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5
동화천 따라 펼쳐진 무태 인천이씨의 자취<하>
오천 이문화와 태암 이주의 후예, 그리고 그들의 오래된 고택들
가지처럼 뻗은 길 따라 불쑥 나타나는 고택들…인천이씨 긍지가 느껴진다
일신정은 인천이씨 31세손 수헌 이억상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다. 이억상은 일신정을 지어 공부하며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
대구시 북구 서변동에 자리한 백운정은 조선말기 유학자 백운 이화상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화상은 당대 영남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정이 짙은 시 98수가 전해진다. |
채국정은 인천이씨 32세손인 긍재 이병운의 강학소였다. 이병훈은 1872년 대구 향교를 이전할 때 상량문을 지은 인물이다. |
서계서원 뒤편에 자리한 금서재는 인천이씨 30세손인 금서재 이석규의 재실이다. 영리하고 비범했던 이석규는 문장력까지 탁월해 도내에 명성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
서계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망일봉 자락 아래 일신정과 채국정으로 가는 길. 후손들의 관리 덕분인지 정자 주변은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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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하나씩 고개를 내미는 집들이 있다. 무태 서계서원으로부터 가지처럼 뻗어 이어지는 길 이곳저곳에서 불쑥. 오천 이문화와 태암 이주로부터 이어져 온 후예들의 집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합되어 있는 21세기의 표층위에서 그들은 범용하고도 정돈된 긍지로 자리한다. 이어간다거나 지킨다는 것의 무게를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놀랍다. 오래된 고집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미 의지다.
서계서원 뒤편 위치한 금서재
비범한 문장가 이석규의 재실
망일봉 자락 뒤뜰삼은 일신정
수헌 이억상 후진양성하던 곳
붓글씨로 명성을 떨친 이병선
서변동 조산엔 그를 기린 만송정
동화천 건너 동변동에도
선비정신 담긴 영사재·원장루
#1. 백운정과 금서재
서계서원의 뒤편에 금서재(琴西齋)가 있다. 인천이씨 30세손인 금서재 이석규(李錫奎)의 재실이다. 금서란 ‘금호강의 서쪽’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1816년에 태어난 그는 효와 우애가 깊었고 영리하고 비범했으며 문장이 탁월해 도내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흑산도로 유배가게 되자 방면을 청원하였으며 을사년 늑약에 앞서 반대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1892년 늑약의 치욕을 겪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재실은 사림들이 계를 만들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
서계서원 위에는 흰 구름을 뜻하는 백운정(白雲亭)이 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네 칸 아담한 건물로 연꽃 조각으로 장식한 공포와 보머리의 봉황이 화려한 정자다. 백운정은 조선말기의 유학자 백운 이화상(李華祥)이 강학하던 곳이다. 그는 인천이씨 31세손으로 1842년 무태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기호학파 학자이자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천성이 따뜻하고 어질며 순수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당대 영남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정이 짙은 시 98수가 전해진다. 그는 백운정에서 74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2. 일신정과 채국정 그리고 정관정
서계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에 망일봉 자락을 뒤뜰 삼은 일신정(日新亭)과 채국정(採菊亭)이 있다. 일신정은 인천이씨 31세손 수헌(守軒) 이억상(李億祥)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다. 그는 1835년 무태에서 태어나 일찍 일신정을 지어 공부하며 후진들을 양성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 최익현 등이 즐겨 찾아와 기문(記文)을 짓기도 하였고 일신정 운(韻)을 띄워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05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변동 도곡지 아래에는 후손들이 지은 재실 척첨재(陟瞻齋)가 지금도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일신정 아래 채국정은 인천이씨 32세손인 긍재(兢齋) 이병운(李柄運)의 강학소였다. 그는 1858년 무태에서 태어나 연재 송병선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6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의 시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복판(復板) 인쇄할 때 국내 유림회(儒林會)에서 추천 임명하여 우두머리로 활약했고 1872년 대구 향교를 이전할 때는 상량문을 지었다. 환성정의 주인 태암공(苔巖) 이주(李)가 1599년 대구 향교를 달성으로 이건할 때 상량문을 지었는데 300여 년이 지나 태암의 후손이 대를 이어 상량문을 지었으니 인천이씨 집안으로서는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는 만년에 채국정을 지어 은거했다. 향리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 보인계(輔仁契)를 만들어 강학하였으며 그가 1937년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사림회의 예법으로 장례를 치렀다.
서계서원 남쪽, 현재 무태어린이집 옆에는 정관정(靜觀亭)이 있다. 인천이씨 32세손 묵재(默齋) 이병철(李柄喆)의 재실로 그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72년에 건립했다. 이병철 역시 묵재와 심석재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대구향교 및 근동의 선비들과 활발하게 학문적으로 교유했다. 특히 그는 일신정의 수헌 이억상과 더불어 무태 인천이씨 문중의 성리학적 학풍을, 우암 송시열을 학파 시조로 하는 노론 기호학파로 계승하게 한 인물로 평가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택와(擇窩) 우하철(禹夏轍), 중재(重齋) 윤봉주(尹奉周) 등과 함께 스승인 연재와 심석재를 모시고 상경해 조약의 부당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스승 연재가 자결하고 연이어 심석재가 순절하자 이병철은 울분을 토하며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3. 만송정과 회연정사
서변동에 조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인천이씨 32세손 창주(蒼洲) 이병선(李柄選)의 정자인 만송정(晩松亭)이 자리한다. 몸가짐과 행동이 단아했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효우가 깊었고 특히 붓글씨가 뛰어나 나라안팎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만송정은 그의 자손이 선대의 뜻을 이어 묘아래 지었는데 ‘만송개취간송만취(晩松蓋取澗松晩翠)’의 뜻이라 한다. ‘노송은 대개 그 상을 취하는데 깊은 골 시냇가의 소나무는 늦도록 푸르다’ 정도로 풀이하면 될까.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다만 물빛처럼, 솔빛처럼 푸르렀던 선대에 대한 영모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도곡지가 있는 서변동 도곡마을은 외부에서는 마을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입구가 좁은데 안으로 들면 나지막한 산으로 오목하게 둘러싸인 하늘 넓은 아늑한 땅이다. 그곳에 인천이씨 33세손인 회연(晦淵) 이순희(李淳熙)의 정자 회연정사가 자리한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영남일보 제3대 사장을 지낸 그는 총명하고 의리 있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회연정사는 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회 정치적 세계 저편에 마련했던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4. 영사재와 원장루
동화천 건너 동변동에도 인천이씨의 정자가 자리한다. 서계서원의 맞은편 동화천변에는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인천이씨 25세손인 천하(川下) 이영환(李英煥)의 재실이다. 흙돌담에 둘러싸인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35년에 후손들이 건립했다. 그는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분수를 지키며 학문에 힘쓴 인물이라고 한다. 영사재의 입구 협문인 삼성문 양쪽으로 작은 화단이 가꾸어져 있고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천하의 집을 지키듯 서있다.
동변동 금호강변의 화담 아래에는 원장루(遠長樓)가 있다. 인천이씨 33세손 확재(確齋) 이창희(李昌熙) 정자다. 그는 1898년 무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채국정의 주인인 긍재 이병운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지재(止齋) 송철헌(宋哲憲), 후암(后庵) 송회헌(宋會憲), 후담(後潭) 채헌식(蔡憲植) 선생 등 원근의 여러 학자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천성이 강철과 같이 굳고 밝았다고 한다. 또한 평생 명리를 좇지 않고 자신과 집안을 바르게 하는데 힘썼으며 다른 사람의 단·장점이나 옳고그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원장루는 그가 만년에 지은 정자로 탁족을 즐기며 벗들과 함께 음풍농월로 소요한 곳이라 한다. 1969년 세상을 떠난 그는 원장루 뒷산에 묻혔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다. 그러나 무척이나 오래전인 듯 느껴지는 과거다.
글=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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