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대구 자락 올래 둘레길

물의 도시 대구 .2 "화담"

초암 정만순 2018. 2. 22. 08:09





물의 도시 대구 .2

금호강 물길따라 들어선 화담, 세심정과 나루터 그리고 동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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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낳은 물 금호강…진달래 피는 봄이면 수중 꽃대궐 이루던 花潭


금호강변에 조성된 화담마을 누리길. 세심정 옛터에서 출발해 가람봉, 숲속쉼터, 금호강변, 전망데크를 지나 다시 세심정으로 이어지는 총 6.8㎞ 구간으로 주민들의 힐링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구 유학의 관문 역할을 한 세심정 옛터(작은 사진)와 나루터 자리. 지금의 유니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108동 부근이다.

멈춘 듯 잔잔한 물길이다. 물은 하늘과 땅의 질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부드럽게 굽이친다.
보채지 않고 의연하게 그리고 늠름하게, 산과 들과 인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바람도 수면위에서는 숨을 죽인다. 곁에 앉은 이의 숨처럼 다만 느낄뿐이다.
귀 기울이면 물은 조용히 말을 건넨다. 옛 사람들의 세계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비움과 채움, 생과 사, 자유와 질서로 생동하는 물길, 대구를 품고 흐르는 금호강과 동화천이다.

#1. 예부터 풍광이 빼어난 ‘금호강’

 
















금호강(琴湖江)은 대구를 대표하는 하천이다. 포항시 죽장면 가사령과 성법령에서 발원한 물길은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영천~경산을 거쳐 대구에 이른다. 물길은 다시 대구의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질러 달성군 성산리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유역면적은 2천53㎢, 길이는 116㎞에 이른다.

금호강은 거문고(琴)와 호수(湖)를 합친 이름이다. 넓은 강이 호수처럼 잔잔한 가운데 갈대가 바람에 흔들려 거문고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엇보다 금호강과 주변 풍광은 예부터 절경이었다. 대문장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거정이 ‘대구10영(大丘十詠)’에서 제1영으로 ‘금호범주(琴湖泛舟, 금호강에 배를 띄우고)’를 꼽을 만큼 풍광이 아름다웠다.

‘금호강 얕고 맑은 물에 배를 띄우고/ 자리잡고 한가로이 떠 가니 백구와 같구나/ 밝은 달빛 아래 만취하여 노 저어 되돌아가니/ 풍류가 오호에서 즐기는 것만이 아니네.’

시간과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서거정이 읊은 그 시절의 풍광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낙동강과 뱃길로 연결된 금호강은 16~17세기 대구의 유학과 강안문학(江岸文學)의 요람이기도 했다. 특히 대구 북구를 지나는 금호강 하류지역은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거점이었다. 물길을 따라 들어선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강안문학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림들은 절경을 극찬하며 중국 항저우의 시후(西湖)에 빗대 금호강 하류를 ‘서호(西湖)’라고 부르기도 했다.

#2. 진달래가 절경이었던 ‘화담’

절경을 품고 흘러온 금호강 하류 구간의 물길은 북구 동변동으로 접어들면서 속도를 늦춘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다 이내 기이하고 묵직한 바위를 지나며 흐름을 멈춘다. 바위는 진시황의 병사처럼 직립의 형세다. 꿈쩍도 않는 부동이다. 깊이 주름지고 이끼 낀 바위의 수피는 길고 긴 시간의 흔적이다. 그 위를 뒤덮은 키 작은 고목 역시 길고 긴 세월의 증명이다. 흐름을 멈춘 물은 묵직한 바위에 부딪혀 소용돌이 치다 눈처럼 흩어진다. 거듭 부딪히고 또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물의 끝없는 사투에도 주위는 고요할 뿐이다. 금호강 물길을 따라 요요하게 앉은 바위, 그 아래서 부딪히다 부서지며 스스로 깊고 깊은 수렁이 된 소(沼·pool), 바로 금호강변의 화담(花潭)이다.


大문장가 서거정의 대구十詠
배 떠있는 금호강 모습이 첫째

최근엔 화담 물길 따라 누리길

선비 드나들던 세심정 나루터
지역 유학 르네상스를 연 관문

동화천 조선 중기 명칭은 옥계
물이 옥처럼 맑아 붙여진 이름



화담은 동변동 금호강변 하식애(바위절벽) 아래쪽에 형성된 일종의 소를 일컫는다. 예부터 봄이면 바위절벽 위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전해진다. 절벽의 붉은 빛 진달래는 현기증이 날 만큼 절경이었다. 진달래 붉은 빛이 절벽 아래 깊은 소에 비칠 때면 그 모습이 넓디 넓은 꽃밭처럼 보였다. 붉은 절경을 두고 옛 사람들은 ‘화담’ 또는 ‘화전담(花田潭)’ ‘꽃밭소’라고 불렀다. 화담이 있다고 해서 아직도 이 일대를 화담마을로 부른다. 최근에는 ‘화담마을 누리길’을 조성, 주민들의 힐링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누리길은 세심정 옛터에서 출발해 가람봉, 숲속쉼터, 금호강변, 전망데크를 지나 다시 세심정으로 이어지는 총 6.8㎞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 50분 정도가 걸린다.

화담에 대한 기록은 1767년(영조 43)에서 1768년(영조 44) 사이에 편찬된 대구읍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읍지에는 ‘부의 북쪽으로 16리쯤에 있다. 팔공산의 자락이 강물을 감싸면서 10리에 걸친 절벽을 이루고, 금호강의 물결이 절벽을 끼고서 10리나 되는 깊은 못을 이룬다. 화창한 봄날에 온갖 절벽에 꽃이 만발하여 물결을 아름답게 비추므로 화담이라 이름하였다’고 적혀 있다. 지금도 바위절벽 아래 물은 가볍고 푸르다. 깊고 느리며 잔잔히 소용돌이 치다 부서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 옛날 붉은 진달래는 모습을 감추었다. 붉디 붉은 꽃 핀 절경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 이야기는 남아 수면 위에서 무수한 가지를 치며 뻗어가고 있다.

#3. 대구유학의 관문 세심정과 나루터

화담을 지나친 금호강 물길은 이내 옛 세심정(洗心亭) 자리와 나루터에서 다시 속도를 늦춘다. 지금의 동변동 유니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108동 부근 가람봉 입구 금호강변이다.

세심정은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의 형 전응창(全應昌)이 세운 정자다. 세심(洗心)은 그의 호(號)이기도 하다. ‘마음을 씻는 정자’라는 뜻이다.

전응창은 대구도호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정자(正字)·저작(著作)·박사(博士)를 비롯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형조좌랑(刑曹佐郞)·충청도사(忠淸都事)·함안군수(咸安郡守)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지낸 인재였다. 만년에는 대구 파잠에서 무태 동변으로 이주해 금호강변에 세심정을 짓고 소요했다. 영조 때 발간한 대구읍지에도 세심정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읍지에는 ‘금호강가에 있었다. 지난 날의 도사(都事) 전응창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심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3년 중건됐다. 하지만 영조 말기에 다시 소실돼 지금까지 중건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심정 아래에는 그 옛날 배들이 드나든 나루도 있었다.

세심정은 대구지역 유학의 르네상스를 연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대구의 선비들은 낙동강에서 뱃길을 이용해 금호강을 드나들었고, 세심정 아래 나루터에 내려 유학의 거점인 연경서원까지 말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갔다고 전해진다. 실제 한강 정구를 비롯해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태암 이주 등 대구지역 유림이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금호강 세심정에 내려 말을 타고 동화천을 따라 연경서원까지 간 기록이 남아 있다. 유학의 길목이었던 만큼 세심정을 주제로 한 한시도 숱하게 전해온다.

#4. 옥같이 맑아 옥계로 불렸던 동화천

세심정 옛터와 나루터를 지난 금호강 물길은 곧장 팔공산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해 내려온 동화천을 품는다. 동화천은 팔공산 서남쪽 폭포골과 관봉을 중심으로 한 갓바위 계곡에서 발원한다. 이어 수태골에서 발원한 용수천과 백안동에서 한몸이 된다. 물길은 다시 파계사 계곡에서 발원하는 지묘천과 지묘동에서 몸을 섞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북구 연경동~서변동을 거쳐 유니버시아드선수촌아파트 2단지 부근에서 금호강과 합류한다. 동화천의 총 유로연장(하천의 종점에서 최상류 구간)은 21㎞에 달한다.

동화천은 은어가 올라올 만큼 물이 맑은 하천이었다. 무엇보다 천변의 검은색을 띤 모래톱 풍경이 절경이었다. 여름철 동화천에서 멱을 감은 아이들은 모래톱에 가마니 깔고 누워 자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화천은 조선 중기 ‘물이 옥과 같이 맑다’고 해서 ‘옥계(玉溪)’라 불렸다. 옥계는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을 창건한 매암 이숙량의 기문에 처음 등장한다. 기문에는 ‘옥계 한 줄기가 서원의 남쪽을 지나 졸졸 흐르며 굽이쳐 산을 따라 10리를 못 가 금호강에 이른다’고 나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지낸 괴헌 곽재겸이 스승인 계동 전경창을 위해 지은 제문에도 동화천을 옥계라고 했다.

‘우리의 읍(邑: 대구)을 돌아보니 선비들이 공부할 장소가 없었네. 이에 서원의 건립을 부르짖으니 이숙량이었네. 공(계동)이 오직 그를 도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네. 터를 잡아 집을 지으니 지묘의 물가였네. 그윽한 곳에 홀연히 이루어지니 갑자년 봄이었네. 이를 이루고 경영하여 또한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네. 이전에 없었던 것을 창건하니 현송(絃誦)할 곳이 있었네. 화암(畵巖)의 봄이 깊고 옥계(玉溪)의 가을이 깊어갈 때 학도들이 쫓아 노닐며 읊고 즐거워하였네. 부지런히 학문을 논하며 정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하였네.’

동화천은 일제강점기에는 문암천(門岩川)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발간한 1910년도 지형도에는 동화천이 문암천으로 나온다. 대구의 상수원인 공산댐 위쪽이 문암산(해발 427m)이어서 그렇게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천이 옥계와 문암천으로 불리기 전 영조때 발간한 ‘여지도서’와 ‘대구읍지’ 등 고문헌에는 ‘전탄(箭灘)’으로 나온다. 전탄은 ‘화살로 가득한 시내’라는 뜻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맞붙은 공산전투(혹은 동수전투)에서 비롯됐다. 당시 두 나라의 군대는 동화천을 마주하고 격전을 벌였는데 ‘화살이 시내를 가득 메울 만큼’ 치열했다고 한다. ‘화살’이 가득한 ‘시내’라는 뜻에서 동화천을 ‘살내’라고도 불렀다.

물길을 따라 펼쳐진 옛 사람들의 정자와 나루와 풍광은 사라지거나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사라지면서 이야기를 남겼고 그 자체로 유산이 되었다. 자리는 비었지만 영원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 ‘충만한 여백’이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전영권 대구가톨릭대 교수
참고문헌=대구읍지, 조선왕조실록, 살고싶은 그곳 흥미로운 대구여행
공동 기획 : 대구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