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者 殿閣/조용헌 살롱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3>

초암 정만순 2014. 3. 24. 09:07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3>
 
산청군 생초면 文筆峰] ‘인걸은 지령’… 지리산 동쪽 精氣 받아
 
산골서 고시 합격자만 30여 명… 교수·박사도 30여 명 이르러

	왼쪽으로 지리산 천왕봉과 연결되는 필봉산이 마치 붓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전형적인 문필봉 모양이며, 바로 옆 왕산에서 바라본 장면이다.
▲ 왼쪽으로 지리산 천왕봉과 연결되는 필봉산이 마치 붓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전형적인 문필봉 모양이며, 바로 옆 왕산에서 바라본 장면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는 한자문화권에서 적어도 5,000년이라는 세월의 임상실험 끝에 정립된 이치이다. 몇 년 사이에는 ‘인걸’과 ‘지령’의 상관관계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이는 실험실에서 몇 주 사이에 나오는 임상 데이터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이 양자의 함수관계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령’이란 어떻게 생긴 것인가? 땅에 신령함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우선 산의 형태가 중요하다. 산은 크게 음산과 양산으로 나눌 수 있다. 음산은 지리산처럼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산이고, 양산은 설악산처럼 바위가 많이 노출된 산이다. 그 다음에는 오행(五行)이다. 산의 모양은 수, 화, 목, 금, 토 5가지로 분류한다. 수체(水體)의 산은 봉우리들이 물결처럼 밋밋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모양을 가리킨다. 화체(火體)는 불꽃처럼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합천 가야산이나, 영암 월출산이 여기에 해당한다. 목체(木體)는 붓의 끝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산이다. 금체(金體)는 바가지나 철모처럼 둥그렇게 생긴 모습이다. 토체(土體)는 테이블이나 두부처럼 평평한 모습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있는 ‘테이블 마운틴’이 토체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마을 앞쪽으로 문필봉 보여야 인재 배출

이 5가지 산의 모양 중에서 목체가 문제이다. 목체의 산을 풍수가에서는 보통 문필봉(文筆峰)이라고 부른다. 문필봉이 집 앞이나 동네 앞에 보이면 그 집, 동네에서는 이상하게도 꼭 내로라하는 문장가나 학자가 나온다. 확률 70%다. 전국의 이름난 학자, 문필가를 배출한 동네에 가보면 대부분 문필봉이 앞에 보였다. 동네 뒤에 있으면 효과가 적다. 앞에 있어서 보여야 한다. 또는 증조대나 조부모의 묘 앞에 문필봉이 있어도 역시 효과가 발생한다. 이상한 일이다. 혹시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문필봉 동네로 이사를 가서 살았기 때문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배출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보통 사람도 이러한 문필봉 동네에 살면 그 정기를 받아서 인물이 나오는 것인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전국의 문필봉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잘 생긴 문필봉을 꼽으라면 산청군 생초면(生草面)에서 바라보는 필봉산(筆峰山, 858m)을 꼽고 싶다. 삼각형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끝이 뾰족하고 분명한 삼각형일수록 거기서 배출되는 문장가들도 격이 높다. 끝이 뭉텅하면 붓의 예리함도 뭉텅해진다. 문필봉이 온통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면 그 기세를 받은 문필가의 필기(筆氣)도 아주 예리하고 공격적일 수 있다. 압력과 협박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고 비판적인 필봉을 휘두르는 인물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생초면에서 바라다 보이는 필봉산은 그 크기도 크고 모양도 분명한 삼각형이고 우뚝 솟아 있어서 누가 보아도 확실한 문필봉으로 보인다. 그 산이름도 아예 ‘필봉산’인 것이다. 필봉산 옆에는 왕산(王山, 923m)이 붙어 있다. 왕산이 약간 더 높고 필봉산이 그보다 아랫니지만 생초면에서 볼 때는 왕산보다 필봉산의 정기를 더 쳐준다. 왕산 자락에는 가야국의 마지막왕인 구형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왕산이다. 왕산을 옆에서 보면 한 일(一)자로 보인다. 지리산으로 내려온 백두대간의 한 맥이 뭉친 자리이므로 왕산 역시 간단한 산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생초면에서 보면 필봉산과 왕산이 나란히 보이는데, 생초면 사람들은 필봉산을 더 이야기한다. 필봉산이 더 문필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산청군 생초마을 앞에서 필봉산(왼쪽)과 왕산이 우뚝 솟은 장면이 그대로 보인다.
▲ 산청군 생초마을 앞에서 필봉산(왼쪽)과 왕산이 우뚝 솟은 장면이 그대로 보인다.
조선시대 영남 인재 배출은 ‘左안동 右함양’

조선시대에 영남의 인재 배출 지역을 논할 때에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했다.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이고, 우측으로는 함양이라는 말이다. 함양에서도 산청의 필봉산 끝자락이 문필봉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다. 함양군 ‘개평’이다. 여기에 일두 정여창(1450~1504)과 옥계 노진(1518~1578)이 살았던 동네가 있다. 지금도 깔끔한 기와집들이 보존된 동네이다. 조선시대 경상우도 양반가옥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게 일두와 옥계의 배출이 모두 필봉산 정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근래에 생초면에서 어떤 인물들이 배출되었단 말인가? 우선 법조계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의 전통에서 보자면 현재의 고시합격자를 객관적인 인재로 생각할 수 있다. 고시 합격자만 해도 어림잡아 30명이 생초면에서 배출되었다. 산골 동네에서 30여 명이라면 적은 수가 아니다. 교수와 박사만 해도 역시 30여 명에 육박한다. 한 집 건너 판사와 검사이고 두 집 건너 교수와 박사인 것이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두희, 법무부 차관을 지낸 김상희가 대표적이다. 김두희와 김상희는 같은 경주 김씨로 집안간이다. 6촌 정도 될 것이다. 김상희 아버지인 김경탁(金敬鐸)도 일제 때 일본의 명문고교인 ‘가고시마 7고’를 졸업했다.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가고시마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명치정부에서 변두리 지역인 가고시마에 국립고교인 ‘7고’를 할당했는데, 당시 이 7고에는 수많은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산 정상에서 생초면 마을 일대를 내려다봤다.
▲ 산 정상에서 생초면 마을 일대를 내려다봤다.
김경탁은 동경대를 졸업하고 판사를 하다가 6·25때 서울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그만 납북되었다. 그 바람에 김상희는 외가인 대구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때 김경탁과 같이 숨어 있던 인물이 삼성 홍라희, 중앙일보 홍석현의 아버지인 홍진기였다. 홍진기는 느낌이 이상해서 새벽에 숨어 있던 집을 떠났지만, 김경탁은 그냥 머물러 있다가 잡힌 것이다.

홍진기의 장인이 김신석인데, 이 김신석 역시 생초면 출신이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무송 현준호와 함께 호남은행을 창립한 주역 멤버이다. 호남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양대 부자로 알려졌던 인물이 현준호이다. 참고로 현준호의 손녀딸이 현재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이다. 김신석의 형님 아들이 김경탁인 것이다. 그래서 6·25때 서울에서 김경탁과 홍진기가 같은 집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김신석이 호남은행 목포지점장을 하면서 목포에서 낳은 딸이 김윤남이고, 이 김윤남이 낳은 딸과 아들이 홍라희, 홍석현인 것이다. 김신석의 바로 위 형님이 김두희의 할아버지이고, 큰형님이 법무장관을 지낸 김두희의 할아버지이다.

이 인맥을 알고 보면 모두 생초면 출신이다. 서울고등법원의 성락송 판사, 대전특허법원의 판사로서 삼성과 애플 특허 맞소송 담당판사이기도 했던 배준현 판사, 지방자치발전기획단장이고 전 울산부시장을 지낸 오동호, 울산지방 부장판사를 지낸 오동운, 해운대 부구청장인 박기현, KBS Japan 사장인 김대희, 정영화 서울세무사협회 회장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요즘은 인물이 법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분야에 있다. 코미디언 이성미, 여주의 목아박물관을 설립한 박찬수 관장도 생초면 출신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표팀 코치를 지낸 박항서 감독도 있다. 장군도 많다. 육사 교장을 지낸 한승의 장군, 3군 사령관을 지낸 유재열 장군, 해병대 부사령관을 지낸 곽재성 장군 역시 생초면 출신이다. 동네 앞의 남강 너머로 보이는 필봉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생초면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모두 필봉산 방향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인물이 근래에 많이 쏟아져 나온  명당이 조선시대에는 왜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택리지(擇里志)>에도 보면 생초면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다. <택리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명당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 안동 내앞(川前), 그리고 봉화의 닭실(酉谷)이다. 이 4군데 모두 경북지역에 속한다. 경남에는 없다. 왜 경남에도 여러 명당이 있는데, 경북만 소개하고 경남은 소개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조선시대에는 이 생초면 일대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지 않다가 근래에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산청 한의약 엑스포가 열린 자리에서도 필봉산(오른쪽)과 왕산(왼쪽)이 그대로 보인다.
▲ 산청 한의약 엑스포가 열린 자리에서도 필봉산(오른쪽)과 왕산(왼쪽)이 그대로 보인다.
인물 배출에도 天時 있어… 시대 맞아야 인물 나와

인물의 배출에도 천시(天時)가 있다. 시대가 맞아야 인물이 나올 수 있다. 타이밍이 그만큼 중요한 셈이다. 생초면이 있는 산청군은 남명 조식의 본거지이다. 산청군이야말로 퇴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의 메카이다. 이 남명학파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무너진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光海君)의 정신적 지주였던 내암 정인홍이 죽게 되면서 남명학파(南冥學派)는 궤멸된 것이다. 정인홍은 남명의 수제자였고, 남명 이후로 경상우도의 학파를 이끌던 명실상부한 수장이었다. 이 정인홍이 인조반정에서 제거됨으로써 남명학파의 산실이었던 경남 산청은 지역적으로 소외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의 인재들이 중앙정계로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물이 있어도 쓰이지 못하면 초야에서 이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남명학파와 경남, 산청, 진주 일대는 중앙정계로부터 철저한 견제와 차별을 받았다. 그 결과로 이 지역의 인재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원천 봉쇄되었던 것이다. 광복 후 약 300년에 걸친 그 길고 긴 봉쇄가 풀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6·25로 인한 좌우의 대립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피해 때문에 산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경남의 농사짓고 밥 먹는 지주 집안 자식들의 상당수가 일제 때 일본 유학을 갔고, 일본에 가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돌아왔다. 이들이 결국 지리산 빨치산과 관련되어 많이 죽었고, 일부는 북으로 넘어갔다. 이것도 거시적으로 보면 인재 손실이다. 남북 분단이 원수다. 이 좌우 대결에 희생되지 않고 살았더라면 국익에 큰 도움이 되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러한 광복 후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동쪽의 지령이 뭉쳐 있는 산청 일대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사회 여러 분야에 진출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최고 기업 애플과 막상 막하의 경쟁 상대가 된 삼성에도 남명학파의 후예들이 많이 들어가서 활약하고 있다. 지리산의 기운이 동쪽으로 흘러와 산청에 뭉쳐 있고, 그 일맥이 필봉산에 뭉쳐 있는데, 그 필봉산으로부터 방출되는 영기를 제대로 받는 동네가 바로 생초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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