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大邱 老巨樹

비슬산 도성암 보호수

초암 정만순 2020. 8. 29. 20:33

비슬산 도성암 보호수

 

 

@ 탐방일 : 2020. 08. 29

 

도성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에 속하는 유가사의 부속 암자.

 

 

신라 혜공왕 때 도성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982년(성종 1) 성범 대사()가 만일미타 도량()을 열고 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도성 대사와 관기 대사()가 함께 수행하였던 일화와 성범 대사의 만일미타 도량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말 곽진호(), 곽림도(), 장식() 등 같은 지방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승려 수준()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1975년 증축 불사를 일으켜 선원() 등의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성암은 비슬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남서향으로 자리한 대웅보전(殿)을 중심으로 좌측에 산신각이 위치하고, 우측 승방과 대웅보전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 암자의 중심부를 이룬다.

참선 도장으로 활용되고 있어 규모 확장이 요구되고 있으며, 현대식 조적조 건물이 무질서하게 세워져 산사의 아름다움이 다소 상실되었으나 옛 멋은 그런 대로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식() 건물로 매우 아담하고 균제미가 뛰어난 건물 외관을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에는 조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사명당() 영정()과 후불 탱화가 걸려 있고, 승방에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창건주 도성 대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앞뜰에는 높이 246㎝의 탑이 조성되어 있다.

탑신은 2단의 괴임이 각출된 지대석 위체 태주를 모각한 1층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탱주가 모각된 1석의 중석이 있다. 3단의 옥신 괘임을 가진 상대 갑석() 위로는 2매의 옥신석()과 2매의 옥개석()만 있다.

옥개 받침은 4단이며, 낙수면은 다소 완만하고 추녀 끝은 경쾌하게 반전되어 있다.

상륜 부위에는 자연석으로 여겨지는 1석의 구조물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지붕 돌의 체감 비율()을 감안하면 삼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성 연대는 도성암의 개창 연대와 동일한 신라혜공왕[8세기] 때로 추측된다

 

 

 도성, 관기스님

 

비슬산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삼국유사>의 저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스님이다.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이라고 슬로건을 내 걸었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경산시이고, 70여 년의 승려생활 중 거의 절반을 보내며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자 득도한 곳이 비슬산이다.

그러나 역저 <삼국유사>에 비슬산에 관한 기술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비슬산의 유래를 밝힌 점과 몇 종류의 나무이야기가 있는 점은 매우 뜻 깊다.

 

피은(避隱) 제8 “포산이성(包山二聖)” 즉 ‘포산의 두 성사’에 의하면 포산은 원래 소슬산(所瑟山)했는데 소슬이라는 말이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싸다(包)는 뜻과 같아 쌀 포(包)자를 써서 포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두 성사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다.

“신라시대 포산에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니 관기(觀機)는 남쪽의 암자에, 도성(道成)은 북쪽 굴속에 살았다.

10여 리 떨어졌지만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늘 서로 왕래했다.

남쪽에 사는 관기가 북쪽에 살고 있는 도성을 보고 싶어 하면 나무들이 북쪽으로 구부러져 도성을 영접하는 자세를 취하고 반대일 경우에는 남쪽으로 구부러져 관기가 그 뜻을 알고 여러 해를 지냈다.

도성은 그가 거처하는 곳의 뒤에 있는 높은 바위에서 언제나 좌선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틈에서 나와 온 몸이 허공으로 올라가 버려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수창군(현, 수성구 일대)에 가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관기 또한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두 성사의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도 그 터 모두가 남아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몇 길로서 뒷날 사람들이 그 굴 아래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송나라 태종의 연호) 7년(982) 승려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아미타불이 주관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여 만일(萬日)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50년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니 여러 번 특이한 상서가 있었다.

지금 산중에는 아홉 성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들이다.

 

다음과 같이 찬미(讚美)한다

 

달빛 밟고 왕래하며 운천(雲泉, 구름이 일고 샘이 솟는 곳)을 희롱하던

두 늙은이의 풍류 몇 백 년이 흘렀나.

연하(煙霞) 가득한 골짜기에 고목만 남았는데

누운 듯 일어선 듯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세.

 

반(木+般)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木 +牒)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떡갈나무라 한다.

반사(木+般師), 첩사(木+牒師) 두 스님은 오래 동안 바위 사이에 숨어 지냈을 뿐 인간 세상과는 교분이 없었다.

두 분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워와 더위, 습기를 막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을 뿐이다.

그래서 반사 첩사로 호를 삼았다.

이는 곧 옛날 세속을 떠나 숨어사는 사람들의 뛰어난 운치가 이와 같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따라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무르면서 두 스님이 남긴 일들을 기록하여 두었는데 이제 그것을 함께 적는다.

 

지모와 황정으로 배를 채우고

가린 옷은 나뭇잎, 누에치고 베 짠 것 아니네.

찬 솔바람 쏴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에서 나무꾼 돌아오네.

깊은 밤 헤치고 달 빛 향해 앉으니

반신은 시원히 바람 따라 나는 듯

떨어진 부들자리 가로누워 단잠 들면

꿈속의 혼도 세속에 얽매이지 않네.

구름 놀다 가버린 두 암자의 빈터에는

산 사슴만 뛰놀 뿐 인적은 드물어라. ”

 

이상이 <삼국유사>의 피은 제8 “포산이성” 즉 비슬산에 수도했던 관기와 도성 두 스님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한 글이다.

주로 나무에 관련된 부분이다. 이글을 통해서 관기, 도성 두 스님의 마음을 나무가 미리알고 구부러지는 기이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가 사람의 마음에 감응한다는 것은 여러 실험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하물며 수행이 깊은 고승이기에 이 현상을 전설로 치부할 수만 없을 것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즉 나무와 두 스님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두 성사의 이야기로 확인된 셈이다.

이에 일연(一然)은 두 스님의 일을 ‘지모(知母)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우며 가린 것은 나뭇잎’이라고 노래했다.

지모(知母)는 “지모(知母)”로, 황정(黃精)은 “둥굴레”로 불리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런 나무나 풀 이야기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비슬산은 식물 다양성이 높은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호수(느티나무)

 

 

 

# 동영상

 

 

 

 

 

% 사진첩

 

 

유가사에서 도성암까지 1.7km의 산길이 이어진다

 

 

도성암 입구 표지석

 

 

도성선원

 

도성암 전경

 

 

삼충석탑

 

대웅전

 

 

석탑과 보호수

 

 

 

울창한 송림

 

 

삼성각

 

 

멀리 관기봉이 보인다

 

보호수 느티나무

 

 

 

대웅전 뒤쪽 도성바위

 

도성선원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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