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와고가 사랑채 내루에서 바라본 마당과 행랑채 모습. 정원의 자목련 꽃이 고졸한 고택의 분위기에 화사함을 더한다.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안성길 150-6(화양리)의 '묘산 묵와고가'(국가 민속문화재 제206호). 가야산에서 뻗어내린 달윤산 자락에 살포시 안긴 묵와고가(默窩古家)로 가는 길은 꽤 멀고 험하다.
합천에서도 오지 중 오지인 화양리의 맨 안쪽에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선승이 사는 산중 암자를 찾아가는 듯, 설레고 어설펐다.
산기슭에 지어져 3단 표고로 구성
안마당, 사랑마당보다 수 계단 위
조용한 집이란 의미의 '묵와'처럼
정원의 야생화들마저 평온함 더해
■독립유공자의 생가
우여곡절 끝에 고택 행랑채 앞에 선다.
산기슭에 지어져 3단 표고로 구성
안마당, 사랑마당보다 수 계단 위
조용한 집이란 의미의 '묵와'처럼
정원의 야생화들마저 평온함 더해
■독립유공자의 생가
우여곡절 끝에 고택 행랑채 앞에 선다.
대문 입구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무궁화와 산수유나무가 먼저 내방객을 맞는다. 두 그루 모두 둥치가 우람해 이 집의 오랜 내력을 말해 주는 듯하다. 돌계단 9개를 밟고 솟을대문에 닿는다. 문설주에 달린 '독립유공자의 집'이란 작은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1919년 유림에서 일으킨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했던 만송 윤중수(晩松 尹中洙)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다.
윤중수(1891~1931) 선생을 빼놓고는 이 집을 논하기 어렵다.
윤중수(1891~1931) 선생을 빼놓고는 이 집을 논하기 어렵다.
만송은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함경도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김창숙·성태영·유진태·유준근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유림의 의사를 집약한 장서를 제출키로 결의하는 등 운동을 주도했다.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한국독립진정서'에 합천 대표로 서명했으며, 그 후에도 신채호·김창숙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만송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만송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수천 석 재산을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내놓았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만주 무순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옥고 후유증 등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집 구성
화양리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집 구성
화양리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이 유서 깊은 집이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 인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성에 의해서였다. 1650년께였다. 그 뒤로 4대에 걸쳐 증축됐다. 한때는 가세가 융성해 집의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고, 여덟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헛간채, 사당채 등이 남았다.
솟을대문 쪽에서 바라본 사랑채 전경.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이중의 기단 위에 날아갈 듯 앉았다. |
사랑채 앞에 선 회화나무(수령 600여 년) 거목과 사당 앞 은행나무(수령 250여 년)가 과거 영광을 시위하듯, 하늘로 쭉 뻗었다.
사랑채 남쪽과 북쪽에 서 있는 자목련의 자태도 오랜 기간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역력하다. 마침 자목련 꽃이 화사하게 피어 적막한 고택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뿌리 깊은 집안엔 뿌리 깊은 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다섯 칸 문간채에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왼쪽에 사랑채가 서 있다.
다섯 칸 문간채에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왼쪽에 사랑채가 서 있다.
남자들의 거주공간인 사랑채는 동향받이 ㄱ자 형태지만, 꺾이는 부분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샛문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 행랑채와 지붕이 이어져 있다. 따라서 사랑채와 행랑채는 T자형 평면을 갖는 한 채처럼 보인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이중의 높은 기단 위에 앉았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이중의 높은 기단 위에 앉았다.
사랑채에는 네 칸 크기의 웅장한 내루가 돌출해 있다. 내루의 동벽과 북벽은 판벽으로 막고 남쪽은 훤하게 틔웠다. 채광이 불리한 동향집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삼면을 돌아가며 계자난간을 세워 격조를 높였다. 사랑채는 맞배지붕 구조지만, 내루 앞부분은 합각을 세운 팔작지붕을 얹어 비대칭의 묘를 보여 준다.
가운데쯤에 默窩古家(묵와고가)라는 현판이 돌올하다.
가운데쯤에 默窩古家(묵와고가)라는 현판이 돌올하다.
'묵와'는 윤사성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윤우의 호다. '침묵하고 있는 움집'이라는 뜻이다. 화양마을 파평 윤씨 후손들의 처세를 은유하는 호다. 이는 화양마을 파평 윤씨 입향조인 사제공 윤장의 낙향과 연관이 깊다. 윤장은 문과에 급제해 사제판사 벼슬을 지내던 중 1453년 계유정난을 피해 화양마을로 숨어들었다. 윤장은 이곳에서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묵와'는 세상의 소란스러움, 그 경계 밖의 조용한 집이란 의미로 읽힌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샛문을 통과하면 안마당과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샛문을 통과하면 안마당과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마당은 사랑마당보다 예닐곱 계단 높은 곳에 조성돼 있다. 이 집은 3단의 표고로 돼 있다. 맨 아래에 사랑·대문간·행랑채, 가운데 단에 안·곳간채, 맨 위에는 사당채가 놓였다.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등 전통 사찰의 가람배치 축소판이다. 경사진 산기슭의 지형 특성을 활용한 지혜가 돋보인다. 정면 일곱 칸의 안채 역시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동향이며, ㄱ자형 평면을 보인다. 두 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왼쪽으로 건넌방과 작은 부엌을 뒀다.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내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묵와고가는 일반적인 고택 기준으로 보면 화려하거나 웅장하기보다 고졸하고 검박한 편이다.
묵와고가는 일반적인 고택 기준으로 보면 화려하거나 웅장하기보다 고졸하고 검박한 편이다.
부재 하나하나마다 있는 그대로의 나무 모양을 살렸기에 가구(架構)의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다. 누마루 천장의 무지개 모양 구조재와 사랑채 뒷벽의 지게 모양 부재들이 다 그러하다. 기둥을 세움에 있어 초석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린 그렝이공법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연에 맞서기보다 조응한 조상들의 지혜다.
■몸에 밴 접빈객의 삶
집은 사람과 더불어 호흡하고 함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한다.
■몸에 밴 접빈객의 삶
집은 사람과 더불어 호흡하고 함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한다.
사람을 보면 그 집이 보인다. 묵와고가에는 만송의 후손인 윤치환·황정아 선생 부부가 10여 년째 살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찾아간 날은 황 여사 혼자 쓸쓸히 집을 지키고 있었다. 현재 윤 선생이 노환으로 입원 중이기 때문이다.
집안 곳곳에 조성된 정원에는 봄꽃들이 한창 피어나기 시작했다. |
황 여사는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며 전문 해설사 못잖은 집에 대한 식견을 보여 줬다.
자신의 손길이 구석구석 밴 정원의 야생화도 일일이 알려줬다. 나리, 영란, 매발톱, 깽깽이풀, 제비꽃, 수선화, 작약, 무릇, 초롱꽃, 붓꽃, 골담초…. 안채 담장 아래 살피꽃밭엔 상사화가 무더기로 푸른 꽃줄기를 곧추세웠다.
봄비가 종일 추적추적 내려 한기가 으스스 몰려 왔다.
이를 눈치챈 황 여사는 안채 응접실로 기자를 데려가 녹차를 끓여 내놓았다. 부엌 겸 응접실은 고풍스러움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져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랜 접빈객의 생활이 몸에 밴 듯, 차 내리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고택 관리의 힘겨움도 슬쩍 드러냈다. "정말 열심히 집안을 가꿨어요. 군청 공무원들과 무던히 싸우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면서 허물어져 가는 집을 이 정도로라도 수리해 놨어요.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화양마을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어 더 어려움이 커요."
국가지정문화재라고는 하나 수리 외에는 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고택 관리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고택 관리의 힘겨움도 슬쩍 드러냈다. "정말 열심히 집안을 가꿨어요. 군청 공무원들과 무던히 싸우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면서 허물어져 가는 집을 이 정도로라도 수리해 놨어요.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화양마을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어 더 어려움이 커요."
국가지정문화재라고는 하나 수리 외에는 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고택 관리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장래요? 잘 모르겠어요.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는 동안에는 찾아오는 사람들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겠죠."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고여 마당을 적시고 끝내 작은 도랑을 이뤄 냇가로 흘러갔다. 비가 그치고 나면 백화 만발의 호시절이 올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집과 사람의 내면에 또 하나의 생채기를 낼 것이다. 집에는 얕게, 사람에는 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