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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본리세거지와 보호수

초암 정만순 2020. 8. 9. 10:42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와 보호수

 

 

@ 탐방일 : 2020. 08. 09

 

남평문씨본리세거지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총 규모 11,701㎡(3,546평)에 이른다.

 

18세기 초부터 남평문씨 일족이 들어와 터를 잡고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던 곳이다.

1715년에 문재철(文在徹)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하며,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가 터를 닦았다고도 한다.

이곳은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라 한다.

그 터에 남평문씨 일족이 들어온 후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구획을 정리하고 터전과 도로를 반듯하게 열어 집을 짓고 세거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천내천이 흐르고 있어 명당의 기본적인 요건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지금은 조선시대 말에 지은 아홉 채의 전통 한옥과 정자 두 채 등 총 11호 54동의 건물이 있다.

주거지의 도로에 면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으며,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다.

건물들은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나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정미(精微)한 고졸미(古拙美)를 갖추고 있는데,

특히 계획된 도로망과 격조 높은 흙담이 건물을 에워싸면서 주위의 산야(山野)와도 잘 조화되고 있으며,

당내친(堂內親)인 대소가(大小家)가 큰집의 앞과 좌우에 새집을 지어 분가한 건물 배치는 매우 이채로운데,

최소 규모의 씨족 마을로,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수봉정사(壽峰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인수문고 (仁壽文庫) 등이 있다.

특히 수봉정사는 대표적인 건물로 세거터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일족의 모임도 열던 큰 건물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한다.

광거당은 1873년 후은공(後隱公)과 문성공(文成公)이 중국 서적 수천권을 수집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후 문중의 자제들을 위한 공간으로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로 쓰였다.

문중서고인 인수문고는 위의 서적과 규장각 도서를 포함하여 1만 여 권의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보존하던 건물이다.

처음에는 소규모이던 인수문고의 서고를 후에 크게 지었고, 그 이웃에 도서의 열람을 위한 도서열람실도 따로 꾸며 놓았다.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고가의 경우가 특히 그러해서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같은 집인데도 훈기가 돌고 윤기가 흘러 집이 돋보인다.

반대로 아무리 가치 있고 훌륭한 집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끊어지면 찬바람이 휘감기고 허망함이 배어나와 집의 품격이 떨어지고 수명은 줄어든다.

어느덧 미덕이 되어버린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옛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화원읍 본리리.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가 그곳이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다.

듣기로는 여기에 터를 잡은 마을사람들의 조상이 정전법(井田法)에서 땅을 나누듯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집을 지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 모습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동네가 별로 크지 않은데다 길이 곧다보니 유현한 풍정을 바랄 수도 없고 골목 끝에서 매번 되짚어 나와야 하는 수고로움(?)도 따르지만 이 흙돌담길은 차례차례 살펴보는 게 좋다.

집에 사람이 살 때, 더구나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베풀어질 때 ‘사람 사는 집’의 윤기가 담장을 넘어 골목에까지 반짝임을 실감할 수 있다.

인흥마을의 흙돌담길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다.

 

잔자갈이 곱게 깔려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골목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이 높은 담장이다.

민가의 담치고는 상당히 높아 낮아야 2m 안팎, 높으면 3m 정도에 이른다

골목골목을 두른 담장은 무너진 구석은 물론 흙 한줌, 돌 하나 빠지거나 흘러내린 곳이 없다.

담장 아래는 길게 자란 잡풀 한 포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능소화가 어느 집 대문 앞을 밝히거나 줄기에 매달려 담 위를 기어가는 것도 이 골목 안이다.

비록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건물이 폐쇄되어 더더욱) 집안까지 살펴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골목만 차분차분 누비고 다녀도 마을의 풍치를 가늠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문익점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출생과 관직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옴

1360년 계품사(啓稟使)로 원(元) 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緜)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7년 6월 13일자에는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에도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수는 차이가 있지만 붓두껍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화재배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鄕里)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木棉)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정사품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업적평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가져와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숭앙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태조는 그에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의 직위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封號)를 추증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그의 아들인 문중용(文中庸)에게 사헌감찰(司憲監察)의 벼슬을 내렸다.

세조 때에는 그의 관향(貫鄕)에 사당을 세워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그를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에서 ‘부민후(富民候)’로 추봉하는 한편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정조 때인 1785년에는 그의 위패를 안치한 서원에 임금이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액자를 보냈다.

한편, 최근 백제 시대의 유적지인 부여 능산리 절터의 출토 유물에서 목면으로 된 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면직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면직이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양서(梁書)≫, ≪한원(翰苑)≫ 등의 기록을 근거로 품종은 다르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 마, 면 등을 직조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면서 면직물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비판되고 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 재배와 보급이 면직물 생산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백성들의 옷감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문익점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문익점 면화 시배지(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의 묘소와 함께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보호수

회화나무

 

 

소나무 전나무

 

 

 

# 동영상

 

 

 

 

$ 사진첩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안내판

 

세거지 전경

배산임수의 명당이네

 

달의 연인 촬영지 이기도 하다

 

목화밭을 뒤로하고 단정히 앉아걔신 문익점 선생 동상

 

 

입구의 은행나무

 

목화밭

인흥사지와 석탑

 

원래 남평 문씨는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을 본관으로 하는데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가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원래 고려의 대찰인 인흥사가 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오늘의 인흥마을을 새로 열었다고 한다

 

문익점의 붓과 목화씨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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