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춘천 신숭겸 묘

초암 정만순 2021. 5. 26. 19:02

춘천 신숭겸 묘

 

왕건이 자신 묏자리까지 내준 고려충신

 

 

조선팔대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평산신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3(신숭겸로 272-1)에 위치한다.

북한강 의암호가 앞에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현암삼거리에서 신숭겸로를 따라 가면 갑자기 넓은 들판이 나온다.

입구는 좁은데 안쪽 들판이 넓은 곳은 명촌과 명당이 많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사람이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만한 땅은 첫째 마을 입구인 수구가 좁은 곳, 둘째 안쪽에 탁 트인 들판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들판을 지나며 보면 반듯하게 생긴 귀인봉이 눈에 띤다.

신숭겸 묘의 현무봉으로 마치 귀인이 단좌한 모습이다.

그 뒤의 산들은 중첩으로 현무봉을 감싸고 있다.

가장 멀리 보이는 산은 북배산(869.6m)이며 좌측에는 계관산, 우측에는 가덕산 봉우리가 보인다.

이곳의 태조산은 한북정맥 도마치고개에서 갈라져 나온 화악산(1천468m)이다.

여기서 뻗은 산맥이 응봉(1천436m), 몽덕산(660m), 가덕산(858m)을 중소산으로 일으키고 소조산인 북배산으로 이어진다.

북배산을 출발한 주룡은 중간에 봉우리를 세우며 현무봉으로 이어져 온다.

이를 풍수에서는 기복(起伏)이라고 하는데 기는 봉우리가 솟은 곳, 복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고개를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해 험한 산세는 순한 산세로 변한다.

산세가 순해야 땅의 생기가 모여 혈을 맺는다.

묘역 입구에 서있는 장군의 동상과 재실을 지나면 묘지가 보인다.

중턱에 있는 묘까지 오르는 길 양쪽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도열하듯 서있다.

마치 장군이 병사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봉분 뒤에서 비석 아래를 보면 전순이 보인다.

마치 사람의 넓적한 턱처럼 생겼다.

그 아래로는 하수사가 여러 겹 돌았다.

이는 혈의 결지방법인 좌우선룡에 해당되며 용맥이 멈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다정하게 감싸며 끝이 교차하였다.

수구는 매우 좁고 들판인 명당은 평탄하고 원만하다.

외청룡 너머로는 문필봉·일자문성 등 귀한 산들이 층층이 나열되어 있다.

특히 춘천시내에 있는 봉의산은 이곳을 똑바로 응시하며 길한 기운을 보내준다.

그 너머로는 조산들이 성곽처럼 둘러싸며 큰 국세를 이루었다.

이곳은 한마디로 풍수의 교과서 같은 곳이다.

 



신숭겸 장군 묘는 봉분이 세 개다.

두 개는 가짜고 하나만 진짜다.

여기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전남 곡성 출신인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춘천으로 이주하여 당시 세력가인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날로 폭정을 일삼자 홍유·배현경·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해 고려 개국일등공신에 봉해졌다.

당시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경순왕을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로 향했다.

그러자 견훤은 대구 팔공산 골짜기에 군사들을 매복시킨 후 왕건의 군대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고려 군사 대부분은 전사하였고 왕건도 포위되어 위험에 처했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갈아입고 적진으로 달려 나갔다.

후백제군은 그를 왕건으로 알고 집중 공격하여 목을 베어갔다.

그 틈을 타 왕건은 일반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한참을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니 뒤따르는 병사가 고작 몇 명이 안 되었다.

모두 전사한 것이다.

그대로 갈 수가 없어 전쟁터로 되돌아가보니 자기 병사들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그중 자신의 갑옷을 입은 채 목이 없는 장수가 있었다.

신숭겸이었다.

왕건은 시신을 수습하여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래 도선국사가 왕건의 묏자리로 점지해 준 이곳에 신숭겸을 묻었다.

목이 없으므로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같이 매장하였다.

혹시 모를 도굴에 대비하여 봉분을 두 개 더 만들어 위장을 하였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는 후손들도 모른다고 한다.

일제 때 이곳을 도굴하려고 땅을 파자 엄청난 굉음이 들려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도 이곳을 가면 어떤 것이 진짜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전설은 전설로 남겨놓아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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