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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문화길의 백미인 2구간은 13.7㎞의 병산서원, 하회마을, 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과 마을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는 '병산`하회 선비길'이다. 이 가운데서도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이어지는 화산 산길과 낙동강 강변길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屛山)의 절경과 선비의 삶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엄재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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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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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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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유교문화길'에는 다양한 삶이 서려 있다.
글 읽는 선비 이야기와 어려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추운 겨울 편찮으신 부모님을 위해 잉어를 구해온 효자와 위기의 나라를 구했던 선조의 이야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산신령 이야기와 도깨비 전설을 듣고 또 보태며 걸었던 나그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숱한 이야기와 삶이 스민 유교문화길이 새롭게 다듬어지고 또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해지고 있다.
유교문화길의 백미인 2구간은 13.7㎞의 병산서원, 하회마을, 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과 마을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는 '병산`하회 선비길'이다.
이 가운데서도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이어지는 화산 산길과 낙동강 강변길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屛山)의 절경과 선비의 삶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이 길을 안동문인협회 부회장 박병래, 시인 김정화, 작가 최성달 씨 등과 함께 걸었다.
◆효부골을 출발해 낙동강을 휘돌아 걷는 유교문화길
안동 풍천면 병산리 효부골 종합안내소를 출발해 정자골~유교탐방길~병산서원~병산`하회 선비길~하회마을~효부골 종합안내소 등 낙동강 물길을 따라 화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13.7㎞의 길에는 옛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낙동강변에 늘어선 버드나무 잎들이 스치는 소리에도 이야기가 스며 있다.
조선 정조 때 '효부가 났다'고 해서 효부골로 불리는 곳에 위치한 종합안내소를 출발해 병산서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개설된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작가 유홍준 교수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병산서원 진입로다.
이 도로를 300여m 걷다 보면 넓은 풍산들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보이는 '어락정'(漁樂亭)이 자리하고 있다.
어락정에 이르면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멀게만 느껴지던 낙동강 물을 좀 더 가까이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400여m 이어진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병산서원까지는 비포장도로기에 차량통행에 따른 먼지가 다소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길로 제격이다.
오솔길에서 나와 1㎞쯤 더 걷다 보면 한국 건축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병산서원이 나온다.
본래 풍악서당이라 하여 풍산읍에 위치했던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선조 5년(1572년) 후학 양성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화산을 등지고 낙동강이 감도는 바위 벼랑을 마주 보며 소나무의 짙푸름이 조화를 이루는 병산서원은 절묘한 경치와 뛰어난 건축물로 유명하다.
특히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린다. 만대루에서는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느낄 수 있다.
◆병산~하회마을, 굽이치는 낙동강 줄기마다 역사 숨결
병산서원에서 나오면 낙동강을 따라 하회마을을 잇는 4㎞ 거리의 병산`하회 선비길로 이어진다.
그 옛날 병산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학문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고자 걷던 길이자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오솔길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려 시원함이 느껴지는 선비길은 강과 산이 함께 흘러 하회마을의 풍수지리적 아름다움과 자연의 경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4㎞의 오솔길과 숲길이 이어지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 유교문화길 탐방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코스다.
겸암 류운룡을 비롯해 풍산 류씨 사람들의 무덤이 산재한 화산 중턱의 고갯마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너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넉넉한 산길은 최근 정비를 한 덕분에 평탄하다.
이 길을 따라 서애 선생을 흠모하고 따르던 조선, 영남의 숱한 선비들이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오고 갔다.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학봉과 서애의 위패 좌우 배향, 후일 대산 이상정의 추가 배향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병호시비’ 과정에서 선비들의 숱한 고뇌와 자존심, 학맥과 문중의 대립 등 역사적 흔적이 묻어 있는 길이다.
이 길에는 ‘서애를 도와 왜군 장수를 물리치게 한 형 겸암’ ‘여우 동생을 물리친 겸암’ ‘서애 대감을 구한 돌고지 바위’ ‘태몽을 산 서애 대감 어머니’ 등 서애와 겸암 형제를 둘러싼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탐방로 곳곳에 안도현 시인의 ‘낙동강’ ‘허도령과 하회탈이야기’ ‘하회 16경’ 등을 소개하는 팻말도 산책의 재미를 더한다.
낙동강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다 숨이 찰 때 쯤이면 정상부에 시원한 바람과 함께 쉬어갈 수 있는 육각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조망하며 잠시 쉬었다
발길을 재촉하면 1.5㎞ 남짓한 곳에 하회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육각정자에서 하회마을로 내려가다 보면 한눈에 보이는 하회마을의 비경은 보너스다.
부용대 위에서 바라보면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풍
수지리적으로 왜 하회가 명당이라 하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육각정자에서 하회마을로 내려가 벚나무가 식재된 낙동강 둑길을 따라 걸으면 부용대와 만송정 등 하회마을의 비경을 음미할 수 있다. 자연스레 하회마을 장터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또 다른 묘미를 준다.
◆겸암`서애 형제들의 정과 사랑 서린 '부용대 층길'
하회마을 만송정 앞 낙동강을 둘러치고 있는 부용대 절벽, 절벽 우측에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가 있다.
정사 마당에는 수백 년 된 노송이 버티고 섰다.
서애가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서애 소나무는 옥연정사와 부용대 절벽 곳곳에서 울울창창 솔숲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애와 그의 형 겸암 형제의 우애는 부용대 절벽에 좁다랗게 난 ‘층길’(친길)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서애는 1586년 옥연정사를 지었고 부용대 절벽 반대편 입암 위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에서 후학들과 연구하던 형을 만나러 갔던 길이다.
이 층길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0년 전 하회마을(1828년 하회마을)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다란 500여m의 절벽길은 서애가 아침저녁으로 형 겸암을 찾아다녔던 발자국의 여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발아래로는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바위, 낙동강 물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머리 위로는 까마득한 층층 바위가 덮치듯 내려다본다.
안동문인협회 김정화(44) 시인은 “예전에는 층길이 3곳이었다고 전해 온다.
지금의 층길 아래와 위쪽으로 더 있었다고 한다.
서애는 형님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때는 손수 지게를 지고 지금의 층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층길이 끝날 즈음 눈앞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로막는다.
이 나무들도 서애가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워하며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향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인 겸암정사는 입암 절벽 위에 버티고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겸암정사 입구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어 형에 대한 서애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내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 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발끝엔 싱그러운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며 밤새 흐르네.’
◆서애 류성룡의 징비, 하회마을 곳곳에 전해져
하회마을은 산과 강이 ‘S’ 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이라고 한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모습을 띠고 있다.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해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 종가로 두 기둥을 이루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남촌댁과 북촌댁이 반가의 두 기둥으로 버티고 서서 상하를 어우러지게 한다.
그뿐이랴, 화천서원과 병산서원이 또한 두 서원으로 학문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옥연정사와 겸암정사가 서로 교류하며 마을의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 절벽과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은 지금에 와서도 한 번쯤 다녀가지 않으면 건축학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서애는 임진왜란 1년을 앞둔 시점에서 혁신적 인사를 천거했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삼았다고 서애연보에 나타난다.
현감을 수사에 오르게 한 것은 지금의 6급을 3급에 발탁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나라를 구한 결과가 됐다.
하지만 서애는 큰 공훈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를 불우하게 은거했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언덕을 오르지 않으면 올 수 없는 옥연정사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썼다.
혹독한 전쟁과 이후 가난과 병마로 비참했던 서민들의 살림살이, 그 대책과 비방을 조목조목 적어 후세에 경계토록 했다.
최성달 작가는 "서애가 '이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만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고 한 징비록 저작 목적이 새롭게 와 닿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는 재상 서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걱정해 안동 인근 벼슬길을 자처했던 류성룡, 하회마을 곳곳에서 그의 뜻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