등에서 계속해서 꽃이 피었다가 졌다가 한다.

실제적으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런 향기는 도교의 경전에도 구체적으로 향의 이름까지 나온다.
꽃이 반드시 피어야, 이것이 올바른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이다.

 

이것은 현재의식도 꿈의 상태나 무의식도 아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음과 에너지의 복합상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초기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물라다라 챠크라(회음)에만 쿤달리니가 잠재되어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각기 진화의 정동에 따라서 일곱개의 챠크라에 조금씩 잠재되어 있거나 각성되어 있다고 말 할 수있다.

 

만약 물라다라챠크라와 스와디스타나챠크라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모여 있다면 그 사람은 다분히 성적욕구가 충만한 성적인 사람일 것이며, 만약 마니푸라에 있다면 운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아나하타에 있다면 예술에 관심이 있을 것이며, 비슈다나 아즈나에 있다면 이지적인 것에,  사하스라라에 있다면 종교적인 것이다.

만약 그가 성적이거나 운동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이지적이거나 종교적이라면 모든 챠크라가 각성되어 있는것이며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다.
실제 각각의 챠크라가 각성되었을 때 꽃이 피어나야만 한다.

개화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다.
사하스라라가 열리면 새로운 의식이 생겨난다.

 

모든 챠크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의식이 열린다.

우리의 의식은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의식이라고 말할수 없다.

쿤달리니란 신비적이거나 잠들어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휴면하고 있는 에너지가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즈나를 각성시키는 것이다.

럭비나 축구선수는 마니퓨라가 발달되어 있다.

일반적인 생활도 쿤달리니와 무관하지 않다.

무료한 산책에서 매혹적인 아가씨가 지나가면 물라다라에 약한 충격이 주어진다.

일반인의 경우에 있어서 음악을 하거나 시를 쓰는 사람은 아나하타가 다른 챠크라 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사하스라라가 개화되지 않은 보통 사람은 독립적이지 못하다.

감각에 주로 의지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각에 종속된 의식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주위의 영향에 따라 국부적으로 강력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정도에 따라 처음에는 몇십가지, 몇백가지, 몇 천가지 의식이 형성되며 비젼이나 신비감이 느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감각의 변형일 뿐, 그것은 수행상의 낭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곧 알아 차리게 된다.

 

단전에 빛이 보이면 소약이라고 착각한다.

머리속에 꽃이 피면 비전에 취하지만, 이것에 취해서 동일한 감각을 반복하면 이것은 세월이 지나갔을 때 수행자에게 덧없는 실망감을 안겨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선도책에는 빛의 구슬이 보이면,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기술해 놓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으로 이런 과정은 무수히 많다.

박사과정의 열배, 백배, 천배에 해당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 구체적인 과정이 뚜렷하고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면 그 책의 저자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안다". 이런 말은 애매모호한 말이다.

2) 쿤달리니 각성 형태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어 각각의 챠크라가 열리면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독심술, 예지능력 등과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자신의 꿈이 구체적인 현실로 일어나게 된다.
예언, 영감에 찬 시, 천계의 음악 등을 듣게 된다.

쿤달리니 각성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전생을 명료하게 볼수도 있으며, 정확한 꿈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기존 종교의 진언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옴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다.

안반수의 호흡법의 형태는 아즈나챠크라를 각성시킨다.

 

어떤 사람은 꿈을 맞추고 타인의 길흉을 이해하기도 하며 본인과 타인이 전생을 보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도 없다.
사람들마다 성향이 다 다르다.

에너지의 개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진화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란 산스크리트어로 동굴 또는 코일을 의미한다.

 

쿤달리니란 동굴 깊은 장소등을 의미하는 쿤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도랑을 파거나 구멍을 팔때도 쿤다라고 부른다.

쿤다는 두뇌에 어떤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잠자는 뱀을 상징한다.

뇌의 주름을 쿤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쿤달리니가 잠 잘때는 샥티의 힘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발현될 때는 두르가, 락시미 등으로 불린다.
어떤 때는 실제로 꼬리뼈에서 뇌로 까만색의 뱀이나 파란색의 뱀이나 여러가지 색깔의 뱀들이 실제로 꼬리뼈에서 부터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것이 쿤달리니 현상의 정확한 전조이며 어떤 경우에는 전설적인 동물인 용이 보여지는 수도 있다.

용이 꼬리뼈에서 뇌로 상승한다.

 

쿤달리니 각성시 보여지는 뱀은 일반적인 뱀이 아니다

마치 호랑이가 영물이라든지, 신선들과 같이 등장하듯이 뱀은 쿤달리니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

많은 수의 수행자들의 눈에 대낮에 뱀의 형상이 보여지는 것이 실제의 현상이다.

사람들이 뱀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쿤달리니에 대해 두려워 하는 것, 뱀이 용이 되는것, 뱀이라는 동물에게는 거대한 진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호랑이나 여우나 이런것은 오래살 수 있지만 승천하거나 진화하는 경우가 없다.
처음에만 쿤달리니 에너지가 수직으로 상승을 하지만 나중에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경우, 수평으로 회전할수도 있으며 짧은 순간에 다양한 회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 뱀 문양이나 뱀이 있을 때 신비적인 의식에 잘 들어갈 수 있다.

고대의 수도승들이 뱀을 문양으로 많이 사용하고 갖고 다니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가 쿤달리니 수행에 조예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물과 불의 세례는 이다와 핑갈라의 기도를 여는 것을 말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말하는 모든 영적인 삶은 쿤달리니와 연관되어 있다.

니르바나, 해탈, 모크사, 구원, 깨달음 이 모든것이 쿤달리니와 연관되어 있다.

3) 쿤달리니의 각성 방법

깊은 쿤달리니의 수행으로 들어가려면 상당히 많은 정도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개인적으로 발현하게 되는데 단순한 에너지에 의한 쿤달리니 각성이라면 별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정신적이거나, 영적으로 변환 되었을 때는 최소한 동양의 종교들에 관한 종합적인 통찰력이 어느정도 각성 된 후에야 깊은 쿤달리니 수행의 의미가 있다.

 

호흡 등을 통해 쿤달리니를 계속하다가 그것이 깊어졌을 때 일반적인 종교의 이해력이 깊지 않은 사람은 정신적인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현상은 하다가 그만두면 되지만 모든 고정관념이 뿌리채 뽑혀 나갈 때 겪는 정신적 충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쿤달리니를 들어갈 때는 쿤달리니 천계 혹은 성중의 지도를 받는 비젼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쿤달리니 에너지의 체험을 이야기 할때 많은 사람들이 지복이나 축복감을 말하지만 그것은 처음의 경우에만 그렇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과 체력적인 면이 견딜 수 있는 한 까지 그렇다.

그 사람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신의 에너지로 바뀌어 가는 경우에 육체적 정신적 많은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어떤 운동선수가 기록을 갱신하기 위한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사람도 있다.

타고난 체력을 지닌 사람은 심한 운동을 해도 거뜬하게 견딜수 있지만 보통사람은 근육통을 느끼듯이 부작용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쿤달리니 각성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번째 방법

탄생과 더불어서 오는 것이라서 일반인들은 이런 것을 통해 얻을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쿤달리니가 각성이 되는데 쿤달리니가 각성된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결국 탄생의 시기부터 고도한 기능이 활성화된 것이다.

예수가 늘 강조했던 "거듭나야 한다"는 말도 이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어떤 아이가 완전히 쿤달리니가 각성된 상태라면 그 아이를 성자라 부를 것이다.

만약 완전히 쿤달리니가 각성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아바타르나 신의 화신으로 불러질 것이다

 

십대 사춘기 청소년의 경우 꼬리뼈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우는 요즘 사회에 드물지 않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 들은 쿤달리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것이 나이가 든 후에는 매우 발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가치관도 없고, 그러한것에 관해 말해주는 사람이나 책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해 버리고 묵살해 버린다.

몽고반점, 꼬리뼈 부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 특이한 사람 도 있다,

보기 흉할 정도로 튀어나온 사람이다.

몽고반점이 있는 것은 쿤달리니가 많이 퍼져있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은 쿤달리니 소질을 많고 갖고있는 물질문명 속에 파묻혀 이것이 묵살되어 왔으므로, 그것을 발현시키는 사회적 인식이 중요하다.

우리민족은 할아버지가 아이들의 꼬리뼈를 만저보고 이 아이가 장수 할 것이라는 것을 점쳤다.

영재 교육이야 말로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상태라면 매우 완숙미를 갖는 형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런 제반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런 모양이다라고 단순히 넘길 수 있다.

가령 꼬리뼈가 뜨겁다거나 가끔 이런 상태에서 꼬리뼈를 생각하면 힘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쿤달리니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날때부터 쿤달리니가 각성된 아이는 매우 사색적이고 전반적인 삶이 진화된 상태로 펼쳐진다.

이런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의 부모들은 단지 탄생의 통로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런 아이는 부모들과 더불어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20세 인전에 스스로 머리 깍고 출가하는 청년들이 있는데, 이런것도 잠재적인 쿤달리니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아이가 부모들과 더불어 산다해도 그는 단지 자신을 손님처럼 생각하는 경우이다.
소풍을 가더라도 가족들과 따로 떨어진다.

술집 아가씨들 중에서도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성장기에 극단적인 성의식으로 흐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태어날때 부터 발달된 극단적으로 감성적인 이런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꽉 짜여진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학교생활 같은 것을 견딜수가 없다.

그래도 스슘 나가 열린것은 괜찮다.

그러나 핑갈라 또는 이다, 특히 핑갈라가 열린 사람은 도저히 짜여진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집안이 부유한데도 도벽이 있거나 이상성격의 사람들, 과대망상증, 이런 사람들이 그 예다.

오래된 범죄벽을 갖고 있는 사람, 한쪽은 좋은 쪽으로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흐르고 한쪽은 각 챠크라가 단절되고 불균형적인 상태에서 에너지가 흐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진화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뇌를 오랫동안 사용하며 이지적인 활동을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은 뇌에 전기 에너지가 많다는 것이다.

 

쿤달리니는 바람이다.

처음에는 물과 불과 전기적인 형태이지만 나중에는 바람의 형태로 슉슉하고 흐른다.

물을 불로 끓이면 기체가 된다.

전기적인 코드를 통해서 필요한 곳에서 그 바람을 기화시켜 버린다.

바람안에 무수한 에너지가 있다.
왜 무심이 되는가?

쿤달리니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소라면, 일반 육체 기관은 화력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뭔가를 태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미 본능적으로 기화를 알고 있다.

성적인 욕망이 충만되어 있을 때 몸의 상태는 탁하고 둔하지만 섹스를 통한 뒤에는 뭔가가 연소된 뒤의 가벼움과 상쾌함을 느낀다.


태어날때부터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달된 아이는 매우 성숙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는 점점 자기 자신의 사명과 삶의 목적을 서서히 자각하게 된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요기나 각성된 아이를 낳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초월적 존재나 지고한 존재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이다.

두번째 

만트라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만트라를 자주 암송하면 뇌의 한부분인 림프계가 공명을 하여 신경계에 영향을 준다.

결국 막힘이 없는 우주의 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움 마니 반메훔 (불자)

오움 샨티 샨티 (우주의 진리)

오움 예수 데바야 (기독교)

오움 싯다 차리야(깨닫음을 위해)


쿤달리니뿐만 아니라 소주천, 대주천, 양신수행까지도 만트라를 통해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파워풀할고 부드럽고 위험부담이 없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와 수련이 필요하다.

만트라를 통해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려면 첫째 요가나 탄트라를 아는, 선정으로 이끌수 있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 스승이 적합한 만트라를 주기 때문이다.

 

만트라를 끊임없이 수련하면 고위 에너지를 점점 개발하게 되며 일반인들과 다른 고도의 선정과 삼매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그 파장이 끝까지 전달되듯이 만트라를 반복 하면 소리의 힘이 순간순간 뭉쳐져서 우주의 바다, 영혼의 바다에 큰 진동을 낳게 된다.

여러분이 만트라를 백만번, 일억번 반복하게 되면 뇌 속의 모든 영역에 스며 들어서 모든 체들(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을 정화하게 된다.
만트라는 각 챠크라에 진동을 일으킨다.

만트라를 수행하면 쿤달리니가 아주 체계적으로 완성된다.

이 만트라를 호흡과 조화시켜서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숨을 멈춰서 하고 들이마시면서 하거나 내쉬면서 하기도 한다.

만트라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가 물라다라에서 결집되어 쿤달리니 가 발현된다.

세번째 

타파사(고행)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고행이란 정화의 한 방법이다.

쿤달리니 수행을  오래하면 인격적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호흡수련이나 기공테크닉과 근본적으로 틀린 점이다.

올바른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생했을 때 3년에서 5년 사이면 그 사람은 어떤 신비적인 한 부분에서 특수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타파사는 무의미한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쁜 습관을 없애고자 할수록 그 나쁜 습관은 더욱 더 달라붙게 된다.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뭔가를 바꾸려고 할 때 그 습관은 꿈의 형태로 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쿰박(호흡의 멈춤)호흡을 강하게 하는 것이나 요가를 통해 수련에 용맹정진하는 것이 바로 타파사이다.

이것은 구도중의 나약함이나 의지를 방해하는 습관을 근절시키는 방법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쾌락이 삶의 제일원칙이라고 부르짖으면서 사는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타파사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물질 문명의 즐거움이나 안락 호화로움 따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이 만족되면 오히려 우리의 뇌와 감각체계는 무척 약해지고 우리의 의식이 퇴행되고 제한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촛점이 맞추어진 타파스는 폭발력을 강하게 얻을 수 있다.

이런 타파사 수행의 초기에는 약한 에너지가 나타나지만 수련이 계속 될수록 일반인이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파워풀한 에너지가 발현된다.

강한 폭발력이 있는 쿤달리니란 외부 세계의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이다.

네번째 

약초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네번째는 특별한 약초를 사용한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아사디라고 한다.

식물도 쿤달리니 체계로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사디는 마약의 의미로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아사디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데 가장 빠른 방법 중에 하나인데 극히 제한된 소수인들에게만 그렇다.

육체의 기질을 변형시키는 일단의 식물이나 동물(녹용)이 있다.

이 식물의 특수한 요소가 부분적으로 쿤달리니를 각성시키게 되지만, 이 약초들은 스승이나 엄격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안된다.

부작용이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약초는 선택적으로 이다와 핑갈라를 급격히 각성시킴으로써 정신적인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

고대 인도이 베다 문헌에 보면 소마사라고 불리는 물질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소마는 칠흑같은 어두운 그믐날에 선택해서 뽑은 칡넝쿨로부터 축출된 쥬스이다.

이것을 마시면 비젼을 보게 되고 의식의 각성이 일어난다.

페르시아인들은 호마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미나 아프리카는 이런 성분을 지닌 버섯을 알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마리화나나 하시시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영적인 각성상태를 줄수 있다.

세계 각 지역에서 여러 시대에서 이와같은 식물을 정확하게 잘 사용하게 됨으로써 정화된 구도자는 성스러운 존재들을 볼 수 있고, 영계 선계를 볼 수 있다.

유체 또는 아스트랄체를 이탈시킬 수 있다.

물론 이런 경험은 환상적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실제 상황을 볼수 도 있다.

그래서 삼마디로 몰입할 수 있게 되고, 쿤달리니 각성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같은 상태에서는 인간의 성적인 본능이 완전히 제거된다.

아사디를 통한 쿤달리니 각성은 물의 흐름이다.

 

다섯번째 

라쟈스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심리를 개발함으로써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하는 방법으로서 우주적 초월의식과 더불어 개인의 의식을 몰입 시키는 방법이다.

마음의 집중을 통해 각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마음을 집중하려고만 한다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프라나야마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물이나 불은 폭발할 기운이 없다.

강한 폭발은 전기를 통해 일어나는 각성이다.

복근 호흡연정관은 쿤달리니를 일으키는데 불을 준비한다.

쿤달리니 각성의 정석은 강한 열이 발생하고 나서 물이 기화되고 다음에 전기적인 형태와 만나 방전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하루종일 전기적인 전율과 몸의 1미터 반경내에 전기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하루종일 느낄수 있다.

 

대쿤달리니는 우주적인 자장의 합일상태이다.

소쿤달리는 인체 내의 전기에너지가 순환되는 것이다.

호흡 수련을 하는 도중이나 프라나 수련 도중에 얼마간은 강한 에너지의 순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이렇듯 에너지가 순환되는 상태에서 수행자가 프라나야마 수행에 특징적인 여러가지 좋은 상태들을 경험할 수 있다.

온몸에 에너지가 충만하다거나 특이한 프라나들로 인해 여러가지 우수하고 신비적인 실제 에너지의 상태를 맛볼 수 있는데 이러한 상태가 어느날서부터 갑자기 전신의 기운이 떨어지거나 항상 졸립고 피곤하며, 삶의 의욕과 생기가 한꺼번에 사라질 수도 있다.

프라나야마를 오래 수련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상태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으면 이때 수행자 자신은 어리둥절해질 수가 있다.

수행자는 프라나야마를 통해 신비와 경이를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상태에서 수행자의 수행에 관한 의지와 신념에 부정적인 의식이 발생 할 수 있으며 좀더 심한 경우 심신이 피폐해지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프라나야마의 기법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 선도에 경우에 있어서 수행자가 일반적인 조식의 형태를 오래 수행하다보면 용호비결의 어떤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여러가지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하루에 대변과 소변을 각각 15회씩이나 본다.

입안에 엄청나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덩어리가 코와 입안에 고이게 된다.

복부에서 좌엽을 통하는 과정에 길을 걷다가 실신할 정도의 심한 고통이 일어난다.

이런 것은 맥이 열릴 때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당황스럽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고통이 수주일 씩 갈 수도 있고 몇시간에 그칠 수도 있다.

선맥은 별로 부작용이 없지만 나머지 맥이 열릴 때는 갑작스런 고통의 상태가 발생한다.

육체적인 통증은 주로 쿤달리니 통로인 미골이라든가 옥침 아즈나 챠크라에서 강한 고통이 발생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육체적인 통로를 뚫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고통스런 것이 아니고 그 고통이 끝날 경우에는 세상이 모든 쾌락을 한데 몰아다 놓은 듯한 환희심, 고급한 선정감 열반락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깊은 법열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마약보다도 수십배 강한 강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자잘한 쾌락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다시 앞의 상태를 경험 할 수 있다면 뼈를 태우는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 것이다.

깔리상태가 있다면 두르가도 존재하듯이 고통은 언제나 황황홀홀한 쾌감을 숨겨 놓고 있다.

 

일곱번재,

크리야 요가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사트빅 피플들은 라쟈 요가를 통해서도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시킬 수 있다고 한다.

쿤달리닌 수행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이것은 도덕성이다
도덕성에 따라서 질 좋은 에너지가 발생할 수도 있고 고통스런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

의식이 깨끗하지 못하면 혈액도 깨끗한 것이 형성되지 못한다.

나쁜 일을 했을 때 사람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이다.

선행을 했을 경우 기분이 좋은 것은 보너스로 나디가 열리는 것임으로 부분적인 쿤달리니를 경험하는 것이다.

쿤달리니가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선행과 악행의 결과가 일반인 보다 금방 작용한다.

 

백낙청거사가 중국의 도림선사를 찾아가서 불법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제악막작 중선봉행이라 했는데 이말은 곧 악업이 없고 선업이 많을 수록 쿤달리니 부작용과 고통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쿤달리니는 카르마나 박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모든 요가보다 쿤달리니 요가가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가령 악업이 많다면 챠크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고도의 신비체가 발생할 수 없다.

쿤달리니가 열린 사람은 이 인과원리를 육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
다.

이런 수행의 성취는 막행막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반인이 쿤달리니 수행에 있어서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다.

탄트라 수행에 여자가 사용되어지는 경우와 술과 마약이 사용되어지는 부분, 육식을 사용하는 부분도 있다.

이런것은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이것이 적법한지 여부를 명료하게 생각해본 연후에 취해야 한다.
방편상의 문제까지도 말이다.

 

왜 고통이 일어나는가?

이다, 핑갈라, 슈숨나의 기도가 막혀있는 것은 과거 악업에 의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쿤달리니를 여는데 몇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수도 있다.

꼭 하타요가를 10년씩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박티요가나 쿤달리니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훨씬 빠르고 부작용이 없는 경우가 있다.

쿤달리니의 수행을 하기전에 사람들이 먼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광대하고 훌륭한 서원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설령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수행의 어떤 궁극까지 열반이나 성불이라든가 아니면 등선이라든가 범아일여(대쿤달리니) 등을 얻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의식을 통해서 전체적인 나디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화두를 깨우쳐서 선맥이 열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쿤달리니 에너지 각성을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수행을 전문적으로 할 때 그 사람이 인식하기도 전에 각성되는 수가 있다.

가령 화두선에 깊이 들어 가더라도 그 사람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자연스럽고 아주 쉽게 열릴 수 있다.
 

여덟번째,

탄트라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탄트라궁극의 경지는 자신안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통합시키는 내면의 결혼이다.

우리의 척추맨끝에 자리잡은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여신 샤크티가 척추를 따라 상승하여 우리의 제 3의 눈(정수리)에 자리잡은 남신 시바를 만나는 과정이 우리몸  내면의 결혼식을 통하여  깨달음과 지복의 엑스터시를 얻게되는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정액의 양이 지금보다 두배만 된다면 쿤달리나 수행이 신비하거나 어려운 수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보편화된 기술 일 것이다.

탄트라를 통한 쿤달리니 에너지 각성은 가장 쉽고 차원이 낮기 때문에 재일 빨리 얻을 수 있다.

수십가지 쿤달리니 에너지의 종류에서 가장 낮은 상태의 쿤달리니 에너지를 가장 빨리 얻을수 있다.

챠크라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물라다라챠크라가 가장 많이 발달한 사람은 물라다라 쿤달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쿤달리니 수행에 있어서 왕도를 정의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무수히 많은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쿤은 반드시 맑은 물이 흐르고 깨끗한 나무숲 속에서 배워야 한다.

그 사람의 나다가 가장 많이 열려진 상태에서 배워져야만 질 좋은 프라나가 흘러들어 온다.
성적인 쿤달리니는 노이로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탄트라적 방법은 매우 과학적이다.

쿤에너지라는 것은 정액이 기체화되어져서 그 기체의 진행 과정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통칭해서 쿤달리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에 있어서 중요한 선결조건은 정액이 쿤달리니 수행에 있어서 어떤 역활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점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쿤달리니가 열린 상태에 있어서 수행자는 두가지를 체험할수 있다.

첫째 프라나야마를 오랜 기간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은 정액의 변화를 느낌으로 알수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액의 양을 성선 속에서 적게 하거나 많게 하거나 어느 한곳에 집중시키거나 분산시킬수 있다.

이런 것은 의도적으로 훈련하기 보다는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때 수행자가 정액의 변화를 알게 되면 이것은 쿤달리니의 전체적인 어떤 기능을 이미 습득한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 똑같은 프라나야마를 했을 경우에도 안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과정의 불충분함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실제 쿤달리니가 발생했을때 정액이 일분안에 거짓말처럼 뇌로 전부 기화해 가는 현상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정액의 흐름이 왕성할때 수행자가 쿤달리니 수행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와같이 쿤달리니수행은 그 사람의 정액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정액이 탁해지면 의식도 탁해진다.

편두통의 경우 쿤달리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노이로제 등 신경계와 관련된 병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완전한 치료는 현대 의학보다는 쿤달리니 요가 수행이 확실하다.


쿤달리니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미리 알아 놓아야 한다.

꼬리뼈에서 발생된 약을 척추뼈 어디에다 두고 그것을 단련시켜야한다.

무작정 뇌로 올려서는 안된다.

그것도 체질이나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열때 처음에만 머리까지 일률적으로 올리지만 이후 수행에 따라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몇십번정도는 이것을 완전히 체험하고 나서 나디를 완전히 열어논 뒤에는 순서가 완전히 바뀌어 질 수 있다.

 

콩팥이 약한 사람은 발로 내려가는 신경이 약하다.

그때는 낮은단계의 수련을 더 해야한다.
하위챠크라의 성격인 사람은 아즈나챠크라로 쿤 에너지가 가서 오랜시간 정체되어야 하고 , 지성적 사람은 물라다라챠크라 또는 스와디스타나챠크라로 가야 한다.

또 아나하타챠크라 부분이 빈약한 사람은 협척혈 부근에 그것을 정체시켜 두어 야 한다.

리드미칼하게 그 위치선정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실제적인 체질과 성격 또는 기질이 변하게 된다.

 

정적인 사람이 동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으로 등등 이런 물질적인 구조의 변 화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또 나디 수행의 경우 그 사람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차겁고 조용하다면 그사람은 「이다」나디가 발달되어 있으므로 「핑갈라니다안」꼬리뼈의 우측부 분에 촉감적으로 섬세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외향적인 사람은 좌측의「이다」나디 부근에 실제적인 집중을 해야하며 쿤달리니 기도에 불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물이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

이런 것은 프라나야마의 수행에서 좌우 비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약 물 불의 조정이 잘 안되면 한쪽 비공을 막고 자면 된다.

무아와 무심, 무념, 무위 모두 다른 상황이다.
무아라는 것은 나 전체가 비워진다 또는 모든 챠크라가 열려졌다 라는 의미이다..

쿤달리니의 종착역은 무아이다.

이것이 왜 일어나며 왜 해야하는가?

그것은 쿤달리니 수련을 처음 시작할때의 목적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체내의 나디는 반드시 세가지 종류가 있다.

오르는 것과 내려가는 것과 평행으로 순환하는 것이 있다.

이런 것은 초보수행자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조용히 쿤달리니 수행을 하게되면 이러한 움직임을 느낄수 있다.

 

너무 무리한 쿤달리니 수행으로 인하여 일반적인 신진대사가 깨어졌을 경우에 그때 일곱개의 챠크라의 원초적인 형태인 발로 내려간다.

장자의 책에 진인은 발뒷꿈치로 호흡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데 일곱개의 챠크라는 한의학의 경혈에 의거한다.

한번 발로 내려갔다가 다시 회음으로 올라올 때는 일곱개의 챠크라를 활성화시키는 어떤 요소를 갖고 올라온다.

깊은 신경계의 이완이 일어나고 깊은 휴식을 경험한다.

발로 내려가면 사념의 작용을 쉴 수 있다.

이때 뇌가 비어지는 경험을 한다.

고혈압도 내려간다.

심장이 쉴 수 있다.

열도 식는다.

이것은 성적인 열보다 더욱 의미있는 열이다.

 

쿤달리니 수행에 있어서 수행자의 에너지가 넘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자만해서는 결코 안된다.

무수하게 화려하고 다양한 신비적이고 깨끗한, 전설적인 순수한 에너지 형태들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쿤달리니 초기과정의 부분들이다.

설령 모든 종교의 신들이 다 나타날수도 있고 수만년, 수십만년 수백만년전의 고대의 신들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다.

 

챠크라라는 것은 별과 가장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

우선 챠크라를 각성할수 있거나 쿤달리니를 경험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지구 밖의 다른 외계와 감응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 별의 성격에 따라서 그 사람의 쿤달리니 종류는 달라진다.

챠크라가 계속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별이 지니고 있는 그런 에너지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 천계와의 관련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경험하기가 어렵다.

이런 쿤달리니 에너지와 챠크라의 움직임은 고도의 외부 정신세계에서 먼저 개입되어 일어난 일이다.


개아적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쿤달리니도 환상 내지는 집착에 불과하다.

쿤달리니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아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것이 성취된 사람에게는 쿤달리니의 모든 과정이 환상에 불과하다.

개아적인 진화에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쿤달리니의 의미가 있다.

쿤달리니의 의미란 많은 수행자들이 진화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쿤달리니의 최초의 경험은 양미간에서 빛이 발생하고 식욕이나 수면욕이 점차 감소하며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것이 쿤달린 각성의 전조이다.

양쪽 콧구멍의 호흡이 4일을 주기로 바뀌어져서 이것이 완전히 동등해지는데는 최소한 15일이 걸린다

쿤달리니가 각성되기 전에 호흡 수련에서는 백색의 원형속에 적색의 원이 들어가면 광구가 서로 혼합되어 있는것을 볼 때 이것을 도교의 경전에서는 일월합벽이라고 한다.

이때 음의 기도는 흰색으로 기술한다.

그런데 왜 흰색이 푸른색으로 바뀔까?


쿤달리니의 실제적인 각성은 폭발로 일어난다.
쿤달리니가 각성될때 가장 공통적인 경험은 꼬리뼈에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짜릿한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물라다라챠크라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스슘나를 통해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리고 북소리, 플루우트 소리, 새소리, 종소리, 천상의 음악, 공작새의 울음소리를 경험한다.

그러다가 우기중에 야외에 앉아 있는데 짙은 구름속에 앉아 있는 감각이 든다.

그리고 천둥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선도에서 육종진동 중의 하나다.

척추를 통해 강렬한 빛이 보인다.

수백개의 작은 빛이 몸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또 다른 면은 분노, 열정, 억압감이 표출된다.

그리고 공포(아일레날린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자극된다)로 가득차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성욕(물라다라챠크라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자극된다)으로 가득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또 어떤 때는 먹는 것(마니퓨라챠크라에 쿤 에너지가 자극한다)밖에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또 완전히 식욕을 잃을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초능력을 얻게 된다.

이런것은 쿤 에너지가 소뇌를 자극시킬때 일어난다.

어떤대는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고 어떤때는 평상시의 몇배 속도로 느낀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때는 쿤달리니 에너지가 활성화되어 있을 때다.

미인하고 있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은 챠크라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격적인 상태에 있을 때, 결혼식이나 졸업식 때 시간이 빨리가는 것, 아주 원하던 곳의 여행, 보고 싶은 책을 읽을때 밤이 홀딱 지나간다.

이런때 챠크라의 기능이 활발해 진다.

신선 바둑에 도끼자루 썩는다.

시간이 지루할 때는 챠크라에 에너지가 부족할 때이다.

삶이 지루하고 부정적이다.

무기력하고 나약함을 느낄때는 대뇌에 에너지가 적다.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은 챠크라지수이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처음에 강력한 열감을 경험하지만, 그뒤에는 수행자의 몸이 굉장히 차가워진다.

수행자는 일정한 정액을 매시간마다 규칙적으로 발생시켜야 한다.

이러한 뒤에 정액이 사라지고 나면 강렬한 경험이 사라진다.

쿤달리니 수행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상적이거나 아사나 프라나적인것이 아니라 정액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함경에 정액을 관찰하는 바파사나의 종목이 나온다.

정액이 원료가 된다.

마치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이 휘발류인것처럼....

 

탄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라다라챠크라를 강하게 확장시켜야 한다.

모든것은 이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쿤달리니 에너지가 뇌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미골(물라다라챠크라)에 있다는 것이다.

뱀이 머리로 올라가면 용이 되어 상승한다.

대군달리니가 바로 용인 것이다.

 

탄트라를 수행하면 고도로 의식이 발전되며 황금색의 빛이 성기에서 방출될 때 성이라고 하는 것이 고도로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성이 동물적이거나 욕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이때 성은 고도로 도덕적인 것이라고 실존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것이 탄트라의 올바른 과정이다.

 

탄트라를 하기 전에 고도의 프라나야마내지 쿤달리니 요가 내지는 만트라 수행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정액을 마음대로 콘트롤 해서 사정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탄트라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만약 사정을 하게 되는 수행자는 그것이 수행이 아니라 욕망임을 알아야 한다

사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섹스이지 탄트라가 아니다.

남녀 모두 그래야 한다

한쪽이 블루고 한쪽이 불루가 아니라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한쪽이 스승이고 한쪽이 제자라는 것도 좋은 상태는 아니다.

양쪽이 모두 탄트라 수행을 통해 궁극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양쪽 모두가 비슷한 수행력을 가져야 한다.

종합적인 프라나야마와 쿤달리니와 대소주천을 능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겨우 조금씩 획득할 수 있는 종목이다.

그리고 탄트라를 이루어낸 사람은 탄트라에 탐닉하지 않는다.

만약 수준이 다른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탄트라를 할 경우 한 사람은 진화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퇴화한다.

기가 교류하기 때문이다.

 

 

15. 단주선

이것은 성기에 관한 집중이다.

이것은 자신의 성기를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이 깊어지면 성적인 상상과는 아무 관련없이 발기가 가능해지는데 이때 소주천 과정에서는 소약을 채취할 수 있는 밭이 된다
혹은 힌두교에서는 링가 신앙이 있고 모든 신석기 문화에 성기 숭배가 신앙이 되는데 이것은 쿤달리니의 각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단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불에너지인 정은 기화되어 척추를 따라 올라가는데 그리고 나면 정액이 마르게 된다.

정액이 말라버린 상태에서는 다음 과정의 쿤달리니 상승이 힘차지 않게 되고, 만약 정액이 마른 상태에서 무리한 상승을 지속시키면 몸은 깔리 상태 즉 원기부족으로 인한 고통이나 실신상태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일단 쿤달린가 길어지면 정액이 만들어지자 마자 저절로 꼬리뼈로 가서 상승을 시작하는데, 그때는 의식적으로 정액을 붙잡아 놓는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하스라라로 올라간 에너지를 다시 끌어내리는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 의식이 성기에 집중 되어져야 한다.


그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에너지를 하부 챠크라로 끌어내림으로서 항상 든든하고 기력이 충
만해있는 상태에 머무를수 있다.
2) 사념이 끊어진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에너지를 상승
시켜 보통 사람보다 몇배 강한 지력을 오랜시간 사용할 수 있다.
3) 쿤달리니 과정에서 폭발 잠재력을 크게 키울수 있다.
4) 주천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약의 채취에 관한 훈련을 하여야 하
며 약이 채취 되어야만 정확한 소주천 수행을 들어갈 수 있다.
5) 하복부가 따뜻한 금빛 액체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 몸의 중심이 머리에서 성기로 내려와서 생활함으로써, 현대인들이 겪는
모든 신경성 질병에 걸리지 않게 되고 원시인들의 강력한 체력을 유지
하게 되며 장수하게 된다.


老子(노자)가 전하는 小周天(소주천)

 

마음을 집중하면 기를 원하는곳에 운용을 할수 있다.
기가 하단전에 모이게 되면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뒷목을 따라 백회혈(정수리)에 기가 다다르면 이것을 의식집중을 통해 천천히 아래로 돌린다.

이때, 억지로 기운을 내리려 하지말고 기가 넘쳐나서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한다.

 

흔히 소주천 수행을 연어가 상류로 가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올라 폭포를 타고 넘어가는듯 하다고 한다.

원래 사람몸의 기운은 독맥으로 올라가 임맥으로 내려 흘러간다.

거기에 의식을 주고 수련하면 원래 흐르던 기운이 더 강하게 증강되는 것이므로 실개천을 강으로 만든다는 심정으로 하면 된다.

호흡으로 단전에 기운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운들은 더 잘 흐르게 되는것이다.
억지로 의식적으로 내리밀면 기운이 다른 경락으로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이들 경락들이 자꾸 굵어져서 오랜세월 소주천을 수행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통과하기 어려운 곳이 3군데 있는데 미려관(꼬리뼈)과 녹로관(요추), 협척관(양겨드랑이 중간)에서 목으로 올라가는 부위, 옥침관(머리뒤통수, 인당의 뒤쪽)이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조바심내지 말것이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자연히 기운이 넘쳐날때 넘어가게 된다.

특히 협착관을 통과하여 목과 어깨에 더운 기운을 느낀 이후 옥침관에 이르면 양기의 열기는 점차 식게 되어 시원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뒷통수가 뻥뚤린듯한 느낌마져 받게된다.

이후 백회혈(정수리)까지 시원한 기운은 올라가게 되며 다시 임맥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인체를 소우주라고 하듯이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면 몸은 자연히 알아서 돌아간다.

마치 우주처럼...
상단전(미간), 코, 인중, 입천장, 목, 명문, 배꼽을 지나, 원래 자리인 하단전에 돌려 놓으면, 기의 1주가 끝나게 되며 소주천이 된 것이다.

이런 소주천수행을 수백번 반복하면 기를 자유로 운용할수 있게 된다.

소주천 이후에는 대주천이 있는데 대주천은 더 어려운 수행이다.

흔히들 仙道內功(선도내공)의 기초단계에서 소주천 행공을 들지만, 그 근본적인  수련 목적 및 왜 소주천을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는 그 대답이 묘연한 실정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본원적인 깨달음 또는 의식, 자아와의 합일된상태를 위해 소주천이라 명명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의 수행의 실현을 몸안에 특수한 형태로 변형된 물질을 형성시키며(精,氣,神 등으로 표현), 이것이 몸과 더불어 인간의식마저도 확장 또는 새롭게 창조해가는 과정으로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정기신의 세 가지를 갖춘 존재이다.

정기신 중에서 기는 호흡을 통해 얻을수 있다.

정은 음식을 통해서 채워야 하는 것이고, 신은 만물 본래의 기운인 것이다.

이 신기에 호흡으로 만든 생기와 음식에서 섭취한 정기가 더해져야 만 생명이 유지 되는 것이다.

 

우주로 부터 우리몸으로 받아들인 원기는 생기와 정기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 오염되고 순도가 저하된다.

이렇게 질이 낮아진 원기는 다시 우주로 배출이 되어야 한다.

인체에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또 인체의 기운을 우주로 내 보내는 통기부가 네 군데 있다.

머리와 귀, 그리고 손, 발 이다.

이들 통기부에는 인체의 모든 장부에 연결된 상응점이 있다.

머리와 손의 상응점을 통해서 인체의 각부로 우주의 원기가 들어가고, 귀와 발의 상응점을 통해서 인체에서 사용되고 난 냉기와 장부의 노페물인 사기가 빠져 나간다.

특히 발에는 용천혈이 있는데 그곳에서 오염된 기가 인체외부로 나가게 된다.

 

소주천 수행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머리와 손을 통해 기가 들어오는 것만 느끼게 되지만 기감이 조금 더 열리게 되면 귀와 발에서 기가 배출되는 것도 감지할 수 있다.

화기가 사지의 아래로 밀려내려갈 때 의식을 발바닥에 집중해 보면 발바닥에서 쏴아 하고 찬 기운이 나가는 것을 알게 된다.

심장에서 시작된 화기중 30% 정도는 발끝으로 밀고 내려가서 발의 상응점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고,  신장의 기운인 수기도 위로 올라와서 귀로 배출을 한다.

그런데 귀와 발에 냉기가 딱 모여서 정체하게 되면 각 장부의 기운은 흐리지 못해서  탁하게 변하고 만다.

이럴때는 귀를 따뜻한 손으로 만져주거나 발마사지를 통해서 기를 소통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축해서 말하자면, 소주천이란 기를 돌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몸안에 특수한 형태로 변형된 물질, 즉 약을 얻기 위함이라 할수 있는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약은 단순히 단전 또는 몸안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차고 하는 등의 기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행과 작용을 통해 일반인의 전혀 알수없는 특수한 감각 또는 의식의 개화와 장생불사, 또는 인간잠재능력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藥(약)을 뜻한다.

한편 소주천을 수련하거나 주천행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식의 진화와 육체적 축복으로 이어지는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수행을 시작하기전 반드시 인식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천행을 위한 正道(정도)와, 적절한 修行時期(수행시기), 方法(방법) 등이 확실히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르지 못하거나 무리한 수행을 통해 인체내균형이 깨지거나 상실되었을 때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심한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자아파괴까지를 초래할 수 있는 날카로운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소주천 수행이며 또한 그 정도를 통해 약을 얻는다는 것이 어지간한 福(복)과 時間(시간)으로 가능하지 않다는데 근원적인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단순한 형태의 이러한 괴리현상으로 수행을 하면 할수록
① 몸이 한겨울처럼 차기만 한다든가
② 환자처럼 쩔쩔 끓기만 한다든가
③ 심장, 콩팥 등 오장의 어느 부분이 극심할 정도로 아프다거나
④ 정신이 몽롱 또는 혼이 빠져나간것 같은 초기 정신분열증 현상 등이그 구체적인 실례이며

이것은 잘못된 수행으로 인한 인체내 물과 불의 부조화, 주천행이 적절한 시기와 횟수의 조화 등 그 복잡묘묘한 구체적 운행의 무지에서 비롯된 총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초학자들이나 이미 행공을 장기간실시한 사람들은 이점을 다시 한번 숙고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어쨋든 잘하면 장생의 진약이 될 수 있는 소주천행공이 진의를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상세히 밝히려고 하니 여러분의 혜지로 바른 깨달음을 얻기를 갈망하며 그 수행법과 구성에 대해 일설하고자 합니다.

소주천은 우선 정과 기와 신의 조화를 통한 인체내 특정 부위에서의

조약 → 채취 → 승강 → 화후 → 결단

의 과정에 대한 고찰이며, 탐구, 행공이라 할수 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건물이 오래갈수 없듯이 위 과정에서도 어느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무엇보다 條藥(조약)과정에 성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옛말에 "眞人(진인)은 一氣(일기)을 느낄뿐이다" 라고한 구절은 이 조약과정이 공고히 되었을 때를 이름인데, 이렇게 되면 자동주천의복운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조약에 대한 선도서의 핵심구절은 "凝神入氣穴(응신입기혈)"이다.

이것은 "의념을 통해 神(의식)을 단전부위에 머무르게 하는것"인데 이과정에서 精(정)이 氣化(기화)하여 단전에서 精·氣·神이 무수한 형태로 변형된 새롭고 특수한 물질(이 물질은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을 형성하며, 이것이 약을 만들어 가는 하나하나의 재료로 작용되어진다.

여기서 精은 남자의 정액(여자의 경우 생식기의 호르몬)을 의미하며, 이는불(火)의 성질을 가지고 이것이 의념을 통해 단전으로 상승한 것을 氣라하며 물(水)의 성질을 가진다.
또한 神(신)은 미간안에 대부분이 주재하며, 電氣(전기)적 성질을 가진다.

神이 많다는 것은 선도서에서 언급하는 煉己(연기)를 통하여서도 얻을 수 있지만 도덕성과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선천적으로 많이 타고 나며, 이런 사람일수록 고도로 정밀한 藥(약)을 만드는 바탕이 튼튼하다.

한마디로 정·기·신의 조화는 물과 불과 전기적 성질의 그때그때의 특수한 변형이라고 할수 있다.

참고로 佛家(불가)의 화두선행공은 神의 확장을 주요 골자로 한 의식의 개화·깨달음의 도달을 특징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응신입기혈의 상태가 지속될수록 단전에서 특수한 현상 또는 기감이 발생한다.
단전에서 하늘색, 노락색, 밤색, 흰색 등 7색의 구체 또는 기하학적인 형체들이 살아있는것 같이 꿈틀거리는것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약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주천을 하면 자칫 약의 낭비를 초래할수있다.
주천에서 중요한 것은 단전에 충분한 약이 형성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위에서의 "진인은......"라고 언급한 자동주천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주천이 시작되면 이 약은 임독맥의 형태 또는 무수히 많은 기도를 통하여 몸안을 주천하기 시작하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식·지식 등을 하루3∼4시간씩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체험들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조약을 위한 것일 뿐이니 시중에 나도는 여러 책에서서술하듯 단 몇가지 형태의 주천에 어느 단계를 규정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주천에 있어 그 속도와 호흡수를 규정할 필요도 없다.
주천은 빠를 때는 빠르고, 느릴때는 느린 그 완급의 상태를 그때그때 몸안에 알맞은 상태로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며, 이때 또한 眞息(진식)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단약이 형성되었으나 주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기도를 확장하고 있는 상태이니 주천에 치중하는 것보다 약을 얻는 것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약이 어느정도 형성되면 기도확장은 이에 수반하여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조약의 행법중에는 응신입기혈한 상태에서 숫자를 세는 방법도 있으니 이것은 의식을 고도로 집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 숫자를 센다는 것의 자장에 따른 효과를 한층 꾀한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조약하는 과정에서 단전중에 에너지나 기가 응집되어서 구체(덩어리)형태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 구체의 특징은 아래와 같은 감각 및 현상을 수반한다.

1. 부드럽게 느껴진다.
2. 뜨겁게 느껴진다.
3. 차갑게 느껴진다.
4. 온화하게 느껴진다.
5. 날카롭게 느껴진다.
6. 무겁게 느껴진다.
7. 가볍게 느껴진다.
8. 청량감이 느껴진다.

위 과정을 최소 몇십분 이상 겪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약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내용은 약이 강화될수록 반드시 일어나는 특수한 세계이며, 이러한것은 생시에 오감으로 감각하듯이 명료하며 선명합니다.


위에서 황금색 구슬 등은 조약과정으로 이해할 것이지, 시중의 책에 현혹되어 대약이니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한편, 위 내용중 일부는 칼융의 자서전 뒷부분에서 서술하듯이 그가 70세를 전후한 병고중 의식이 초탈된 상황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를 "생애 최고의 체험"이라 하였으니 이는 위 과정중 지구와 우주에 관련된 단편적인(그에게는 최고일지 모르지만) 겨우 한 장면만을 경험한 것입니다.
위 글에 기록된 소주천에 관한 설명은 시중의 많은 선도서에서 조약에 관한 과정이 은유적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수행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기록한 것이며, 수행의 성패는 실체적인 체험이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므로 시중의 방서는 참고서로만 이용할 것이지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조약은 단순한 것으로 "단전을 오랫동안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라는 말로 갈무리 하며, 조약시 정을 누설하는 것은 평상시 소모하는 에너지의 몇십배에 달하며, 그동안 이룬 공과를 헛되게 할 수 있으니 수행자는 이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仙道 丹功 佛敎 > 기공 명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기운행 표준공법 - 오보공(五步功)  (0) 2022.08.02
진기운행 오보공(五步功)  (0) 2021.12.19
차크라  (0) 2020.08.23
진동, 회전력을 이용한 척추 수련법   (0) 2019.05.21
태극내공 양생법  (0) 2019.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