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 순례 - 대왕암 감은사

초암 정만순 2021. 6. 9. 16:53

우리땅 영지 순례 - 대왕암 감은사

 

 

 

봉길리 앞바다에 육지로부터 200m쯤 떨어진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 (661-681)의 수중릉이다. 둘레 200m의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큰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단, 화장을 해서 재를 뿌렸느냐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이 큰 돌을 대왕암이라 하며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릉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감은사의 동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다.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경주시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신라문무왕의 왕릉으로 유명하다.

기록과 대조해 감은사지나 이견대 등의 용도, 구조 및 위치로 보아 대왕암이 바로 승하한 문무왕을 장사지낸 문무왕릉임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래에 있는 논란들은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가, 아니면 유골함과 부장품이 지금도 안에 들어있는 수중릉인가에 대한 논란이었고, 전자라고 해도 이미 신라 당대부터 윤회해 동해의 이 된 문무왕이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실상 왕릉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사적 제158호. 일명 대왕암(大王岩), 대왕바위라고도 한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뒤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면 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하고는 재위 21년(681)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장사하였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王寺) 감은사를 세우고,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까지 파 놓았는데 이 수로가 동해 바다로 이어져[1] 대왕암으로 직결된다. 신문왕이 만든 전망대(이견대) 역시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장소에 있다. 이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대왕바위)'라 하여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졌고,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왕암이 한때 잊혀져 있던 걸 후술할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알 만한 사람들한텐 모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방문객이 꾸준히 있는 그런 관광지는 아니라서 1970년대까지 대왕암 앞은 지금과 달리 인가가 하나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의 '동해 바다'였지만,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밤에는 참배객들이 마치 약속된 시간인 것마냥 기도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위에서 보면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으로 십자 형태로 수로를 조성했음이 특징이다. 이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하듯이 불탑 또는 승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의 한가운데 해수면 약간 아래에는 마치 석관 뚜껑이나 고인돌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인 복개석(뚜껑돌)이 있다.

하지만 대왕암이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장사한 안장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공조성된 해중왕릉(수중왕릉)이 맞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의견도 있었다. 황룡사감은사 등을 발굴했던 조유전이 쓴 <발굴 이야기>(1996년)에는 감은사를 발굴하는 도중 황룡사의 종이 대종천 근처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대왕암 근처를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년) 등을 인용하며[3] 대왕암이 해중왕릉이라는 것은 아직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감은사 종을 수색하면서 대왕암의 관 같은 뚜껑 돌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신비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고 적었다.

사실 현재의 대왕암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증보문헌비고에 인조 15년(1637) 10월 유전이나 가스전의 징후로 추정되는 땅불로 대왕암이 불타 바위가 일부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2001년 때 조사 당시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현재의 복개석인 그 바윗돌은 대왕암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져 틈새에 끼어있었을 텐데, 그 바윗돌을 석공들이 밀어 꺼내어 대왕암 중심에 갖다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2001년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되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는데,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서쪽 수로를 깎아서 동쪽 수로보다 더 낮게 만든 흔적이 나왔다.[6] 대왕암의 안쪽도 툭 튀어나온 부위를 정으로 깬 흔적이 있었다.

유골이나 부장품을 안장하지 않았다면 왜 신라 왕실은 석공들을 시켜 대왕암을 다듬고 정리하는 수고를 했는지 의문이 남는데,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 대왕암을 아예 문무왕을 기리는 정식 성지로 만들고자 바닷물이 잘 드나들고 흉한 부분이 없도록 외양을 다듬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즉, 문무왕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는 허묘(墟墓)[7]를 해중릉식으로 제작한 셈이다. 대왕암에 문무왕의 유골이 안장되지는 않았더라도, 문무왕이 살아 생전에 관계가 깊은 장소이고[8] 신라 왕실에서 대왕암을 추모공간으로 삼고자 작업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학설을 정확히 말하자면 문무왕의 유골을 산골하여 대왕암에서 뿌리긴 하되, 그래도 왕의 장례이다 보니까 아예 일반 사람들이 화장 장례 치르는 것같이 화장한 재를 바다나 강물에 뿌리듯 할 순 없어서 나름의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수로에 바닷물이 조금이라도 더 잘 드나들게 만들고, 암초 사이에 끼어 있던 커다란 바윗돌을 십자수로 아래에 밀어 넣어 현재처럼 수로 가운데에 바윗돌이 놓여진 모습으로 정리한 다음 나머지 부분들을 다듬고, 조성 작업이 완료된 후에 그 위에서 화장한 문무왕의 유골가루를 뿌리는 절차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

 

예부터 영험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이곳에 가면 제를 올리는 무속인들이나 대왕암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아예 캠핑카처럼 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와서 장기간 기도하며 상주하는 무속인도 있다. # 문무왕이 동해의 수호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 말로는 전국에서 소위 '기도빨'이 1위인 곳으로 무속인들 사이에서 여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몰상식한 관광객이나 치성을 올리고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가는 무개념 무속인들 때문에 계룡산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계룡산은 그나마 단속을 많이 해서 좀 줄었지만 여기는 지금도 종종 대왕암 맞은편 해변을 찾아보면 크고 작은 기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고, 심지어는 썩은 돼지머리까지 굴러다니는 경우도 있다. 혐짤주의 이런 짓은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많은지라 제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치성을 올리는 게 아니라 간소하게 차리고 경만 읽고 가는 이들도 많지만, 모든 무속인이 다 경 읽는 법사인 것도 아니고, 무속인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중앙교단도 없는지라 그저 관리 인력만 고생할 뿐이다.

2020년 6월, 경주시가 문무왕릉 주변을 정리한다고 발표를 했다. 경주시는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인 만큼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오는 2026년까지 220억원을 들여 사업을 마무리 할 계획이라고. 역사광장, 비석공간, 해양역사문화관을 만들어 문무대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인근 이견대와 감은사지로 이어지는 보행탐방로롤 만들며, 위에 적은 무속행위 역시 금지하거나 놔두는 게 아니라 해변 남쪽에 무속인의 공간을 아예 따로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이 곳은 근처의 감은사와 관련이 있는데, 동해의 해룡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바다에서 물을 끌어와 감은사 금당 밑까지 연결해서 인공 못 위에 건물을 지었다. 또한 감은사지 석탑 내부에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가 각각 발견되었는데, 이중 동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발견된 사리 중 일부가 문무왕을 화장하여 나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아들 신문왕이 만든, 문무대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정자 이견대가 있다. 감은사와 이견대는 거리상으로는 걸어서 갈 수도 있지만 거리가 서로 애매하게 떨어져 있다. 경주 동부 해안가가 같은 경주 안이라도 경주 중심가에서 매우 떨어져 있고 범위가 넓기 때문에 문무대왕릉 근처, 감은사지 +읍천 주상절리 지형[10]을 하루는 잡고 보는 것이 좋다.

관광 외 순수 해수욕 목적으로 문무대왕릉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지만(...) 대왕암 앞 해변은 일반(나급) 해수욕장인 봉길해수욕장이다. 

사실 야산에 가려서 안 보이지만 구글 지도 등을 확인해보면 코 앞에 월성 원자력 발전소도 있다. 울산, 양남 쪽에서 여기로 올 때 터널을 거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도로 또한 해안가를 한참 따라가다 갑자기 내륙으로 꺾인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3.5m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 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못 안의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외곽을 둘러싼 바위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장치가 유골을 묻은 것이라면 세계에서도 드문 수중릉이 될 것이지만,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정권안보에 이용하려 한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사실 대왕암은 오래전부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린 산골처로 알려져왔으며, 주변 어부들은 이미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근처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둔갑해 처음 발견된 것처럼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봉길리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대왕암자갈돌 구르는 소리가 요란한 봉길리 해수욕장은 여름이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문무왕은 아버지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명실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 이렇게 유언하였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681)조).”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컨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문무왕의 산골처인 대왕암을 더욱 뜻 깊게 눈여겨볼 수 있다.

한편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는 그가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 사실, 그리고 대왕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96년경 홍양호가 발견했다는 문무왕릉비 두 편 가운데 한 편과 그보다 작은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대왕암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담은 대왕암의 본뜻이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사천왕사지문무왕비편’이라는 묵서(墨書)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능지탑과 사천왕사터는 경주 배반동 낭산 기슭에 있다.

 

 

 

■ 감은사지 동서쌍탑

 

 

 

 

신라 절의 전형을 갖추어가다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터이다. 이곳은 동해 바다에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이 짓기 시작하였고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하였다. 두 개의 커다란 삼층석탑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절터로 삼국통일 이후 형식을 갖추어가는 신라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 일금당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시기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큰 탑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멀리서부터 잘 보이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금당 앞으로 동과 서에 하나씩 놓여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가장 큰 석탑으로 신문왕 2년(682년)에 만들어졌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이 놓여 있는데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닌 여러 돌을 짜 맞춰 만든 형식이다. 탑의 윗부분에는 찰주라고 하는 상륜부를 꾸미는 장식이 아직 남아 있는데 다른 오래된 탑에서는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눈길을 끈다. 1960년에 서삼층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안에서 정교한 모양새에 감탄을 자아내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990년대에 보수를 위해 해체한 동탑에서도 서탑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천왕상이 그려진 외함과 내함, 사리기, 사리병 등을 갖춘 사리장엄구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두 개의 탑이라면 이야기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금당 자리의 석축이다. 금당 아래 석축 사이로 제법 큰 공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해 바다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능도 가까이 있어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곳곳에 놓인 석재에는 보통 절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양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은사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최정규, 박성원, 정민용, 박정현)

 

 

 

감은사지는 감은사라는 절이 있던 옛 터를 말하는데요,

감은사는 신라의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하여 만든 절로,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되었습니다. 절의 이름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감은사'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감은사지에 자리잡은 거대한 두 개의 탑

 

 

이곳 감은사지에는 가장 눈에 띄는게 있는데요, 바로 두 개의 석탑입니다.

사찰의 본당인 금당터 옆에 쌍둥이처럼 나란히 자리잡고 있죠!

이 탑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탑 중에 가장 큰 탑으로

바로 감은사지 3층 석탑입니다.

아파트 5층 정도의 높이로 실제로 보면 굉장히 거대해요~

 

감은사지3층석탑은 감은사지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쌍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112호로 지정되었다. 감은사(感恩寺)는 동해안(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해 신문왕 때 완공하였다.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1호로 지정된 바 있다.

감은사지3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의 전체높이는 13.4m이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1959년 12월 서쪽탑 해체 수리 시 3층에서 발견된 사리공에는 금동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것들을 감은사지서삼층석탑사리장엄구에 포함해 보물 제336호로 지정하였다. 지난 1996년 동탑의 해체 수리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으며 2002년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러나 감은사지 석탑 공사는 부실복원공사로 논란을 빚어왔으며, 결국 2006년 감은사지 서탑이 부분 해체돼 보수작업에 들어갔다가 2008년 보수가 끝나고 공개되었다.

 

네, 맞습니다.

불국사 석가탑 모양과 굉장히 비슷하죠.

생긴 모습을 살펴보면, 일단 아주 크고 단순한 형태입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높이는 13.4m로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닌

여러 돌을 짜 맞춰 만든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입니다.

사진제공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이 밖에도 탑 곳곳에 보통 절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태극무늬가새겨져 있는 것도 특이하죠.

그리고 또 하나!

탑을 해체 수리할 때 금동사리함이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엔 금당터를 한번 볼까요?

 

 

 

이 공간에는 문무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바다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합니다.

신문왕은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받들어 화장해 바다에 뿌렸고,

물길을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를 찾아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해요.

또한 용이 된 문무왕의 날카로운 어금니 두 개가 감은사의 동탑과 서탑이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감은사는 글자 그대로 '은혜에 감사하는 절'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 절을 창건한 사람은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이다. 그의 부친은 삼국 통일의 어려운 고비를 거치다가 661년 통일이 채 완성되기 전에 사망한 태종 무열왕()이다. 문무대왕은 통일을 위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가지 실무를 담당하다가 661년 왕위에 오른 후 681년까지의 재위 기간 동안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군()과 계속 싸워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 그는 668년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이 통일되고 국가가 점차 안정되자 이를 부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 감사하는 뜻에서 만년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문무대왕은 이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681년 사망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682년 그의 아들 신문왕() 때 완성하였다.

감은사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또 하나의 유적은 이 절 터에서 멀지않은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수중()의 바위들로 '대왕암()'이라는 것이다.

대왕암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대왕은 평소에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에 따라 그를 화장하고 그 유해를 동해의 바위에 안장()하였다. 대왕암이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라는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밝힌 황수영 박사의 저서 「신라문무대왕동해능」에는 공중과 수중에서 촬영한 신비에 가득찬 대왕암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감은사는 삼국 시대의 전형적인 쌍탑가람() 배치, 즉 금당()을 중심부에 두고 그 앞에 양쪽 대칭형으로 똑같은 탑을 배치한 구조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북쪽에서 바라본 감은사지 전경 사진 참조) 현재는 두 기()의 석탑만이 우람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으며 나머지 목조 건물들은 이미 오래 전에 파괴되었다. 지난 1980년 이후 발굴 사업에 의하여 건물들의 기초가 밝혀졌을 뿐이다. 남쪽을 향한 중문, 남북 축 선상에 양쪽으로 배치된 두 개의 석탑, 그 뒤로 보이는 금당의 터,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금당 뒤에 자리했던 강당, 이들을 둘러쌌던 회랑의 자취가 주춧돌의 흔적에 의해서 뚜렷하게 보인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서탑)

그런데 회랑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쌍탑의 배치 모습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주위에는 과히 크지 않은 부드러운 산들이 있어 이 절을 아늑하게 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절의 구조 가운데 가장 신기한 것은 바로 금당의 바닥 돌 마루 구조이다. 우선 H자형 받침석을 놓고 그 위에 석판을 놓아 마루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지표면과 금당의 바닥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공간은 동해에 수장()된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바닷물을 타고 금당 밑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문무대왕은 이처럼 자신의 유언대로 사후에도 동해안의 호국 사찰을 드나들며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참으로 감동적인 애국, 호국의 고사()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위업()과 연관되어 생겨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 - 입면도

현재 남아 있는 두 탑 가운데 서탑(西)은 1959년 해체·복원을 거쳐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었고, 동탑()은 기단 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다.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이들 삼층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 형태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시대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같이 목조 구조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단계는 지났으며 석탑으로서의 형태가 정착된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기본적인 구조나 각 부분의 상징성에 관해서는 일본 호오류우지() 오중탑()을 참조하기 바란다(호오류우지의 오중탑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탑 참조). 아직도 목조탑의 흔적이 있다면 삼층 모두의 옥개석()이 기와 지붕의 윤곽선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이층 기단()에 삼층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를 갖추었던 이 탑은 현재 상륜부의 가장 아랫부분, 즉 노반()이라고 부르는 부분만 남아 있고 그 위로 철제 찰주()만이 보인다. 찰주는 우주의 주축()을 상징하므로 목탑의 찰주는 전체를 관통하도록 되어 있으나, 이 석탑의 찰주는 삼층 탑신부에 꽂힌 부분이 약 1.3m 정도이다.

이 찰주의 정상까지 계산하면 탑의 전체 높이는 13.4m에 달한다. 높이와 넓이의 비례가 아주 적절하여 힘과 무게가 강하게 표현된 이 탑의 모습은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에서와 같이 장대한 남성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통일을 이룩했던 신라인의 투철한 의지와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어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압도한다.

2기의 감은사지 삼층 석탑

해체하여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 탑의 삼층 탑신석() 중앙에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청동제 사리구() 및 수정 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 통일 신라 초기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 기법, 사리기()의 형식, 그리고 사리 신앙의 단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층 석탑 안에서 발견된 청동제 사리구 뚜껑

삼층 석탑 안에서 발견된 청동제 사리구와 수정 사리병

[네이버 지식백과]감은사지와 삼층 석탑 - 삼국 통일과 호국 정신의 발현 (내가 본 세계의 건축, 2004. 7. 10., 이성미)

 

 

이견대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곳.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지었다.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또한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이견대 안쪽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1967년 신라 오악(五嶽) 조사단의 발굴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대왕암을 통해 군사영웅사관을 조성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따라 춤을 춘 학계의 뒷면을 보는 듯하여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고유섭은 일제 시대, 명백한 침략을 내선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을 썼다. 그가 지은 시와 문무왕의 유언이 새겨진 비, 그리고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이견대는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곧바로 바라볼 수 있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한 문무대왕의 호국 정신이 깃들인 곳이다.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이 이곳에서 바다의 큰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합해 용을 시켜 보낸 검은 옥대와 대나무를 얻게 되었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고, 적병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돌거나 가뭄 등 나라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이를 불어 모든 어려움을 가라앉게 한 만파식적의 전설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견대라는 것은 중국의 주역 가운데 ‘비룡재천이견대인’이란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즉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게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시대의 건물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신라 시대 건물 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마루에 오르면 곧바로 대왕암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에 이견대가 세워져 있는데,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만파식적은 한 번 불면 세상의 풍파를 잠재우고 평안하게 만들어준다는 전설의 피리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전해준 것으로 《삼국유사》에서 기록되어 있다. 이견대에 오르면 정자 기둥 사이로 액자 속 그림처럼 문무대왕릉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