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종가 고택 세거지

고가 찿아 가는 길 - 문경 장수황씨종택

초암 정만순 2021. 5. 28. 19:02

고가 찿아 가는 길 - 

문경 장수황씨종택

 

 

 

"문경 장수황씨종택과 천연기념물 제558호 탱자나무"

 

문경 장수황씨 종택(聞慶 長水黃氏 宗宅)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문경지방에 있는 양반가옥 중 하나로 장수 황씨의 종가이다.

2013년 4월 8일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문경지방에 있는 양반가옥 중 하나로 장수 황씨의 종가이다.

세종 때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유명하였으며 영의정을 지낸 황희(1363~1452)의 7대손인 칠봉 황시간(1558~1642)이 거주 했다고 전해지는 장수황씨종택을 비롯하여400여년이 지나도변함없이 종택을 지키고 있는천연기념물 제558호 탱자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도천연보(道川年譜)》에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柳成龍)이 이 집에서 수학(修學)하였고, 현감(縣監)을 지낸 장수 황씨(長水黃氏) 15대조인 황시간(黃時幹)이 35세 때 여기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룡의 생몰년이나 황시간의 연대기로 미루어 보아 이 가옥의 건립 시기는 약 400여 년 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이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문경 지방의 양반 가옥으로서 원형이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안채의 평면 구성에서 몇 가지 특성이 남아 있어 이 지방 민가연구의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탱자나무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탱자나무는 문경 장수 황씨 종택의 앞뜰에 두 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동쪽의 탱자나무는 3개의 큰 가지로 나뉘어 자라고 있으며, 서쪽의 탱자나무는 4개의 가지가 나와 전체적으로 한 그루인 것처럼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동쪽의 탱자나무는 밑부분이 약간 썩었지만 서쪽의 탱자나무는 큰 상처없이 잘 자라고 있으며, 개인의 집 뜰에 자리하고 있어 보호도 잘 되고 있다.

문경 장수 황씨 종택의 탱자나무는 다른 천연기념물 못지 않게 오래된 나무로 천연기념물 제55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수고, 수관폭, 수령 등 규격적인 측면에서 희귀성이 높을 뿐 아니라, 고유의 수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종택과 오랜 세월 함께해온 노거수로서 자연·학술적·민속적 가치가 크다

 

 

솟을대문

 

양반가의 상징과도 같은 솟을대문에는 다른 곳의 솟을대문에 설치되어 있는 문턱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황씨종택의 솟을대문에 문턱이 없는 것은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우마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섬새하고 사려깊은 건물주의 철학이 담긴것 같다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사랑채를 비롯하여 안채, 중문채, 사당 등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먼저 장수황씨종택의 사랑채를 둘러보도록 하자

 

​사랑채

 

장수황씨종택의 사랑채는 2단으로 이루어진 돌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여러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4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솟을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면에 사랑채가 보여요.

보통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형태인데 이곳의 사랑채는 왼쪽에 마루가 있는 게 특징이다.

 

장수황씨종택의 사랑채에는 道村幽居(도촌유거) 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이는 "선비들이 사는 그윽한 곳"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옆으로는 주변의 풍광을 관망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시를 읇으며 차나 술을 즐길 수있는 누각 같은 마루가 위치하며 이 마루에는 永墓와 敦敍라는 편액이 있다

永墓(영묘) 와 敦敍(돈서)"오래도록 그리워하고 돈독하게 모시는 집" 이라는 뜻이며 당대의 서예가로 유명했던 송우용(1863~1941)의 글씨다

 

 

 

​안채

사랑해 옆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있는 안채 모습이다.

안채 마당 앞에는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장수황씨종택의 안채는 다른 지역의 안채와 마찬가지로 여인네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마당에는 우물이 있으며 사랑채 등 다른 건물과는 독립된 공간에 ㄱ자 형으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채의 마당이 꽤나 넓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인네들을 위한 배려이리라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물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은 건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여인네들의 편의를 위함이라고 하니 장수황씨종택의 여인네를 위한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다

중간채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오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인다면 오른 편에는 이렇게 중간채가 있어요.

 

 

 

■ 천연기념물 탱자나무

 

 

문경 장수황씨종택의 탱자나무는 황희정승의 7대손인 황시간이  이곳에 터를 잡으며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나무라고 한다

 

종택 안마당에 자리한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수고(樹高, 나무의 높이) 6.3m, 수관(樹冠, 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 폭은 동-서 9.2m, 남-북 10.3m, 수령(樹齡, 나무의 나이)은 약 400년으로 추정된다.

탱자나무 수종으로서는 매우 큰 나무로서 대단히 희귀하며, 고유의 수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자연학술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았다.

 

높이 6m, 동서로 10.8m, 남북으로 11.2m의 수관을 자랑하는 장수황씨종택의 탱자나무는 얼핏보면 한 그루인듯 하지만 두 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으며 수령이 400여 년을 지났지만 아직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열매까지 달리고 있다니 그저 놀랍기 그지 없다

 

장수황씨종택의 탱자나무는 처음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로 지정되었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탱자나무로서는 희귀할 정도로 크기가 크고 고유수종으로서의 유지가 잘 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긴 세월 속에서도 생명력의 건재함을 과시하며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고택의 향기와 함께 위용을 뽐내길 기대한다

 

 

사당

 

사랑채의 마루에서 바라보면 앞쪽으로 장수황씨 조상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 오래된 배롱나무 와 함께 멋들어진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조상을 모신 사당 입구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삼문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삼문의 가운데 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이는 삼문 중 가운데 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 평상시에는 이처럼 닫혀져 있는데 일반인들이 이곳을 드나들 때는 중앙문이 아닌 좌우측의 문을 통해 드나들어야 한다

 

삼문을 통과하면 맞은 편으로 장수황씨 조상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숙청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숙청사의 앞 왼쪽에는 숭모각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숭모각에는 황희정승이 사용했다는 벼루와 갓끈이 보관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조금 전 사랑채 마루에서 바라 보았던 배롱나무다

이곳의 배롱나무 역시 탱자나무와 같이 노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문경 장수황씨종택을 둘러보면서 마지막으로 종택의 아름다운 담장과 2단 화단, 괴석을 둘러보며

장수황씨종택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한다

 

 

 

장수황씨[ 長水黃氏 ]

 

전라북도 장수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황경(黃瓊)이다.

 

1723년(조선 경종 3)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부마(駙馬)이며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경(瓊)이다.

경은 한국 황씨의 도시조(都始祖)로 알려진 락(洛)의 둘째 아들인 을고(乙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오늘날 장수황씨 문중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 이후의 세계(世系)가 한동안 실전되어 공유(公有)의 손자 석부(石富)를 1세조로 한다.

조선시대의 4대 명상(名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희(喜)는 석부의 증손자이다.

그는 24년간 정승을 지냈으며 그중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治績)을 쌓았다.

 



희의 아들 가운데 치신(致身)은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고, 수신(守身)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9세손 열(悅)의 아들인 정욱(廷彧)은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17세손 기(璣)의 아들 경원(景源)은 대제학을 비롯하여 이조·예조·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밖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던 맹헌(孟獻)·여헌(汝獻)·효헌(孝獻) 3형제가 유명하고, 선조 때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내침(來侵)을 예고한 윤길(允吉),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엽(曄), 순조 때의 명신 승원(昇源), 한말의 우국지사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지은 현(玹) 등을 배출하였다.

 

 

 

◆ 사진첩

 

찍은 순서대로 해설없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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