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탐방 - 동호서당 은행나무(보호수)
@ 탐방일자 : 2020. 11. 07
동내동
동내동의 북쪽으로 팔공산괴(八公山塊)[팔공산 주맥]에서 남으로 이어진 초례봉(醮禮峰)[649m]이 솟아있으며, 초례봉에서 남쪽으로 능선과 계곡이 뻗어 내려와 동내동 중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산줄기의 말단부 산기슭에 이르러 너른 평지가 펼쳐지며 시가지가 조성되어있다.
시가지 북쪽 산기슭에는 저수지 동곡지가 축조되어 있으며, 남동쪽 경계부에는 조로봉[196.6m]이 솟아있다
동내동은 동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행정동은 안심3·4동이다.
안심3·4동에는 동내동을 비롯하여 인근의 11개 법정동이 속해 있다.
동내동은 동쪽으로는 숙천동, 서쪽으로는 신서동, 남쪽으로는 괴전동, 북동쪽으로는 내곡동과 접하고 있다.
동내동의 북부와 중부 지역은 산지와 골짜기가 계속 이어져 거주를 하거나 경작할 만한 토지가 적지만, 산지의 남쪽 끝에 와서는 평지가 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예로부터 계곡 하천을 따라 내상동, 내하동 등의 자연마을이 집촌을 이루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논농사가 행해졌던 곳이었으나,
2006년 이후 대구혁신도시 사업지구로 개발되고 있다.
현재 대구혁신도시 내 대구경북 첨단의료복합단지로 지정되어 대구경북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을 비롯한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의 지원센터, 실험동물센터, 의약생산센터 등 여러 기관이 입지해 있으며, 그 외에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동내혁신파출소, 상업서비스시설의 입지도 이루어져, 자연과 조화된 첨단 의료신시가지로 변모하고 있다. 동
내동의 남단부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동호서당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1112-2
동호서당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서혁신지구 북동쪽에 있다.
동호유적공원 안에 동호서당이 있다.
동호서당은 1820년(순조 20)에 창건한 동호사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후학을 양성하는 동호서당으로 바뀌었다.
동호서당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이 되었다가, 1875년(고종 12)에 중건하였다.
그 후 1921년에 동호서당으로 중수를 했다.
동호서당 주변 지역에 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2013년 12월에 중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호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 2칸 방, 우측 2칸 마루이며, 2칸 방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담장은 상부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며, 대문은 1칸 평대문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을 비롯한 대구광역시 동구 안심 일대는 2010년 이후 신서혁신지구에 편입되어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호서당이 사라지지 않고 동호유적공원으로 명명된 공원 내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관리는 장수황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동호서당(東湖書堂)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91번지에 있다.
세칭 '동구 혁신도시' 안으로 들어가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거의 닿았을 즈음에야 만날 수 있는 서당이다. 이름이 동호서원이 아니라 동호서당인 것을 보면 이곳에는 사당(祠堂)이 없다.
하지만 서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첫 문장은 '이 건물은 의병장 면와 황경림(勉窩 黃慶霖, 1566-1629)을 위하여 하양현의 사림(士林)들이 1820년에 세운 동호사(東湖祠)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부터 말한다.
1820년 처음 건립되던 당시에는 서당이 아니라 사당이었다는 뜻이다.
1872년 서원 철폐령을 겪은 동호사는 '1875년 본 건물을 중건하였고, 1921년 중수하면서 서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2013년 12월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탓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동호서당 건물은 아직 대패질 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듯한 새 목재와, 회색빛 창연한 옛날 목재들로 뒤섞여 있다.
동호서당은 왼쪽에 온돌방 두 칸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마루를 두 칸 두었다.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로 방을 놓지 않은 점이 눈길을 끈다.
안내판은 동호서당이 '전반적으로 소박하게 건물을 꾸몄다'라고 종합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론 안내판이 황경림에 대한 해설을 빠뜨릴 리 없다.
'조선 세종 때 정승이던 황희의 후손으로 이곳 동내동 (황씨의)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조상)'인 황경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양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수, 곽재우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을 높게 평가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사후 창의공신(倡義功臣)의 휘호를 받았다.'
서당 앞뜰을 좌우로 가득 채우고 있는 두 그루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람하다.
나무 앞에는 이 두 그루 은행나무가 '수령(나무의 나이) 200년, 수고(나무의 높이) 20m, 나무둘레 1.2m'이고, 2000년 11월 18일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보호수의 특징(연혁 및 전설) : 조선 후기 서원 철폐 시기에 재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재실의 무사 건재를 기원하면서 옮겨심었다'로 끝난다.
동호서당은 뒤편에도 특별한 볼거리를 거느리고 있다. 선사 유적이다.
고인돌 등 역사 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서당 바로 뒤 개울 건너 얕은 구릉에 모아 놓았는데, 하나하나 친절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답사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땡볕이 뜨겁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도 전혀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늘을 푸른 보호 시설로 덮어놓았다.
이만하면 동호서당은 선사 시대와 임진왜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역사유적지라 하겠다.
은행나무(보호수)
보호수 내력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동 91
* 수종 : 은행나무
* 지정번호 2-19
* 지정일자 : 2000. 11. 18
* 나무규격
- 수령 : 200년
- 수고 : 20m
- 둘레 : 1.2m
동호유적공원(동내동 지석묘군)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일대에 분포하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포함한 분묘군.
대구 동내동 지석묘 4기는 모두 대구혁신도시 내 동호유적공원[선사유적공원]으로 이전되어 본래 모습을 벗어난 상태이다.
대구 동내동 지석묘 상석들은 대부분 직사각형 또는 부정형이며 부분적으로 깨어져 나간 것도 있다.
하부구조는 흐트러져 버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깬 돌을 평평하게 쌓아 석관의 형태를 짠 구조이다.
별도로 석관 상부에 뚜껑돌을 덮은 후 상석을 올린 경우도 있다.
주변의 하부구조는 깬 돌을 눕혀 쌓은 것이 다수를 차지하며, 판석을 세워 짠 구조도 일부 확인된다.
대구 동내동 지석묘는 모두 발굴 조사되었다.
동내동 고인돌④에서만 돌로 만든 가락바퀴 2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변 하부구조인 돌널무덤들에서는 붉은간토기, 이단병식석검(二段柄式石劍)[자루를 두 계단으로 만든 돌칼], 돌로 만든 화살촉 등이 출토되어 돌널무덤 조성 당시 부장 양상을 잘 알 수 있다.
그외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돌칼, 돌도끼, 부리형석기, 그물추 등이 출토된 바 있다.
동곡지
선사유적공원 북서쪽에 위치한 저수지이다
초례봉 골짜기 물이 모인 곳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초례봉 등산로 기점 중 한 곳이다
#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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