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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寶와 삼보사찰

초암 정만순 2021. 2. 25. 19:12

三寶와 삼보사찰


“삼보예경하면 위없는 복의 과보 얻을 수 있어”

불보종찰 통도사
금강계단 부처님 사리 봉안

법보종찰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 팔만대장경

승보종찰 송광사
국사전 고려시대 16국사 진영

 

부처님께서 태어나 열반에 들 때까지 중생 제도를 위해 걸었던 길을 따라 인도성지순례 원력을 세운 상월선원 만행결사가 올해 삼보사찰 순례를 예고했다.

승보종찰 송광사를 출발해 법보종찰 해인사, 불보종찰 통도사까지 행선하겠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삼보(三寶)와 삼보사찰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불교사에서 삼보가 언제 완성됐는지 살펴보고 삼보성립의 의미와 함께 삼보사찰의 특징에 대해 소개한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가 봉안된 불보사찰 통도사 금강계단과 대웅전의 모습.

 

불교에는 변치 않는 세 가지 보배, 삼보가 있다. 첫째는 수승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佛寶),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法寶), 셋째는 부처님 법을 따라 전등의 역사를 이어온 승가(僧寶)를 가리켜 삼보라 한다. 교주인 부처님, 교리, 출가공동체는 불교교단을 성립하는 세 개의 축이기도 하다.

삼보에 대한 귀의(歸依)는 부처님 당시부터 중요한 의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출가하기 위해 또는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삼귀계를 수지해야 했다. 이런 전통은 2600년간 이어져 왔으며, 더 나아가 모든 불교의식의 첫 순서로 삼귀의례를 봉행하고 있다.

불교사적으로 봤을 때 삼보가 형성된 것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한 후 다섯 비구가 출가하면서부터다. 한글대장경 <사분율>31권 ‘수계건도’를 보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공양을 올린 상인 형제는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 우바새가 됐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굴린 후 제자가 된 다섯 비구 또한 마찬가지다. 승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 비구가 출가해 승단이 성립하면서 삼보가 형성됐고 불교교단도 출발했다.

경율론 삼장에서 ‘삼보’란 표현은 자주 등장한다. 빠알리 율장을 모은 <마하박가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의 여섯 번째 제자가 된 야사 비구는 불법승 삼보(tri-ratna)에 귀의했으며, 야사 비구의 아버지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첫 우바새로 기록된다. 또한 대승경전인 <잡아함경> 제1권 ‘수루나경’을 보면 수루나가 사리불 존자를 만나 삼보에 귀의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저는 오늘부터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깨끗하게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爲優婆塞。我從今日已,盡壽命,淸淨歸依三寶)”라고 서원하면서, 불법승 삼보를 이야기했다.

후대에 가서는 삼보에 귀의한 후에 불자들은 오계나 십계 등을 받았고, 출가자들은 구족계를 받으니 삼보를 예경하는 것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제자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덕목이 됐다. <대품반야경>권29에서 “삼보를 거역하거나 불신하면 생사윤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한 것처럼 삼보공경은 윤회를 벗어날 정도로 수승한 공덕을 쌓는 행으로 여겨졌다.

한국불교에서는 삼보를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삼보사찰을 정해 추앙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영축총림 통도사를 불보사찰로 하고,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해인총림 해인사를 법보사찰로 삼았다. 또한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조계총림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 칭했다.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부처님 위신력으로 몽골군 침입을 물리치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불심이 담긴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돼 있다.

 

삼보사찰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통용됐는지 알 수 없지만, 옛 스님들이 남긴 문헌을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확인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스님이 인도와 중국의 조사들을 소개하고 삼국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불교사를 간략하게 소개한 <유형약초(有炯略抄)>(1864)에서 볼 수 있다. 스님은 ‘산사약초(山史畧抄)’에서 삼보사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불보종찰 통도사는 “문수보살이 그린대로 절을 짓고 계단을 세워 통도사라 이름 짓고 후세에 불보사찰로 받들었다(一依文殊指畫 建寺築壇 名曰通度 後人推爲佛寶寺刹)”고 한다.

또 법보사찰 해인사는 “송나라 인종 때 고려 현종이 거제도에서 팔만대장경을 펴내 해인사로 이관하고 법보사찰이라 했다(創寺名海印 至宋仁宗時 高麗 現宗 刊八萬藏經於巨濟島 移鎭于此寺 是爲法寶寺刹)”고 전한다.

승보사찰 송광사는 “고려 보조선사를 비롯해 16조사를 배출, 중생을 제도해 승보사찰로 받들어졌다(“曹溪山松廣寺 高麗普照禪師所剏 以十六祖師次第而出 普利群品故 推爲僧寶寺刹)”고 밝혔다.

용악혜견(龍岳慧堅, 1830~1908)스님이 1902년 집필한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 ‘대장경각급읍지경체파신지봉안기록(大藏經各邑地境遞罷信地奉安記錄)’에는 삼보사찰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해인사 대장경 2만권을 인출해 삼보사찰에 봉안했다(印出二萬卷 奉安三寶寺刹)”고 서술하며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를 언급해 이 시기 삼보사찰이란 표현이 통용됐음을 알 수 있다.

불보종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삼국유사> 권3 탑상 ‘전후소장사리조’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머리뼈와 어금니, 불사리 100과와 부처님께서 수했던 가사를 이운해왔는데, 가사와 함께 사리 3분의1을 통도사 계단에 봉안했다고 한다.

통도사와 금강계단의 위상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지는데, 11세기에는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13세기 원나라 사신이 참배를 하는 등 유명을 떨쳤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왜구로부터 사리를 약탈당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되찾아 다시 금강계단에 봉안했다는 기록을 통도사 ‘사바교주 석가세존 금골사리 부도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역사만큼 성보문화재가 즐비한데 국보인 대웅전은 4면마다 현판이 각각 다른데 동쪽 대웅전(大雄殿), 서쪽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적혔다. 전각 안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금강계단을 향해 예불하도록 돼 있다. 또한 사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로 지정돼 있으며, 통도사성보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불화 등 다양한 불교성보가 전시 중이다.

법보종찰 해인사에는 고려 때 판각한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돼 있다. 고려 현종이 거란침입 극복을 발원하며 초조대장경을 완성했지만 몽골군에 의해 모두 불탔고 지금 해인사에 봉안된 경판은 재조대장경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골 침입을 이겨내자는 원력을 담아 대장도감에서 새겼다.

강화 선원사에 봉안돼 있던 경판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이운됐는데 시기는 명확치 않다. 해인사는 “태조실록 7년(1398)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됐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장경판전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고 부른다. 조선 전기에 건립된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큰 불이 7번이나 나 전각 대다수가 소실되고 6.25 전쟁 당시 폭탄이 떨어질 위기마저도 극복한 위신력 넘치는 전각이다. 또한 경판변형을 최소화 하는 과학적 설계로도 정평이 나 있다. 창의 크기를 다르게 해 공기 순환을 수월하게 하고 숯과 소금, 횟가루, 모래, 찰흙 등으로 지반을 다져 습기와 해충을 막았다. 선조들의 지혜가 더해져 경판은 10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보관될 수 있었고, 판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경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가치를 인정받았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하며 승보종찰의 면모를 자랑한다. 사진은 16국사 진영 모사본이 봉안된 국사전 내부.

 

조계산에 자리한 승보종찰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불교사에서 송광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선사(修禪寺)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다. 세속화된 고려불교의 수행가풍을 바로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정진한 이래 이곳에서 16명의 국사가 배출됐다.

대웅보전 뒤에 자리한 수선사와 국사전(國師殿)은 승보종찰로서 송광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수선사는 선원으로 스님들이 결제 때마다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다. 국보 56호 국사전은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전각으로, 16국사의 진영이 봉안돼 있으며 매년 보조국사 종재일에만 일반에게 개방된다. 안타깝게도 고려 때부터 전해진 16국사 진영 대부분은 1995년에 도난당했다.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고봉국사 법장스님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13명 국사의 진영은 사진으로만 전해졌으나 2018년 복원됐다. 송광사 주지 자공스님은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옛말은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하는 등 인재가 많은 지역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승보종찰로서 송광사 위상은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삼보예경은 부처님 당시부터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삼보사찰로까지 이어지면서 오랜 세월동안 공양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대해 예를 다하지만, 간혹 승단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있다. 삼보의 개념 자체가 승단의 설립과 함께 시작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승보에 대한 예경 없이 불제자라 말하기 어렵다.

도선율사는 <정심계관법(淨心誡觀法)>에서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면 위없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했다. 삼보예경을 통해 한량없는 복의 과보를 얻을 수 있다는 조사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할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