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종가 고택 세거지

봉화 닭실마을

초암 정만순 2018. 7. 11. 11:10



봉화 닭실마을



봉화 달실마을 - 권벌 선생 종가 전경  


건축에서의 핵심은 물론 집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게 어찌 홀로 공중에 뜬 것이랴. 때문에 그 입지가 건축물 본체(本體) 못잖게 중요시돼 왔다.

일상인들은 생각도 못하는 깊은 곳에서 논리의 근거를 구하는 풍수사상 조차 같은 입장."양기(陽基·집)는 땅 위에 있는 것이어서 음택(陰宅·묘지)과 달리 생기에 그리 많은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대신 양기는 일상생활에서 직접 바라보고 접촉하는 유형(類形·주위환경)의 영향과 힘을 중시했다" 일본인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씨가 저서 '한국의 풍수'에서 적술한 말이다.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경북 봉화읍의 유곡리(酉谷里)는 이런 면에서 특별히 주목 받는 곳이다. 우리말 이름인 '닭실'이라 더 많이 불리는 마을. 읍 시가지에서 불과 2km도 안되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전혀 별천지이다. 마을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다가서는 사람이라면 너나 없이 '문득 무릉도원에 들어 선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곳.

지금 이용하는 마을 접근로는 봉화∼태백 사이를 잇는 36번 국도이다. 그러나 이 도로는 일대 산세의 흐름을 허리 잘라 만든 것. 자연 따라 길 났던 옛날에는 상상도 안했을 접근 방식이다. 당초의 접근로는 당연히 이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본래 방식대로 접근해야 이 마을이 왜 그다지 주목되는지 제대로 볼 수 있다.

본래 접근로가 있던 곳은 읍 시가지 북편 맨 끝자락 부분, 물 둘이 만나는 삼계리 지점이다. 물 하나는 소백산맥에서 흘러 내리는 큰 강인 가계천, 또하나는 산자락 하나를 동쪽으로 넘은 골짜기로 흘러 내리는 내성천. 둘은 여기서 만나 낙동강의 가장 중요한 지류 중 하나인 내성천을 제모습대로 이뤄 나간다.

닭실마을로 가는 본래 길은 이 합수점(合水点)에서 내성천을 따라 석천(石泉)계곡을 걷는 것이다. 쪽 곧은 골짜기를 따라 400여m를 올라 가는 구간은 그야말로 비경. 시가지와 맞붙은 곳에 어찌 이런 좋은 곳이 있나 싶게 아름다운 바위와 자연석, 옥계수, 소나무, 그리고 그 깊은 골짝 맛.

그러다 그쯤에서 강은 문득 초생달 모양으로 굽어 버린다. 지나온 골짜기도 안보이고, 더 나아갈 곳이 트였는지 막혔는지도 판별이 안선다. 다만 짐작. 그 안쪽은 틀림없이 더 깊은 골짜기이리라.

그러나 웬걸. 초생달이 끝나는 그곳에 기다리는 것은 탁 트인 들이다. 사람을 기피해 온 은둔의 평야. 이것이 이 닭실마을 입지의 요체이다.


마을의 입장에서 형국을 다시 보자. 마을 뒷산은 소백산맥에서 흘러 내린 한 등성이가 막음한 끝. 그리고 마을 서쪽·동쪽은 물론이고 앞쪽까지도 모두 산으로 둘러 막혔다. 마을과 앞산까지의 거리는 120여m. 들이 펼쳐진 곳이고, 산 흐름을 따라 다시 둘로 갈라져 북상하는 물길에 기대어 들은 더 길어진다.

말하자면 닭실에선 사방에 산이 버티고 서서 외부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을이 충분히 생계 삼을 논밭을 갖췄고, 700∼800m 거리에 심심산악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절경까지 챙겼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읍 시가지와도 겨우 1.5km 거리이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상식이 짚어내는 이같이 뛰어난 건축(마을)의 입지 조건은 풍수지리에서도 역시 받아 들여지는지, 그쪽에서는 이를 삼남의 네 길지(吉地) 중 하나로 꼽는다고 했다. 그쪽 해석에 따르면 이곳은 금계(金鷄, 하늘의 닭)가 알을 품은 양상. 길(吉) 중에서도 상(上)이고, 자손이 번창하고 호걸을 배출할 상이라는 것이다.

풍수는 암수의 닭 두마리가 쭉지를 펴 마을(알)을 감싸 품고 있다고 해석하는데, 마을 동서 양쪽에서 흘러 내린 산세가 겹으로 마을 앞을 감싸는 이곳 풍경은 지극히 보기 드문 형상이다.


이 마을은 본래 파평 윤씨들이 살던 곳이나, 그 외손인 권발(權木發, 호는 沖齋, 시호 忠定公)이 1520년에 안동으로부터 들어와 살기 시작함으로써 그 후 안동 권씨 가문의 세거지가 됐다. 당시에는 부모의 재산을 딸에게도 똑같이 나눠주던 것이 법식이었고, 이때 주는 땅을 따라 자녀의 소가족들이 새 세거지를 찾아 아주 먼 곳까지도 드물잖게 이주하던 때였다. 충재의 외할아버지 가문은 대단했으며, 어머니 형제는 1남1녀였다.

충재는 회재 이언적,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정암 조광조 등과 겹친 연대를 살면서 경상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절개가 높아 명망이 유구하다. 그의 유품이 무려 482점이나 보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 그가 이 마을에 들어 올 때는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된 뒤였다.

충재와 그의 자손들은 이곳에 본가를 지었을 뿐 아니라, 마을 앞의 그 좋은 계곡에 정자도 짓고 작은 바위 하나에까지 이름과 시(詩)를 붙였다. 건축에서 입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삼 가늠케 하는 대목.


닭실마을과 청암정(靑巖亭) - 거북이 등에 앉은 청암정  


반면 충재의 본가는 사대부 집 치고는 소박해 보였다. 팔작지붕의 6칸짜리 안채에 이어 ㅁ자로 집을 꾸민 것. 그 서쪽 담에 붙여 거북등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靑巖亭)를 짓고, 밖에서 물을 끌어와 그 주위에 연못을 만든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인듯 했다. 자연이 이미 천혜의 건축 입지를 제공하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인공이 필요했으리요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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