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논산 견훤왕릉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5. 24. 11:33

논산 견훤왕릉 풍수

 

평범한 야산에 잠들다

 

논산 후백제 견훤왕릉

후백제 견훤왕릉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에 있다.

역사는 승자 편으로 패자는 기억하지 않는다.

후백제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36년간 유지된 왕조였다.

그러나 현재는 도읍의 흔적조차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자료가 없으니 후백제와 견훤(867~936)은 고려와 왕건에 비해 항상 나쁘게 묘사되어 왔다.

사실 지금의 묘도 견훤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전에는 견훤묘로 전해진다 해서 ‘전견훤묘(傳甄萱墓)’라고 불렀다.

그런데 1970년 견훤의 후손인 전주견씨와 황간견씨 문중에서 ‘후백제왕견훤릉’이라는 비석을 세우면서 견훤왕릉으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견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자개로 어머니가 지네와 정을 통하여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견훤은 담력이 크고 무예가 뛰어나 신라의 비장이 되었다.

당시 지방 세력들은 신라 왕실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견훤은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장군이 되더니 무진주(광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다.

그는 중국의 오·월과 국교를 맺는 등 옛 백제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다.

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서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잔인했다.

점령지마다 살상과 약탈을 일삼자 각 지방마다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는 덕과 포용력으로 호족과 백성들을 대한 왕건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결국 지방 호족들은 왕건을 도와 견훤을 공격하였다.

거기다 가족 사이에서 내분까지 일어났다.

장남 신검 대신 이복인 넷째 금강을 후계자로 삼자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이 되었다.

견훤은 3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왕건은 그를 상부로 대우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는 등 대우하였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 대한 분노로 왕건에게 신검을 하루속히 정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건은 곧 견훤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신검을 공격하였다.

논산 황산벌에서 두 군대가 맞섰지만 신검은 왕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신검은 불과 몇 번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왕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백제를 복원하려던 후백제가 망하고 만 것이다.

아들과 갈등으로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스스로 멸망케 한 견훤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더구나 왕건이 반역의 이유가 둘째 양검과 셋째 용검에 있다며 이들을 죽이고 신검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에 분을 못 이긴 견훤은 평소 앓고 있던 등창이 터져 죽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이 죽기 전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논산의 ‘닭다리 골’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내가 지네의 정기를 타고 났으니 지네와 상극인 이곳에서 죽는 구나”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후백제를 일으킨 완산이 그립다며 완산칠봉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견훤왕릉은 논산 연무대 근처 들판 가운데 야산 정상에 있다.

들판에 서 있는 작은 야산은 비록 해발은 높지 않지만 들판의 기운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대혈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견훤왕릉은 혈이 아니다.

 



들판에서도 혈을 맺으려면 주룡의 기세가 왕성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낮은 산이지만 현무·주작·청룡·백호 등이 사방을 감싸며 보국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견훤왕릉은 평범한 야산 위에 있을 따름이다.

감싸주는 산이 없고, 앞을 흐르는 마산천도 반배한다.

묘의 향도 견훤이 희망한 전주 쪽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금남정맥이 운장산(1125.7m)에서 대둔산(879m)으로 가기 전 왕사봉(718.3m)에서 비롯된다.

왕사봉에서 서북쪽으로 분지한 산맥이 시루봉(426.6m), 작봉산(418m), 옥녀봉(410.4m), 정토산(370.4m)를 거쳐 호남고속도로 논산IC를 지나 시사산(127.3,m)를 세웠다.

그리고 야트막한 야산자락으로 내려와 산맥의 이곳에 와서 멈추었다.

산맥의 끝자락이기는 하지만 혈이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견훤왕릉 뒤의 입수룡을 보면 약 50~60m 정도가 아무런 변화 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다.

이러한 용을 사절룡이라고 해서 죽은 것으로 본다.

왕건 입장에서 자신의 최대 적이었던 견훤을 명당을 찾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검을 비롯한 견훤 후손들이 번창하는 것을 원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풍수를 신봉했던 왕건이고 보면 더욱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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