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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와 암자들

초암 정만순 2021. 2. 10. 11:07

[伽藍과 뫼] ⑫ 팔공산 동화사와 암자들

 

처처에 약사여래 모신 ‘약사성지’, 오도재에 서니 구름 밑으로 청산이…

 

오도재 약사여래불 좌상 앞에서 바라본 동화사와 팔공산 일원.

안개 너머로 동화사 통일대불이 보인다.

 

팔공산은 크게 동화사 권역과 
파계사 권역, 갓바위 권역으로 나뉜다. 


팔공산이 동서로 길게 능선을 드리우는데 
동화사가 가운데 자리하고 서쪽에 파계사 
동쪽에 갓바위가 있다. 


동화사 위 미타봉(彌陀峯)에서 
파계사 위 파계재까지 6.2km, 갓바위까지가 7.3km다 

 

동화사 일원을 보여주는 안내도.

 

 

◇ 종정예하 주석하는 팔공총림

지난 9월11일 아침 버스에서 내린 팔공산에는 찬 바람이 불어 닥쳤다.

반팔 등산복이 찬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산 정상은 비구름이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매표소 직원이 나와 비를 들고 청소했다.

기도객으로 보이는 신도들의 차량도 부지런히 들어갔다. 역시 불심 깊은 대구 답다고 생각했다. 

 

팔공총림동화사(八公叢林桐華寺)라고 쓰인 일주문을 지나면 몇 해 전 조성한 아치형 다리가 나온다.

그 위에 팔공선문(八公禪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팔공(八公)은 후삼국 시대 견훤을 쫓다 함정에 빠져 죽게 된 왕건을 살리고 대신 희생한 여덟 공신을 기리는 뜻에서 붙였다.

원래 산 이름이 공산(公山)이었는데 팔공산으로 바뀐 것이다.

 

신라 왕실을 미워한 견훤이 경주를 도륙 낸 반면 왕건은 기존 세력을 끌어 안았다.

견훤이 경주를 침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하게 군사를 냈다가 팔공산에서 대패하고 최악의 위기에 빠진 왕건이 이 지역 사찰과 주민 그리고 팔공산 산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한다.

 

총림(叢林)은 문자 그대로 하면 나무 숲처럼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수도장이다.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 선(禪)으로 꽃피웠다.

숭산 소림사에서 달마 대사가 씨를 뿌려 당대를 거치면서 만개했다.

남종선 북종선으로 나뉘고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불리는 다양한 교파로 가지를 쳤다.

인도불교와 많은 점이 달랐다.

수도생활 방식도 바뀌었다.

인도에서는 유행(流行)하며 탁발했지만 농경사회 중국은 정주생활에 직접 경작했다.

같은 불교이지만 지역 사정과 문화에 따라 수행자의 생활방식도 바뀌었다. 

 

조사를 중심으로 함께 모여 수행하며 자급자족하는 수행공간이 총림이다.

당을 거쳐 송나라 때 체계화됐다.

원조 중국은 북방 침입을 받고 도교가 득세하면서 사라졌다.

통일신라 후기 선(禪)이 이 땅으로 건너와 고려 말 나옹, 태고보우국사 등 간화선 종장에 의해 선종가람이 정립된 뒤 700여년이 흘렀다.

갈수록 더 번창했다.

 

1967년 가야산 해인사의 해인총림이 지정된 뒤 7곳의 총림을 운영 중이다.

그중 동화사 팔공총림에는 종정예하 진제 법원 대종사가 주석하며 선을 지도한다.

현대 한국불교 총림은 종합대학에 해당한다.

교학을 배우는 승가대학, 율사를 양성하는 율학승가대학, 선원 이 셋을 모두 운영한다. 

 

◇ 초대 종정 석우스님 가풍 잇다 

팔공선문을 지나면 호수가 나온다.

호수 건너편 기슭에 설석우스님 부도가 있다.

1955년 일제가 심어놓은 대처제를 종식하고 청정비구승단으로 정화한 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종정으로 모셨으니 설석우스님이다.

세속 나이 마흔이 넘어 금강산 장안사에서 연담(蓮潭)스님을 은사로 득도, 보화(普化)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율사로 명성이 높은 동선스님에게서 체계적으로 수행정진하고 구족계를 받으며 석우(石又) 법호를 받았다.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 등지에서 수행하며 후학을 제접하고 해방 후 가야산 해인사에서 수좌들의 간청에 의해 조실을 맡아 선불교를 일으켰다. 정화 후 종정으로 추대된 뒤 경남 고성 옥천사, 해인사 백련암에서 동화사로 옮겨와 금당에 주석하며 선원을 열고 선풍을 일으켰다.

1958년 법랍 45세, 세수 84세로 입적했다. 

오늘날 동화사는 설석우스님과 사제 상월스님 문손들이 화합하며 일군다. 
 

비로암 삼층석탑. 동화사 창건주 심지대사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 동화사 창건한 심지화상 만나다

동화교를 건너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비로암이다.

율학승가대학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단아한 모습의 3층 석탑이 있고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보물 제247호, 제244호로 지정된 성보다. 심지스님이 관련돼 있다. 

 

심지스님은 오늘날 동화사로 만든 주인공이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 계유년(493년) 극달화상이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등장은 심지스님에 의해서다.

심지(心地)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로 15세에 불도에 들었다.

속리산 영심스님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이어받아 법회를 개설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기일이 늦어 법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마당에 꿇어앉아 예배하고 참회했다.

그렇게 7일을 보냈는데 큰 눈이 내렸다.

심지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사방 10척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다.

불골 간자를 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마루에 올라 던져 떨어진 곳에 당을 지어 모시니 바로 동화사다. 

서쪽에 파계사, 북쪽에 중암암 묘봉암, 동쪽에 환성사, 남쪽에 동화사를 배치하여 팔공산 불교성지 기틀을 닦았다.

겨울철인데도 동화사 주변에 오동나무가 만발하여 동화사(桐華寺)로 불렀다. 

 

비로암 3층 석탑에는 심지대사와 관련된 아픈 사연이 숨어있다.

42대 흥덕왕이 죽은 뒤 왕실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잔이 끊이지 않았다.

왕의 사촌동생과 오촌조카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승리를 안겨준 자가 자기 손으로 앉힌 왕을 몰아내는 등 물고 물리는 비극이 되풀이 됐다.

한 세대 30년 넘게 벌어진 왕궁암투의 비극을 제공한 인물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심지대사의 아버지 헌덕왕이었다.

대사가 출가한 이유도 궁궐 살육에 환멸을 느껴서였다.

세월이 흘러 정쟁의 당사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왕실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왕좌에서 밀려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민애왕을 기리는 탑을 조카이자 손자가 세운 비로암에 조성했다. 
 

금당, 성철스님이 오도송을 읊고 역대 선지식들이 주석하던 유서깊은 선원이다.

 

◇ 근현대 선지식 주석했던 금당선원

비로암을 나와 동화사 경내로 들어갔다.

멀리 팔공산 정상이 구름으로 가렸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당으로 향했다.

기교를 부리지 않았는데 균형이 잡히고 안정된 부도 한기가 눈길을 끈다.

보물 제601호로 고려 초기 조성했다.

 

과거로 돌아간 듯 작고 고색창연한 일주문이 맞는다.

좁은 문으로 금당을 들어서면 이끼 낀 석축으로 쌓은 담이 일주문과 조화를 이룬다.

계단 위를 올라가면 극락전 동서 양측에 크고 웅장한 탑이 반긴다.

죽은 민애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세운 비로암 석탑과 함께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전 양편에 동서 석탑을 세웠고 그 뒤에 다시 극락이라는 뜻의 수마제전(須摩提殿)이 있다. 

 

금당은 한국선불교 메카다.

이미 400~500년 전 선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1900년 경허스님이 개원해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사들이 대부분 금당선원에서 정진했다.

동광, 남옹, 고암스님을 비롯해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서옹, 향곡스님이 이곳서 정진했다.

뿐만 아니라 범룡, 관응스님이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성철스님이 이 곳 금당에서 29세에 오도(悟道)하며 오도송을 불렀다. 

 

한동안 문을 닫았던 금당선원은 1994년 진제 종정예하가 수좌들의 힘을 모아 개원한 이래 지금까지 납자들의 귀의처가 돼왔다.

하루 13시간 수행을 원칙으로 하는 가행정진 도량이다. 

 

193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진제스님은 “세상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삶이 있으니, 네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석우스님의 권유에 해인사로 출가해 1967년 중국 당나라 마조도일 선사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화두를 타파해 향곡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근현대 한국선불교 중흥조인 경허-혜월-운봉-향곡스님으로 전해 내려오는 법맥을 이었다.

동화사 초대 방장으로 조계종 종정으로 선법을 펴고 있다.

경허 향곡 진제스님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의 본류가 이 곳 동화사 금당에서 다시 샘솟았다. 

 

◇ 최초 비구니 교구 동화사

비가 그칠 줄 모른다.

먼발치에서 종정예하가 계신 전각을 바라보고 조사전에 들러 인사 올리고 팔공산으로 향했다.

비가 더 심해지면 팔공산 오르는 일정은 미뤄야 하기에 서둘렀다.

동화사에서 팔공산 미타봉으로 향하는 계곡 주변에 암자가 셋 있는데 모두 비구니 스님들 선원이다. 

종단에서 딱 한번 비구니 본사를 지정한 적이 있는데 동화사다.

1955년 종단 정화가 일어날 때 비구니 스님들이 큰 기여를 했다.

여성 차별이 심하던 일제 시대부터 비구니 스님들은 만공스님 등 비구 스님들의 후원 아래 참선하고 교학에 매진하였으며 특히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비구 스님 못지 않은 선의 종장이 배출됐다.

정화 불사에도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

정화 지도부가 비구니 교구를 할당한 이유다.

 

1955년 정화 후 성문스님을 주지로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로 출발한 동화사는 좋은 교통 입지가 발목을 잡았다.

총무원이 있는 서울로 가는 길목 대구에 자리한 동화사에는 역대 종정 스님들이 주석했다.

경허스님 이래로 내려오는 유서 깊은 금당선원이 있어 당대 최고의 선승 종정스님이 주석할 수 밖에 없었다.

초대 석우스님, 통합종단 종정 효봉스님, 부종정 금오스님이 금당에 머물며 수좌들을 지도했다. 

 

비구니 스님들은 동화사를 나와 운문사로 가서 총림에 버금가는 비구니 가람을 일군다.

비록 비구니 교구 지위는 금방 상실했지만 비구니교단의 선풍은 팔공산에서 더 크게 일어났다.

동화사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비구니 암자가 그 역사를 전해준다. 
 

비구니 선원으로 유명한 부도암.

 

◇ 상명스님이 선원 일으킨 부도암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부도암(浮屠庵)이다.

원래 큰 절 부도전 곁에 있어 부도암이라 했는데 조선 효종9년(1658년) 도오스님이 창건하고 정조14년(1790) 춘파스님이 중수했다.

동화사 산내 암자중 규모가 가장 커 한때 스님이 72명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1955년 종단정화로 동화사가 비구니 본찰로 지정될 때 상명(尙明)스님이 금당 원주 소임을 맡았는데 동화사가 비구 본찰이 되자 상명스님은 부도암 감원으로 머물며 선원을 열었다.

원래 부도암선원은 비구니 성문스님이 1927년 직지사에서 이 곳으로 오면서 선원이 시작됐었다.

성문스님이 부도암으로 올 때 청담스님의 속가 어머니로 성문스님 사제가 되는 성인(性仁)스님도 함께 옮겨왔다.  

퇴락한 사찰을 상명스님이 맡아 가람을 일신하였으며 1980년대부터 상명스님의 제자 동호스님이 뒤를 이어 오늘과 같은 가람을 일궜다.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나는 등 아픔과 고난을 겪었지만 참선정진하며 불사를 일으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으로 우뚝 섰다. 

성문 정행 본공 혜해 상명 무착 성타 도용 혜융 지광 등 많은 비구니 선객이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2000년 교육원으로부터 비구니 기초선원으로 지정받아 매년 30여명의 비구니 선객을 배출했다. 

해제(解制) 후의 선원은 고요했다.

댓돌 위 가지런히 놓인 신발과 산행용 지팡이가 수좌 스님들이 공부중임을 보여주었다. 
 

내원암.

양진암.

 

◇ 장일스님 중건한 내원암, 성연스님의 양진암 

다시 팔공산으로 올랐다.

많은 비 때문에 계곡에는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과 자갈이 어지럽게 놓여있고 토사가 흘러내리고 길이 패여 있었다.

공원 관리소에서 나온 인부들이 전기선을 수선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가끔 차량이 올라갔다.

 

부도암에서 조금 더 가자 내원암이 나왔다.

이 곳 역시 비구니 스님 수행처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정갈하며 단정했다. 조선 인조 4년(1626년) 유찬(惟贊)스님이 창건했다.

순조 23년(1823년) 해월과 제월스님이 1937년 보월스님이 중창했다.

퇴락한 사찰은 1962년 장일(長一)스님이 중건했다. 

비구니계 원로인 도림장일(道林長一, 1916~1997)스님은 팔공산 부인사에서 오전(悟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평생 납자로 수행 정진했다.

해인사 국일암에서 내원암으로 옮겨왔으며 종단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하고 1958년 석남사에서 최초의 비구니 3년 결사에 동참해 성만한, 비구니 선사로 존경받았다.

비구니 최대 문중인 청해문도 어른으로 후학들이 많다. 

 

내원암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비구니 선원이 있다.

양진암(養眞庵)이다.

절 입구에 양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양진(養眞)이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리니, 그것이 양진공덕(養眞功德)이라 했다.

이곳 양진암은 조선조 1743년에 무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며, 그 뒤 1898년(광무 2년)에 춘파화상이 증수했다고 전해지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건물이 퇴락하여 현재의 배성연 노스님께서 정화 이후부터 지금까지 주석하시면서 1980년에 선방을 개축하고, 이어서 법보전, 탑, 육화당, 관음전을 신축하시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은 5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참선수행 정진중이시다.”

양진암 역시 조용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는 가람이다.

양진암을 오늘의 가람으로 중건한 금송성연(金松性蓮)스님은 평생 선객(禪客)으로 수행 정진한 비구니계 어른이다.

20대 중반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향곡, 청담스님 회상에서 혜해, 장일, 무착, 응민스님 등 비구니 수좌들과 함께 정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5년 이 곳 양진암으로 주석처를 옮겨 선방을 개원해 수좌들과 수행에 전념했다.

2012년 양진암에서 세수 93세, 법랍 81세로 입적했다.

장일스님이 중건한 내원암이 바로 곁이니 해방 후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청정 정법의 기치를 들었던 문경 봉암사의 선풍이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이 곳 팔공산에서 맥이 이어진 듯 하다. 
 

염불암.

 

◇ 운허스님 사적기 눈길 염불암 

양진암까지는 아스팔트 길로 편히 왔다면 염불암 가는 길은 산길이다.

차도도 나있지만 다시 내려가야 한다.

양진암 뒤로 난 산길을 택했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이다.

30분 가량 걸었을까?

제법 잘 정비된 등산로가 나타나더니 염불암 표석이 나온다.

지나온 세 암자와 달리 염불암은 산 정상 가까이 있었다.

작은 암자였다.

산 능선 하나 건넜을 뿐인데 비 피해가 엄청나 보였다.

암자 옆으로 큰 물이 휩쓸고 간 듯 자갈이 씻겨 내려가고 패인 곳이 많았다. 

벼루를 만들던 흑색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이 유리 안에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모양과 색깔이다.

법당 뒤 마애불이 눈길을 끈다.

큰 바위 서쪽면과 남쪽면에 각각 아미타불과 보살상을 새겼다.

고려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설명은 관음불이라하는데 운허스님은 사적기에 문수보살이라고 했다.

염불암 마애불좌상 및 보살좌상이 정식 명칭이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염불암이라고 불렀다. 

1964년 운허스님이 지은, 염불암 극락전 중건비문에 따르면 염불암은 10세기 초반 신라 후기에 조성한 천년고찰이다.

심지스님에 이어 동화사 사세를 확장한 영조(靈照)스님이 창건했다.

염불암 위에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견훤 군대에 쫓겨 공산에 몸을 숨길 때 이야기가 담긴 1인 석굴과, 팔공산에서 수선결사를 발원한 보조국사 지눌의 눌암굴(訥庵窟)이 있다. 

굳게 닫힌 방에서 노스님이 나오더니 사시예불 종성을 친다.

참선 정진하는 스님인 듯 간단하게 사시불공을 마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염불암 마애불.

동화사 약사대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도재의 약사여래불.

 

◇ 산 곳곳에 약사여래불

미타봉 정상 아래 또 한기의 석조약사여래 입상을 만난다.

팔공산에는 처처에 마애불이다.

그 중에서도 약사여래불이 많아 팔공산은 가히 약사여래 신앙의 총본산이라 일컬을만 하다.

동화사 입구 마애약사여래입상(보물 제243호)를 비롯하여 동화사 대웅전 삼존불, 관봉 석조약사여래좌상, 중봉의 석조 약사여래입상, 미타봉의 석조약사여래입상, 비로봉 아래 오도재의 마애약사여래 좌상, 삼성암 마애약사여래입상 등 곳곳에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여래부처님은 과거 보살행을 닦을 때 12대원(大願)을 세웠다.

모든 병을 구원하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며 나쁜 왕이나 강도로부터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며 일체 중생의 배고픔을 면하고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얻게 하는 12가지 원력을 세운 약사여래불은 코로나 19로 인한 질병과 실업 부동산 폭등 등 경제난에 허덕이고 고통받는 오늘날 중생들이 믿고 의지해야 하는 귀의처이다.

 

오도재 마애여래좌상에 참배하고 팔공산을 내려 보는데 신기하게 안개가 걷힌다.

동화사 방향만 그러하다.

큰 불상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동화사 통일대불이다.

1992년 민족통일을 발원하며 세운 높이 17m의 약사여래 입상이다.

팔공산 최정상 비로봉에서부터 양 방향은 조금씩 내려가며 능선이 이어진다.

오도재에서 서봉(삼성봉)을 거쳐 톱날처럼 날카로운 암벽이 줄지어 서있다 하여 이름 붙인 톱날능선을 지나 마당재까지가 동화사 권역이다.  

 

파계사로 내려가는 계곡은 깊은 생채기가 났다.

불어난 물에 못 이겨 계곡 곳곳이 패이고 찢겨 이리저리 돌과 자갈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길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계곡 아래 자리한 파계사도 자칫 큰 화를 입을 뻔 했다.

기후 변화는 이처럼 전에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

코로나19와 폭우 2020년 전 세계를 휩쓰는 재앙과 전염병은 그 연원을 따져 가면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다. 좀 더 편하게 살고, 물질이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욕망이 자연을 힘들게 했다.

약사여래는 “모든 병이 몸에 닥쳐 지킬 수 없고 의지할 곳 없고 일체 의약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가 나의 이름을 들으면 모든 병고가 깨끗이 없어지리라”는 원을 세웠다.

그 원에 힘입어 질병과 재해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했다. 
 

파계사.

 

◼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성철스님 10년 장좌불와 성전암
수많은 율사 배출 영산율원 파계사

 

동화사 말사 파계사는 804년(신라 애장왕5) 심지왕사가 창건하고 1605년 계관이 중창, 숙종 대에 현응스님이 삼창했다. 

파계사 용파선사가 숙종의 청을 받아 왕자 탄생 백일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날 무렵 왕자로 태어날만한 인연은 도반인 농산스님 뿐이었다.

이 인연을 농산스님에게 전하고 성군이 될 것을 부탁하니 그대로 앉아 열반에 든 뒤 숙빈 최씨 꿈에 아들로 태어난다고 현몽했다.

영조 탄생에 얽힌 이야기다.  

 

파계(把溪)는 인근 아홉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을 막아 흩어지는 지기(地氣)를 막는다는 뜻에서 나왔다.

현대 파계사는 율원으로 유명하다.

해인사 율원을 함께 마친 성우스님과 철우스님이 단위 사찰 최초로 파계사에 영산율원을 세워 수많은 율사를 배출했다. 

 

파계사에서 2km 가량 올라가면 성전암이다.

성전(聖殿)은 왕자를 낳은 성스러운 기운이 모인 집이라는 의미다.

아스팔트 길이 이어지다 끝이 나고 산 길을 올라야 한다.

산 정상 아래 간신히 자리한 성전암에는 산철인데도 참선 정진하는 수좌 스님 몇 명이 보였다.

암자에는 대중후원을 권선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파계사 중창 주인공인 현응스님 법명을 따 현응선원이다.

성철스님의 10년 장좌불와 전설이 서린 이 곳은 근세 최고승이 대부분 거쳐갔다.

만공선사를 비롯하여 혜월 고봉 금봉 고송 구산 석암 고암 서옹 혜암 법전 철웅스님이 가행정진했다.

그 한 명 한 명이 종단사와 한국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선지식이다. 

 

성철스님은 성전암에 불공 드리러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쳤다.

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은 “부산 서면 고철물 시장에서 철조망을 구입해 암자 주변을 완전히 둘러막고 입구에는 문을 달고 안쪽에다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다”고 회상기에 썼다. 

성철스님은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까지 성전암에 머물렀다.

성전암에서 내려오다 파계사 못 미쳐 정갈한 암자가 나온다.

대비암이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한 도원스님이 주석하는 곳이다. 
 

성전암.

 

 

 

 

 

동화사부도군[ 桐華寺浮屠群 ]

 

 

 

높이 1.41m∼3.32m.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동화사에 이르는 입구의 동화문을 지나 돌다리 북쪽 언덕에 늘어서 있는 이 부도군은 스님들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묘탑(墓塔)이다.

 

조성시기가 가장 앞서는 고운당묘탑(孤雲堂墓塔, 높이 188㎝, 1676년)을 비롯하여 계영당극린대사탑(桂影堂克麟大師塔, 높이 229㎝, 1692년)·성임당축존대사탑(性任堂竺尊大師塔, 높이 233㎝, 1700년)·상봉정원대사탑(霜峯淨源大師塔, 높이 251㎝, 1709년)·함우당묘탑(涵宇堂墓塔, 높이 265㎝, 1720년)·기성대사탑(箕城大師塔, 높이 234㎝, 1764년)·성암당해정대사탑(聖巖堂海淨大師塔, 높이 215㎝, 1839년)·제월당대사탑(霽月堂大師塔, 높이 332㎝, 1927년)과 조성시기를 알지 못하는 고한당묘탑(孤閑堂墓塔, 높이 141㎝)·무명탑(無名塔, 높이 241㎝) 등 모두 10기이다.

 

이들 부도군의 형식은 크게 통일신라 이래로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과,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되어버린 종형(鐘形) 두 가지로 구분지어진다.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종형 승탑은 형태를 지극히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는 반면에, 앙련(仰蓮)과 복련대(伏蓮帶)를 갖추고 있는 팔각원당형 승탑은 둥근 형태의 탑신 위에 4각 또는 8각 모양의 지붕돌 [屋蓋石]을 얹어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둔중하고 경직된 지붕들의 처리 등 제작기법과, 세부적인 양식 특징이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앞의 대구 도학동 승탑(보물 제601호)에 비해 보다 단순하고 도식화되어 있어 조선시대 후반에 조성된 승탑임을 짐작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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