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영숲6기 노거수탐방

영숲6기 노거수 탐방 계획(2020.10.10)

초암 정만순 2020. 1. 28. 18:12




영숲6기 노거수 탐방 계획(2020.10.10)




  일자 : 2020년 10월 10일

 집결지 / 시각 :

  장소 : 칠곡군

 탐방 경로 :

     매원마을 해은고택 회화나무 ->  귀암종택 회화나무 배롱나무 향나무 ->  동산재 돌배나무 ->

      각산리  대흥사 은행나무




매원마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3길 104-10(매원리 341)





경상북도 칠곡군의 매원마을.

경주 양동 마을, 안동 하회 마을과 함께 영남 3대 반촌으로 꼽히던 곳이다

반촌이란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던 마을을 일컫는 말이다.

칠곡군의 볼거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왜관에서 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용두산과 죽곡산, 아망산, 금무산, 산두산, 자고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매화꽃과 같다고 하여 매원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623년 조선 인조 때 광주 이씨 석담 이윤우 선생이 옮겨오며 집성촌을 이루어 최대 번성기에는 400여 채의 가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안타깝게도 1950년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가옥이 소실되어 현재는 60여 채만 남게 되었다.

2012년에 마을을 재정비하자는 종합 정비 계획이 세워지면서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해은고택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숙종대사헌을 지낸 박곡() 이원록()의 후손인 이동유가 1788년(정조 12)에 정침을, 1816년(순조 16)에 사랑채를 건립하였다.


칠곡 해은 고택은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 마당이 있으며, 사랑 마당과 단을 달리 하여 안마당이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 곳간채, 안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의 우측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반, 측면 1칸 규모로 맞배 기와집이다.

기단은 약 60㎝ 가량 높이로 자연석 기단을 설치한 후 위에 덤벙 주추를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평면 구성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을 연접시키고, 우측에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 위치한 건넌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전면에 퇴를 두고 측면으로도 106㎝ 정도의 넓은 퇴를 설치하고 배면에는 60㎝ 정도의 벽장을 설치하였다.

안채는 3량가인데 대량 위에는 제형 판대공[사다리꼴 형태의 판재로 된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을 다소 높게 조성한 후 덤벙 주추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전면 좌측의 4본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 구성은 좌로부터 2통칸 대청, 2칸 사랑방, 문간방, 중문간 순으로 연접되어 있는데, 대청과 사랑방 사이에는 4분합 들문을 달고, 2칸의 사랑방 사이에는 네짝 미세기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4칸을 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꾸몄다.

사랑방 배면에는 출입문을 두어 안채와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의 뒤로는 가림 담장을 설치하여 내외의 공간 구분을 확연히 하였다.

 사랑채는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간결한 결구법을 보이고 있다.

온돌방의 상부의 보는 내진주 위에서 합보시켰다.

곳간채는 일반적으로 수장 공간으로 꾸미나 칠곡 해은 고택은 좌측 부분에 온돌방을 들여 아래채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좌측간은 원래 우물마루를 깔았으나 현재는 안채에서 사당으로 출입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온돌방 우측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고방()과 토상의 곳간을 연접시켜 곳간채를 구성하였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에 토석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전면에 툇간을 둔 3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전면의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이익공으로 장식하였다.






회화나무







귀암종택


왜관읍 석전리 625


귀암공 종택은 호가 귀암()인 이원정()의 고택으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국도 903호선의 반계리 방면으로 500m 가다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귀암공 종택이 위치하고 있다.

귀암공 종택은 1670년(현종 11) 이원종이 양주목사 재임 때 돌밭[현 석전리]에 신기제택을 세워 매원에서 귀바우로 이거했다고 전하며, 사당·대문채는 1670년대 건물이며 현재의 정침과 사랑채는 상량문에 의하면 1937년 3월 6일 입주(), 18일 상량 재건되었다고 전한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 구성은 중앙의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 2칸 안방을 연접시키고 우측에는 2칸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 마루를 설치하고 2짝 유리 미닫이문을 달았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 구성은 좌로부터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온돌방 3칸을 연접시켰는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칸마루를 설치하고 2짝 유리 미닫이문을 달았다.


회화나무







향나무




배롱나무






동산재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구바위마을 남쪽에 미군부대와 마주한 동산에 위치한다.

구바위마을은 석전리 중심에 있는 마을로 마을 남쪽에 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마을이 들어선 시기는 미상이나 광주인 이광복이 약 400년 전 선조초에 지천면 상지에서 이곳으로 이거정착한 후 그 후손들이 세거해 오고 있다.


칠곡에 입향, 정착한 광주이씨의 3대 재사 3동이 품자형()으로 일곽을 이루고, 그 주변으로는 관리사와 이원정 신도비, 연못 등으로 구성된 광주이씨 석전문중의 대표 묘실이다.

2006년 2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03호로 지정되었다.

동산재는 낙촌() 이도장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에 세운 낙촌정(), 그의 아들 이원정을 유덕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03년에 세운 경암재(), 이원정의 아들 이담명의 별사 봉향을 위해 1750년에 소암재()와 묘실을 세웠다.


동산재는 얕으막한 구릉지에 터를 잡고 안쪽 중심에 낙촌정()이 있고, 그 우측에 경암재, 좌측에 소암재가 자로 일곽으로 배치되어 있다. 소이재 뒤에는 별도의 담장을 돌린 이담명의 묘실이 있고, 동산재 일곽 전방에 솟을삼문이 있다. 솟을삼문 전방에는 연못이 있고, 그 우측 한켠에 이원정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소암재 전방에는 관리사가 있다. 낙촌정은 경사지에 맞춰 건립한 탓에 전면 기단을 2단으로 축조해 방과 마루를 꾸몄다. 전면 기단이 높아 우측에 7단 시멘트 계단으로 오르내린다. 평면구성은 중앙에 온돌방 2칸에 그 좌우로 마루 1칸씩을 대칭배열시킨 독특한 평면이다. 온돌방과 마루 전면으로는 반칸 규모의 툇마루로 온돌방 양측의 마루와 연결시켰다. 온돌방 뒤에 벽장, 대청 뒤에 쪽마루가 각기 시설되어 있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에 시멘트로 덧마감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전면 툇칸에 두리기둥의 통주를 세웠고, 그 안쪽 내부공간은 한단 높은 시멘트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전퇴 주상부는 주칸의 창방과 장혀사이에 소로를 끼워 보강한 소로수장으로 꾸몄다. 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며, 지붕은 홑처마에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이다. 소암재는 재사와 사당이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이며, 평면구성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으로 방 1칸씩을 중당협실형이다. 양측 방 전면에는 쪽마루, 방 뒤에는 반침이 있다. 기단은 높직하게 축조한 자연석 기단에 시멘트로 덧발랐다. 기둥은 자연석 초석 위에 대청 전면 중앙에만 두리기둥이고, 그 외는 네모기둥이다. 주상부는 별 다른 장식이 없는 간략한 민도리식이다. 각 방 앞 쪽마루 밑에는 아궁이가 있다. 상부가구는 3량가로 간략하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칸반의 굴도리 익공계 맞배집이다. 경암재는 좌측 2칸은 온돌방, 우측 2칸은 마루가 대칭되게 배열된 좌실우당형이다. 구조는 사고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전퇴칸에만 두리기둥,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워 심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주상부는 간략한 민도리이고, 상부가구는 5량가이다. 온돌방 창호는 세살문이고, 방 뒤로는 수납공간인 반침이 있다. 대청은 전면를 제외한 삼면으로 판자벽에 울거미띠장 널문을 달았다. 온돌방 2칸 중 좌측 온돌방 좌측 쪽마루 밑에는 함실아궁이가 있고, 쪽마루 단수를 높여 설치했다.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홑처마 팔작집이다

한 지역에 광주이씨의 3대를 위한 묘실이 일곽을 이룬 경우가 드물고, 건립순서와 세계()가 역순이면서도 건축구조상 정연한 위계성을 가지고 있는 흔치 않는 유적이다.









돌배나무






대흥사


경북 칠곡군 기산면 각산3길 113 (우)39913

기산면 각산리 417










은행나무



은행나무 구전이야기

성주에서 칠곡 퉁지미마을(각산마을의 옛지명)로 시집온 새색시는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시부모님의 눈치로 답답한 마음이 밀려올 때마다 새색시는 뒷산 어귀에 있는 큰 은행나무를 찾아가 떨어진

잎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색시 꿈에 은행나무가 어머니로 나타났습니다.

새색시 앞에 선 어머니는 애잔한 눈물을 훔치며 따스한 손길로 은행나무 두 잎을 쥐어주었습니다.

하나는 갈라진 은행나무 잎이었고 다른 하나는 갈라지지 않은 은행나무 잎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보름달이 뜨는 날 은행나무로 가서 떨어지는 잎을 잡으라 말하시곤 다시 은행나무로 변해버렸습니다.

새색시는 꿈속에서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은행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잎을 잡았는데, 잎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새색시는 아이를 가졌고, 10달 후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를 낳지 못한 며느리들에게 하나둘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며느리들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잎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갈라진 잎을 잡은 며느리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고 갈라지지 않은 잎을

잡은 며느리들은 모두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이런저런 남모를 고민을 은행나무한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는 신기하게도 꿈 속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나타나 마음을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조언해주는 걸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차츰 이 은행나무는 나만의

고민을 알아봐주고 어떤 방법으로든 답을 말해준다 하여 「 말하는 은행나무 」 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무려 1000살이 다 되어 간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