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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영지 순례 - 사불산 윤필암 묘적암

초암 정만순 2021. 5. 24. 11:11

우리땅 영지 순례 - 

사불산 윤필암 묘적암

 

 

 

■ 사불산(四佛山)

 

 

 

사불산과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이 서남쪽으로 뻗어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사불산이 있고 그 기슭에 대승사가 있다.

해발 913m에 이르는 사불산의 오늘날 공식 명칭은 공덕산(功德山)이다.

공덕산이든, 사불산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근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겠다는 속뜻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불산 일대는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다.

공덕산 동쪽 기슭 예천 땅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머문 적이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은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했고, 건국 이후 용문사를 중건했다고 한다.

사불산 서쪽의 해발 1103.2m 운달산 아래는 김룡사(金龍寺)가 있다.

대승사 창건 이듬해인 588년(진평왕 10) 운달조사가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불산의 가장 큰 절인 대승사 바로 곁에는 새로 지은 총지암(總持庵)을 비롯해 문수암(文殊庵), 관음암(觀音庵), 보현암(普賢庵)이 있다.

윤필암(潤筆庵)과 묘적암(妙寂庵)은 대승사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는 산내 암자다.

 

 

 

■ 사불암(四佛岩) 사면불(四面佛)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굴불산(掘佛山)·만불산(萬佛山)’에 나오는 이야기다.

 

죽령 동쪽 100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자기 4면이 한 장(丈)이나 되는 돌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가 새겨졌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절하고는 바위 곁에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는데, 법화경을 외는 비구 망명(亡名)을 주지로 삼아 바위를 깨끗이 쓸고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산 이름은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죽어 장사 지냈는데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

 

 

망명(亡名)은 글자 그대로 이름이 잊혀져 알 수 없게 된 승려다.

한 장(丈)이란 한 자(尺)의 열배에 이르는 단위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둔다.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신라국 사람들을 극락정토로 한데 이끌고 가겠다는 부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록으로 볼 때 6~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육면체 기둥 모양의 바위로 각각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 사면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

 

사면 불상의 높이는 3.4km, 폭 2.3km 이르며, 동과 서는 좌상, 남과 북은 입상으로 동쪽은 약사여래불, 서쪽은 아미타여래, 남쪽은 석가여래, 북쪽은 미륵여래를 새김으로서 부처님 눈으로 보이는 사방의 땅이 불국토임을 알려주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마멸이 심하여 세부 문양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사면 모두 여래상으로 보이며 동쪽과 서쪽은 좌상이고 남쪽과 북쪽은 입상으로 추정된다.

2007년 12월 31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방형 돌기둥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진 네 구의 부조 불상이다

돌기둥은 대략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남·북면에는 입상이 새겨져 있고, 동·서면은 좌상일 가능성도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동쪽 불상이 그중에서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다.

 

 

 

사방불신앙[ 四方佛信仰 ]

 

 

사방불 신앙은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를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이다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진평왕 9)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대석(大石)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사방불은 홍사(紅紗)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밖에 신라의 유물·유적 가운데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석탑 5기에 새겨진 사방불, 안강(安康)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 경주 호원사지(虎願寺址) 사방불 등이 있다.

 

이 석조 유형물들의 정확한 성립연대는 알지 못하지만 굴불사지의 사면석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 윤필암[ 潤筆庵 ]

 

윤필암에 사면석불 배례할 수 있게 사불전 세워

사면석불은 대승사 뒤편으로 보이는 공덕산 줄기의 정상부에 있다.

하지만 대승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면석불을 만나려면 산 너머 윤필암으로 가야 한다.

아니면 사면암까지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산12 번지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대승사의 부속암자이다.

1380년(고려 우왕 6)에 각관(覺寬)이 창건하였으며 1645년에 서조(瑞祖)와 탁잠(卓岑)이 중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885년에 고종의 명으로 창명(滄溟)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980년대에 모든 전각을 새로 지어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윤필암의 명칭은 원효와 의상이 각각 사불산의 화장사와 미면사에서 수행할 때 의상의 이복동생인 윤필이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음전과 사불전, 산신각, 선원이 갖추어진 비교적 규모가 큰 암자이다.

그 외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紙龕)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8호로 지정된 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사불전 뒤쪽의 암벽 위에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사불전(四佛殿)

 

윤필암에는 산에 오르지 않고도 사면석불에 배례할 수 있도록 사불전(四佛殿)이 세워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처럼 사면석불 쪽을 향해 커다랗게 창을 낸 전각이다.

사불전에는 불상이 없고 정면에 설치된 유리창을 통해 사불산 정상에 있는 사면석불을 향해 참배한다.

사면석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 묘적암

 

 

 

묘적암은 선덕여왕 15년(646년)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말에 나옹 선사가 출가하여 수행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성철, 서암 스님처럼 덕이 높은 고승들의 수행처로도 유명하다.

세련된 도시 여인을 닮은 윤필암에 비해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남성적 분위기의 산사다

 

법당은 참으로 소박하고 정갈하다.

1500년이라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은 청빈한 흔적들이 감겨든다.

법당문을 열면 건너편 봉우리에 있는 사불암이 한눈에 들어오니 명당터 임이 분명하다.

 

 

 

`일묵여뢰`라는 편액이 가슴에 와 박힌다.

침묵은 곧 우뢰와 같다는 말이다

침묵이 정이라면 우뢰는 동이요, 정이 적정본체라면 동은 이생기심이다

여보게들 자신 있으면 하나의 침묵이 있기 전 부모미생전의 소식을 어디 한번 말해보라

누가 꿀먹은 벙어리의 말문을 트게 할 것이며 돌장승의 눈을 뜨게 할 것인가!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 妙寂庵 懶翁和尙 影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의 묘적암에 있는 나옹의 영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이다.

 

1803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1320~1376)의 모습을 그린 족자이다.

나옹은 21세 때 출가하여 묘적암에서 수행하였다.

화면에는 장삼 위에 가사를 걸친 나옹이 주장자를 들고 염주를 잡은 채 약간 우측을 향하여 가부좌를 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는 금으로 장식된 커다란 가사 고리가 달려 있다.

뒤쪽으로 용장식이 화려한 불자(佛子)가 세워져 있으며 바닥과 벽면이 구분되어 있다.

화면 왼쪽 위에는 주인공의 존호를 밝힌 영제(影題)가 적혀있고 맨 아래에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밝힌 화기(畵記)가 있어 나옹화상 진영도(眞影圖)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옹혜근은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지공(指空)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공민왕 때 고려로 귀국해 회암사의 주지가 되고 왕사(王師)로 봉해졌으며 보제존자라(普濟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나옹혜근은 1340년(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는 나옹화상진영이 봉안되었다.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진영은 출가처의 역사성과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어 온 나옹화상에 대한 조사 신앙(祖師信仰)을 보여준다.

동시에 조선 후기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화승 신겸의 화풍이 반영된 진영이라는 점에서 불교사와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머리에 뿔난 부처님의 미소는 영원하고~~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오르는 중간 길가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양촌 권근(1352~1409)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에 마애불과 함께 미륵암의 존재를 언급해 놓았다.

마애불 곁의 신라시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절이 미륵암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 암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이다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음각되어 있으며 이중의 연화좌대 위에 신광과 두광을 조각하였다.

양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손은 위로 올려 진리를 나타내는 손 모양을 하고 왼손은 복부에 놓았다.

머리는 소발이며 살상투는 편평하며 양쪽에 연꽃 무늬를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소위 뿔난 부처로 유명하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6m이고, 어깨 폭은 2.2m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