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종가 고택 세거지

歸巖宗宅

초암 정만순 2018. 11. 25. 19:10






歸巖宗宅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25


조선후기 영남 남인의 리더, 이원정

 




광주이씨 문익공 귀암고택 표지석


 


귀암고택 정원의 상문숭례 표지석



 

프롤로그


영남은 예로부터 인재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500년 조선 역사를 통틀어 내노라할만한 인물들은 거의가 영남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택리지발문에서 영남 가문을 칭송한 바가 있다. 다산의 주장에 의하면 영남의 가문들은 조선후기의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각기 출중한 조상을 중심으로 이름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글에 의하면 진성이씨는 퇴계를 중심으로 도산, 풍산유씨는 서애를 중심으로 하회, 의성김씨는 학봉을 중심으로 내앞, 안동권씨는 충재를 중심으로 닭실, 한산이씨는 대산을 중심으로 소호, 광주이씨는 석전을 중심으로 석전...(중략)...여주이씨는 회재를 중심으로 옥산(적파는 양동), 인동장씨는 여헌을 중심으로 옥산, 진양정씨는 우복을 중심으로 우산, 전주최씨는 인재를 중심으로 해평에 그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중 광주이씨의 세거지인 석전은 대구와 지척의 거리에 있는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石田里)’를 말한다. 일명 돌밭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하지만 광주이씨 세거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석전보다는 칠곡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성 싶다. 왜냐하면 칠곡군의 자봉산을 중심으로 서로 인접한 웃갓, 매원, 석전세 마을이 모두 광주이씨의 세거지로 이름난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안동의 화회, 경주의 양동, 칠곡의 웃갓·매원·석전을 영남의 3대 마을로 지칭하기도 했다.


오늘은 칠곡의 광주이씨 세거지 중 석전(돌밭)’에 자리한 귀암종택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 최대의 명문, 광주(廣州)이씨


광주이씨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비조(鼻祖·시조보다 윗대 조상)로 삼고 있다. 시조는 고려조에서 생원을 지낸 이당(李唐)’이며, 기세시조(起世始祖·족보상 1세로 삼는 조상)는 이당의 2째 아들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참고로 이당, 이집두 선생은 흥미로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당은 혼례에 얽힌 기이한 전설이 전한다. 이집은 친구인 천곡 최원도 선생과의 우정이야기가 전하는데, 현재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올랐다. 또한 이당의 2째 아들인 이집의 손자 이인손역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올랐다. 이른바 한 집안에서 할아버지 대와 손자 대에서 ‘5형제 등과가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놀라기에 충분한데 광이(廣李·광주이씨)’는 여기에다 한술 더 뜬다. 1세조 둔촌 이집의 증손자 대에서 무려 8명의 당상관이 배출된 것이다. 이른바 광이팔극조정(廣李八克朝廷)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당시 성종은 무릇 자식을 두려거든 광이처럼 두라 하며, ‘광이는 동방 명문 중의 명문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광이2번에 걸친 오자등과(五子登科)’광이팔극조정은 외척이나 세도 가문이 아닌 한미한 가문의 일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로 광이는 청백리 5, 문형 3, 상신 5, 문과급제자는 무려 186명이나 배출했다. 현재 서울의 둔촌동은 이집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그의 호인 둔촌에서 유래된 동명이다.


광이는 연산군 시대에 이르러 100여명의 종인(宗人)이 화를 입는 불행을 당했다. 하지만 이후 영의정을 역임한 이준경, 이덕형 같은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다시 문세(門勢)를 일으켰다. 당쟁이 치열했던 현종·숙종 조에 와서 또 한 번 광이는 큰 화를 입는데, 이때는 경상도 칠곡을 세거지로 하던 칠곡 광이의 인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시조     1세        2세         3세        4
이당 이집 이지직 이장손 이극규
                                               (사인공)      (형조참의) 
                                   → 이인손 이극배 · 이극감 · 이극중 · 이극돈 · 이극균
                                               (우의정)        (영의정)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좌찬성)   (좌의정)
                                   → 이예손 이극기 · 이극견
                                               (관찰사)       (형조참판)  (좌통례)


  


광주이씨 칠곡 입향 내력


본래 광이는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가문이었다. ‘광이의 한 문중이 영남의 칠곡으로 입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중종 시대로 1489년경이라 전한다. 좌통례공 이극견이 성주목사로 재직할 때 그의 차자인 승사랑 이지(李摯)’가 책방도령으로 함께 했다. 이지는 당시 지역에서 덕망이 높았던 최하(崔河)의 딸과 혼례를 치루고 처향인 칠곡에 거처를 마련했다. 칠곡은 고려·조선조를 거치면서 성주 또는 대구 관할의 고을로 그 변동이 잦았는데 당시는 성주의 속현이었다. 이후 성주목사 이극견은 연산군에 의해 유배형을 받았다. 이 때 책방도령으로 있던 이지는 칠곡 땅에 그대로 남아 문중을 이어갔으니 칠곡 광이의 입향조가 된 것이다.


칠곡 광이입향조 승사랑 이지는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진사공 이덕부이며, 차자는 현감공 이인부이다. 칠곡 광이는 장자 이덕부의 증손 대에 와서 드디어 전국적인 명문으로 발 돋음 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바로 영남의 큰 선비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라는 인물의 출현이다. 이윤우 이후 이도창·이도장(李道長이도장(李道章)이원정·이원록이담명·이한명⇢⇢이만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다. 이들은 하나 같이 문과급제는 물론 조정에 출사를 했다. 심지어는 현종·숙종조 노론집권기에도 영남에서는 극히 드물게 조정의 요직에 까지도 나아갔다.


 한편 이들은 향촌사회에서도 학맥·혼맥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그 기반을 다져나갔다. 칠곡의 자봉산을 중심으로 하는 3촌락, ‘웃갓(신동·상지매원·석전이 당시 하회, 양동과 더불어 영남의 3대 마을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칠곡의 광주이씨 문중의 번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5세        6세          9세        10세        11세        12세        17
이지 이덕부 ⇢⇢ 이윤우 이도창
(칠곡입향조) (진사)          (참의)          (도사
          → 이인부                   이도장 이원정 이담명→⇢⇢이만운
                        (현감)                             (사간)      (이조판서)       (참판)           (정언)
                                          이도장     이원록     이한명
                                                                      (장흥고직장) (대사헌)        (교리)


 


귀암 이원정


칠곡 광이의 중흥조인 석담 이윤우 선생을 중심에 놓고 칠곡의 광이를 이야기 하자면 그 시작은 웃갓(上枝·신동)’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이윤우의 손자인 귀암 이원정 선생의 귀암고택인 만큼 고택이 있는 돌밭(석전)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 선생은 이윤우의 손자이자, 이도장(李道長·이윤우의 2)의 장자경북 칠곡 매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27세에 사마시, 1652(효종3) 31세 때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검열, 교리를 거쳐 1660(현종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가 있다. 1661(현종2)에 동래부사를 역임했는데 이때의 치적으로 조정에서 말 한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1670(현종11)에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갔을 때는 공의 문장과 글씨를 보고 청나라 조정이 감탄했다고 한다. 1673(현종14)에 도승지, 1677(숙종3)에 대사간과 형조판서를 지냈다. 1679(숙종5)에는 당시 영남만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시행되던 대동법이 비로소 영남에도 실시되었는데, 이는 이원정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탓이었다. 1680(숙종6)에 이조판서로 재직 중 노론에 의한 경신대출척이 일어났다. 이원정은 초산으로 유배를 가던 중 조정으로 불려와 국문을 받다가 잔혹하게 장살(杖殺) 당했으니 향년 59세였다. 뒤에 신원과 추탈이 반복되다가 최종적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귀암집? 6, ?경산지? 2, ?와우결송록? 1권 등이 있다.


 귀암 이원정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현종·숙종조 서인집권기에 영남 남인 출신으로는 매우 드물게 중앙관직의 요직(이조판서)에 까지 진출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는 노론의 집요한 견제 하에서도 남인을 대표해 조정의 주요 논의의 주창자로 맹 활략 했다. 비록 노론과 남인 간의 치열한 세력 쟁탈전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는 영남 남인은 물론 근기 남인을 대표하는 불굴의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굴곡의 내력은 그의 아들인 이담명에게로 그대로 이어진다.


 귀암 이원정의 추모소로는 경암재(景巖齋)’가 있는데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이암) 동쪽 산록에 있다. 경암재 곁에는 낙촌정’(이도장 추모소), ‘소암재’(이담명 추모소) 등이 함께 있는데, 이 일원을 한데 묶어 동산재(東山齋)’라 칭하고 있으니, 돌밭 광이 문중의 정신적 고향이다.


 

석전(돌밭) 귀암고택


 




귀암고택 사랑채


 


귀암고택(歸巖古宅)은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25에 자리하고 있다. 고택은 귀암 이원정이 양주목사 재임 시절이었던 1670(현종11)에 세워졌다. 이때 이원정은 출생지인 인근 매원마을을 떠나 이곳으로 이거했다. 대문채는 건립당시의 건물이나 정침과 사랑채는 1937년에 재건되었다. 현재의 사당 역시 근년에 중수된 건물이다.


 고택의 대문 앞에 서면 좌우로 긴 황토 빛 흙돌담 사이로 대문과 대문간채가 보인다. 문을 열고 뜰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고졸한 멋을 풍기는 사랑채가, 좌측으로는 상문숭례라는 표석이 놓인 정원이, 우측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안대문이 보인다.





귀암고택 흙돌담과 대문채


 



대문채



 사랑채는 정면 5,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3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전면에 유리 미닫이문을 설치하였고, 이 미닫이문에서 반 칸 정도 뒤로 물려 툇간을 두고 있는 구조이다. 참고로 사랑채는 안대문 채와 일자선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에는 현재 이필주 종손이 거처하고 있다.


 


귀암고택 사랑채와 안대문채


 

정원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40년이 넘는 회화나무, 향나무, 배롱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과 함께 상문숭례(尙門崇禮)’ 표석이 서 있다.

가문을 높이고 예를 높인다는 의미인데 귀암고택의 정신을 표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랑채와 회화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사당이다


 



귀암고택 사당


 



창수문


 



숭문묘


 



 



  


정원과 사랑채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사당이다. 근년에 새롭게 중수한 건물로 사당문은 창수문(彰壽門)’, 사당은 숭문묘(崇文廟)’라 편액이 걸려 있다. 숭문묘는 정면 3, 측면 2, 겹처마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1칸에 툇간을 둔 개방형 사당구조를 하고 있다. 사당 뜰 배롱나무 고목 아래에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다듬어진 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예전에 불을 밝히는 용도로 쓰인 정료대로 보인다. 사당에는 불천위인 귀암 선생의 신주와 함께 현 종손의 4대 조상들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의 우측에는 귀암선생의 8대손 농암(聾巖) 이상석의 생전 강학지소였던 농암정사가 있다. 사당과 이 농암정사 사이에는 기인한 모양의 향나무 고목 한 그루가 있다. 지면에서 1-2m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 지면과 수평을 이루며 사당 안에서 담장을 뚫고 사당 밖으로 자라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용을 연상시킬 정도로 특이하다. 특히 흙과 암키와를 교대로 쌓아 올린 흙탑을 사용해 용의 허리 중 약한 부분 2군데를 받치고 있는데, 그 미적 인 아름다움이 쇠나 시멘트 지지대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참고로 이 향나무는 귀암 선생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한다.


 




농암정사


 



농암정사 옆으로 사당과 누운 향나무가 보인다


 



귀암고택 사당의 누운 향나무와 흙탑 지지대



 


한편 안대문 앞에 서면 여느 사대부가처럼 안채를 바로 볼 수 없도록 시야를 막는 헛담이 서 있다. 안채는 북서쪽에 걸쳐 자형을 하고 있으며 동쪽에 자형 창고가 있다.


 




귀암고택 안채


 



안대문채(중문채) 너머로 헛담이 살짝 보인다



 


 


 


에필로그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마을이라 칭해졌던 칠곡 광주이씨 집성촌 웃갓· 매원·석전중 석전의 귀암고택을 살펴보았다. 서두에서도 잠시 밝혔지만 이야기가 제대로 되려면 칠곡 광이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웃갓의 석담 이윤우 선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야 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치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셔츠를 입고 있는 듯 불편해서 혼났다. 이래서 세상일은 순서가 있는 모양이다. 웃갓의 석담선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순리대로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기회를 봐서 조만간 웃갓과 매원에 대한 이야기도 정리할 것을 약속한다.


 


석전리 귀암고택과 인근의 동산재유래를 살펴보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귀바위·귀바우·이암(耳巖)’이다. 이는 이 지역에 널려 있는 9개의 고인돌을 지칭하는 말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9개의 귀바위(고인돌)가 있었는데 현재는 8개만 찾아 볼 수 있다. 필자가 직접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원정의 호인 귀암(歸巖)’ 역시 귀바위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원정은 매원에서 귀바위가 널려 있는 돌밭, 곧 석전(石田)으로 이거했으니, 이른바 귀바위로 돌아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으로도 귀암을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아 필자의 해석이 더욱 그럴듯하지 않은가?


 



 


아무튼 대구와 구미 사이의 왜관을 지나칠 일이 있다면 돌밭을 한 번 들려보라. 귀암고택 외에도 묵헌종택, 동산재 같은 소중한 유교문화 유적지가 가까운 거리 안에 모여 있다.


 



동산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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