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김두규의 국운풍수

'蟾津江 詩人' 사는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 두 그루 있는 까닭

초암 정만순 2018. 4. 15. 10:19



'蟾津江 詩人' 사는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 두 그루 있는 까닭


 말씀하신 나무가 이 나무인가요???


"앞산이 길게 뻗어 마주하기에 마을 이름을 장산(長山)이라 하였다.

500년 전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들어와 터를 잡고, 산에다 등을 대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집을 지었다.

오른쪽에는 호랑이, 왼쪽에는 용이 걸터앉아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그런데 강 건너 장산이 좀 높아 마을 앞에 두 그루 느티나무를 심어 위압감을 누그러뜨렸다.

가난한 마을도 이렇게 형식을 갖추었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왔다."

지난 10월 28일 토요일, 학생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필자의 강의는 현장 답사가 필수이다. 강의실 강의가 답사보다 못하다는, 즉 '백문이 불여일견'이 필자의 지론이다.

앞의 인용문은 그날 김용택 시인이 이곳을 찾은 학생들을 위해 소개한 마을 입지이다.

역시 시인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 '형국·배산임수·좌청룡·우백호·안산·비보풍수'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

풍수 용어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이보다 쉽게 마을 풍수를 그려낼 풍수학인이 있을까?

시인은 이곳에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교사가 되어서는 근방의 초등학교를 옮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틈틈이 시를 썼다.

아버지가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집을 지으시고/ 그 집에 살며/ 곡식을 가꾸셨다"면 시인은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속에서 살고 싶었다."

소망대로 그는 시인이 되었다.

어떤 시를 썼을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그를 섬진강 시인이라 부른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 섬진강이다.

그는 '창작'을 하지 않는다. 산과 물과 바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그냥 받아 적지 않는다. "산도 한 삼십 년쯤 바라보아야 산이고/ 물도 한 삼십 년쯤 바라보아야 물이다." 그래서 자세히 오래 바라본다. 그때 산과 물이 그에게 다가온다. 시를 읽으면 자연이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는 도연명의 명언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 감상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감성만으로 충분히 시를 읽고 감응할 수 있다. 그러한 감응의 매개는 섬진강의 바람[風]과 물[水], 즉 풍수였다.


느티나무가있는 풍경



이미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버린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이, 과학이 신이 되어버린 21세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인은 말한다. "앞으로 20~30년 안에 인공지능(AI)의 시대가 된다. 스스로 지능을 바꿔가며 스스로 지능을 터득하며 인간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교체된 인간상이 나올 것이다. 똑똑하고 잘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들을 AI가 대체할 것이다. 그럼에도 AI가 대체 못 할 인간상이 있다. 감성적 인간이다. 감성을 교감할 수 있는 인간만이 20~30년 후에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감성은 공동체이다. 기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인문학이고 풍수이다. 그러한 감성적 공동체는 마을로 구현된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임실군 덕치면 장산마을이다. 해외여행도 좋고 명승지 관광도 좋다.

 그러나 시인의 마을에 오면 '감성'을 되살릴 수 있으며, 덤으로 풍수 공부를 할 수 있다.

시인의 마을에 가시거든 마을 앞 두 그루 느티나무를 유심히 보시라. 왜 그것이 마을의 비보풍수가 되었는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바람[風]과 물[水]소리가 절로 들려온다.

억지로 풍수를 공부하려 하지 않아도 풍수가 절로 나에게 다가온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