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보령 토정 이지함 묘

초암 정만순 2021. 5. 17. 11:29

보령 토정 이지함 묘

 

형제에 명당묫자리 양보한 풍수의 대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1517~1578)의 묘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토정로 1048)에 있다.

이곳에는 무려 14개의 묘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토정의 아버지 이치(李穉, 1477∼1530)와 어머니 광산김씨 합장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아래에는 아들 삼형제의 묘가 나란히 있다.

가운데가 장자인 성암 이지번, 동쪽에는 차자 한창부원군 이지무, 서쪽에 막내인 이지함의 묘가 있다.

그 후손들의 묘는 부모 묘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관이 한산(韓山)인 토정은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6대손이다.

아버지 이치는 수원판관을 지냈다.

토정은 외가인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어머니 묘를 쓰면서 한산에 있던 아버지 묘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이때 토정이 향후 우리 삼형제는 기해년에 귀한 아들들을 얻을 것이다.

그중 정일품이 나오겠다고 예언했다.

 



토정은 맏형 이지번에게 의지하며 보살핌을 받았다.

형을 따라 한양으로 이사한 후에는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천문·지리·의학에 능통하였다.

20대 초반에 정종의 증손 이정랑의 딸과 혼인하여 장인 집이 있던 마포에서 살았다.

그는 마포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정자를 지어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장인의 배경 덕분에 당시의 대학자인 조식, 이이, 성혼, 정철, 이황, 정렴, 박지화, 남사고 등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맏형 이지번이 39세 늦은 나이로 진사에 합격했다.

토정이 길흉을 살펴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자신의 처가 문제로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에 토정은 형에게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가족을 이끌고 보령으로 내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홍남의 고변사건(1549년)’이 일어났다.

조선 명종 때 대윤과 소윤의 권력투쟁에서 소윤이 승리했다.

이에 윤임의 사위인 충주 출신 이홍윤이 소윤의 무리를 일망타진 하겠다는 말을 자주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친형 이홍남이 동생을 밀고하였다.

윤원형은 토정의 장인 이정랑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며 역모로 몰았다.

결국 장인과 처남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나머지 식구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뿐만 아니라 왕실족보에서 삭제되었다.

심지어는 충청도(충주와 청주) 도명이 홍청도(홍주와 청주)로 바뀌었다.

토정 역시 반역자 집안으로 낙인 찍혀 벼슬에 나갈 수 없었다.

그 낙인은 선조 3년(1570)에 가서야 풀렸다.

그의 나이 54세 때다.

1573년 제자들의 추천으로 포천현감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으로 임명되자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 구호 등 민생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곳의 산맥은 금북정맥의 오서산(790m)에서 비롯된다.

서쪽으로 계속 내려온 산맥이 서해 바다를 만나 멈추었다.

야트막한 산세들이 사방으로 감싸며 보국을 이루었다.

특히 앞의 안산이 활모양처럼 생겨 특이하다.

활모양의 면궁사는 문무에 걸쳐 인물을 배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혈이 아니면 소용이 없으며, 맥을 벗어나면 오히려 피해도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맥을 받는 곳은 이지번의 묘다.

이지무의 묘는 맥에 살짝 걸쳐있다.

그러나 토정의 묘는 맥에서 벗어나 있다.

토정이 생전에 직접 자리를 잡으면서 형들을 좋은 곳에 쓰게 했다.

자기는 가장 나쁜 곳으로 했다.

형들이 염려하자 흉한 것은 자신이 다 감수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기해년(1539) 삼형제는 모두 아들을 낳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이지번의 장자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지무의 차자 이산보는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반면에 토정의 장자 이산두는 충령위에 올랐으나 21세로 요절하였다.

둘째 이산휘는 시묘 살이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셋째 이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사망하였다.

후취 소생 이산겸은 의병장을 지냈으나 역모혐의로 옥사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지리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관치도 않은 것 같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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