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東書院과 道東院規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동방(조선)오현의 첫머리(首賢)를 차지하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 서원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보로동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道東)은 성리학의 도(道)가 처음으로 동(東)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으로부터 '도학의 으뜸스승'(近世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손님이 도동 강나루에서 나룻배 한 척을 띄워 놓고 혼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는 벽화.
우리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 선생은 포은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道統論)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 (신도비
참고) 대구야말로 처음으로 도학이 뿌리를 내렸던 도학의 발생지(發生地)라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우리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도동 서원은 영남 예학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정구(鄭逑)
선생(1543-1620)은 청주 정문(鄭門)으로, 호(號)를 한강(寒岡)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선생은 중종 왕 때 성주(星州) 대가면
유촌柳村에서 태어나서, 성주향교 교수로 온 덕계 오건에게 동강 김우옹과 함께 배웠고 퇴계와 남명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선생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한강은 중앙관직을 되도록 멀리하시고, 주로 지방 관직을 스스로 맡아서 지방학문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영의정으로 추증받았고, 문목(文穆)으로 시호를 받았다. 한강은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 사이를 오가면서 학문을 익혔다. 선생의 학문과 인격 수양의 자세는 퇴계를 닮았고, 더 높은 기상은 남명의 모습 그대로이다 라고 알려졌다.
서원의 근처에 있는 송담서원은 대암(大庵) 박성(朴惺)을 모시는 서원이다.
한강은 대암과 같은 시기에 서로 친분을 나누었다. 기호 예학이 사계(沙溪) 김장생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영남 예학은 한강에 의해 체계가 이루어졌다. 선생의 학문은 인조 대왕 때 산림 처사로
알려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미수 허목을 거쳐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 하려 황덕길, 성재 허전/녹암 권철신-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모두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합격자는 문인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110인으로, 시호(諡號)가 밝혀진 문인도 9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동서원은 한강과 여헌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남인계
한려학파(寒旅學派)를 형성하였고, 대구 성주를 중심으로하는 영남 중부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도동서원 입구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나무 가지를 잔뜩 드리우고 있다. 한강 정구(鄭逑)
선생이 도동서원 사액을 기념(1605)하여 기념해서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도동서원의 역사를 같이하고 있는 400년 이상 세월을
지냈다. 수령이 400년 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 20m, 가슴둘레는 7.9m, 수관 폭 31m * 30m 이고,
동쪽 가지는 30m, 서쪽 25m, 남쪽 28m, 중앙 22m이다.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기운이 강해서 기상 높은 선비를 기르는 최고의 상징으로, 서원이나 향교 앞에는 한 두 그루 심어져있다.
은행나무는 해마다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해마다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려는 소망이 들어 있다.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울음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북쪽으로 넘은 가지가 부러졌지만 나무 밑에 놀던 어린이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부러지면서도 어린이들을 보호한 나무이지만 오랜 연륜으로 제 힘으로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굵은 콘크리트 기둥(1977년 설치) 다섯 개에 의지하고 있다.
서원을 들어서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의
넓은 들판이 보이는 수월루(水月樓)라는 정자가 있어 공부하던 유생들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는 물위에 비친 달빛으로 읽는 수월루(水月樓)이다.
수월루는 유생들이 엄격한 서원생활에서 슬며시 벗어나 시를 지어보거나, 경치를 즐기는 누각이다. 수월루 밑의 외삼문(外三門)으로 들어가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환주문으로 들어간다. 문 입구에 문턱이 놓여야 할 자리에 꽂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놓아서, 잠시 머물러 복장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재치도 숨어있다. 수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도동원규(道東院規)
중정당 왼쪽 벽에는 서원의 학칙으로 제정하였던「도동원규」현판을 걸어두었다.「원규」는 도동서원이 선조 37년(1604)에 조정으로부터 사액 받았을 때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62세 때 제정하였다고 한다. 영남지역 남인계 서원은 거의 대부분 원규의 모범이 된 중국「백록동서원규白鹿洞書院規」와 퇴계가 처음으로 제정해서 실행하였던 영주 이산서원의「이산원규伊山院規」를 모범으로 해서 따르고 있다.
중국 주자는 조정에 건의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다시 중건하였고, 경서를 수집하고 학생들을 모아 강학하였다. 주자는 자신이 평소에 생각한 교육의 목적 내지 방법을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기위하여 널리 보이는 글, 즉 게시(揭示)를 현판에 작성해 걸어두었다. 그가 작성한 게시는「학규」라고 한다. 이「백록원규」에서는 제일 먼저 유교에서 강조하는 다섯 가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인륜, 즉 오륜(五倫)에서 시작하였다.
다음에 학문하는 순서는 박학(博學, 넓게 배우고) 심문(審問, 자세히 묻고) 신사(愼思, 신중히 생각하고) 명변(明辯, 분명히 구별하고)으로 정하고, 독행(篤行, 독실히 실천한다)으로 끝맺음한다. 이 내용은「중용」20장에서 진실함을 이루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
「도동원규」는 앞 두 서원「원규」와 기본방향은 같지만, 그 내용이 다른 서원「원규」보다도 상당히 구체적이면서 독창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중국 주자가 제정한「백록동규」와 퇴계가 지은「이산원규」에 이르는 서원 원규의 전형을 벗어나서, 서원 교육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과 규칙을 분명히 밝혔다. 이「도동원규」는 8개조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조마다 또 몇 개 항목을 두고 그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1. 향사를 정성으로 지내는 방법(謹享祀)
서원은 향교를 대신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향교와 서로 보완하는 일체관계임을 언급하고 있다, 향교 석전이 끝난 뒤에 본 원의 향사는 중정일에 행하도록 한다.
향교와 서원은 서로 일체를 도모해서 그 선후 질서가 있기를 바란다. 만약 향사에 불참한 자가 있으면 장부에 기록하고, 유고 무고를 아울러 쓰고, 기다렸다가 뒷날에 유회에서 마주대하여 꾸짖는다. 일곱 번이나 불참한 자는 서원에서 추방하고, 까닭없이 다섯 번 불참한 자도 추방한다.
釋奠後, 本院祀事, 行於中丁, 庶幾彼此, 一體先後有論也. 如有不參之員, 書于籍, 有故無故竝錄之, 以待後會面責, 至七度不參者, 乃黜之, 無故不參者, 五度而黜之.
2. 원장의 자격과 임무(尊院長)
원장은 서원을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이며, 또한 서원 모든 일을 관장한다. 모든 원생은 마땅히 존경하고 머리숙여 절하여야 한다. 원장직은 자주 가볍게 교체해서는 안 되면, 만약 원장에게 혹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원장에게 마주대하여 꾸짖는 면책이나, 그 지역에서 내쫓는 손도의 법을 가할 수 없다. 院長者, 所以爲一院之長. 入院之士, 所當尊畏矜式. 院長之任, 不可數數輕改. 院長或有過誤, 面責損徒之罰, 不敢加於院長.
초기에 원장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 현풍 곽씨와 후손 서흥 김씨를 중심으로 해서, 성주 고령 지역 사림들이 임명되었다. 몇 몇 사람이 재임 중임을 거듭하면서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는데, 초대 원장 곽근은 약 16년간에 걸쳐 원장으로 재임하였다. 대체로 현직 관료는 많지 않고, 대부분 생원과 진사 등 전직 하급 관료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부분 원장들은「서원입원록」에 등록되었던 원생 출신들이 많았다. 원생은 빠르면 10년 안에, 또는 몇 십년 뒤에 원장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상주 안동 예안 대구 지역 사림들이 임명되었다. 최흥원, 정종로, 유치명, 허전, 하겸진 등 유력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그 지역 고을 수령이 원장으로 선출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대부분 영남 남인계 서원들은 서원 경영에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면서, 면세 면역 등 지방 관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 관청 의존도가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3. 유사의 자격(擇有司)
유사 역시 서원의 일을 맡아 처리하고 다스리는 자이다. 원장과 임원이 서로 의논해서 뽑는다. 有司者亦所以管攝一院之事者也. 院長與院中, 同議擇之.
중정당 현판 밑 흰 종이에는 서원의 운영에 실질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유사(有司)의 이름과 직책을 밝히고 있다. 오른쪽부터 도유사(都有司), 향유사(鄕有司), 본손 유사(本孫有司) 차례로 쓰여 졌다.
4. 원생의 입학 자격(引新進)
향사 날에 신입생을 의논해서 추천한다. 사람마다 한 명씩 제각기 추천해서 원장에게 올린다. 무릇 추천받은 신입은 반드시 20세를 넘기고 학행이 두드러진 자라야 한다. 비록 약관에 이르지 않더라도 이미 진사나 생원을 선발하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거나, 향거(초시)에 여러 번 합격해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자도 참여할 수 있다. 입원 원생이 만약 행실을 닦지 않고 행동거지가 어긋나면, 가벼운 경우에는 원장이 규찰하고 무거우면 원중에서 마주대하여 꾸짖는 면책한다.
每於享祀之日, 議引新進, 每人各薦一員, 進于院長. 凡所薦進, 必二十歲以後, 有學行可觀者. 雖未滿弱冠, 而司馬入格, 或累中鄕擧, 而才行超異, 可齒三益之列者.
대체로 추천주는 원규에 정해진 규정대로 원생 1명을 추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때로는 3-5명까지 추천하였고, 추천주 여러 명이 1명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서원에서 원생의 정원은 그 지역 사회 범위와 경제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정해졌다.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은 정원이 1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원생이 오랜 기간동안에 상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가까운 지역 원생은 대체로 기한을 정해 교대로 몇 일간에 걸쳐 입원하였다. 먼 지역 원생은 몇 달씩 머물렀다고 한다.
5. 자리에 앉는 순서(定坐次)
자리에 앉는 순서는 나이 차례대로 한다. 만약 관직이 다른 자나 혹은 다른 손님이 있을 경우에는 따로 차례를 정한다. 坐必序齒. 若有異爵者, 或有他客, 竝皆別序.
6. 교육 방법과 내용(勤講習)
원장은 원생을 불러 모아 교육 권장하기를 폐하지 않아야 한다. 겨울 봄에는 오경과 사서 및 여러 성리학 책을 읽고, 여름 가을에는 역사책과 여러 선생의 문집을 정도에 맞게 읽히도록 한다. 입원생은 비록 과거공부는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과거시험 이외에도 또한 옛날 학자들이 말한 바 자기를 위한 학문이 있다.
비록 능히 전심전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혹 여기에서 마음을 쓸 수도 있다.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찾았고 본성 안에 인, 의, 예, 지가 모두 갖추어졌고, 그 마음을 지키고 길렀다. 힘써 노력하는 방법이 공경함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이천 선생이 처음으로 이를 밝혔고, 주자가 이를 크게 밝혔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선생이 일생동안 일관해서 힘써 노력한 모두가 이 경(敬)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
「백록학규」는 처마 대들보 사이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 보는 것은 이 곳이 덕업을 닦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여씨향약」을 본받아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잘못을 꾸짖는 뜻을 어기지 않기 위함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배우는 일은 진실로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이끌어 도와주며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에는 지방 수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쉬는 날에 찾아와서 여러 원생들을 이끌어주며 학문을 밝히고 이것을 권도해 준다면, 감동해서 이를 본받게 되어 스스로 성취하고 흥기시킬 자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옛날 학자가 서원을 설립한 뜻이 시장거리나 시끄러운 도시를 피해서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자리잡게 하려는 까닭이니, 처음부터 관청의 법령으로 규제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院長迎請朋徒, 不廢勸講. 冬春五經四書與伊洛諸性理之書, 夏秋史學子集. 任其所讀, 夫入院之士, 雖不能不爲科擧之事, 而科擧之外, 亦有古人, 所謂爲己之學者. 苟能不全爲彼所奪, 而或能用心於此焉. 而求之於日用. 性分之內, 則其存心之也. 用力之方, 庶幾不越乎, 敬之一字矣. 伊川夫子始表章之, 而雲谷夫子大明之. 寒暄堂一生辛苦, 皆是此字也. 白鹿學規, 揭在楣間, 宜朝夕觀瞻, 以爲勖率之地. 而又略倣呂氏鄕約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庶幾無負, 今日責望之意. 群居講習之事, 固不敢廢. 而誘掖作成之方, 責在土主. 暇日來會, 倡率諸生, 講明古人之學, 而勸導之, 則觀感慕效之, 間自有成就興起之. 古人設院之意, 所以避朝市, 城郭之鬧, 置寬閑寂寞之境, 庶幾官家法令, 不相拘?.
서원 교육은 서원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교육 과목은 겨울과 봄에는 사서오경과 성리학에 관한 책을, 여름과 가을에는『춘추春秋』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역사책과 유교와 관계 깊은 문학과 시를 읽고 가르쳤다.『예기禮記』「학기편學記篇」4장에서 사계절의 교육에는 반드시 그 계절에 맞는 교육을 하였다. 時敎必有正業라고 하였다.
봄과 가을에는 예의와 음악을 가르치고, 여름과 겨울에는 시와 글을 가르쳤다. 봄에는 소리내어 글을 읽고, 여름에는 거문고와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불렸다. 여름에는 졸음이 자주 오고 정신 집중이 잘 안되므로, 재미있는 역사책과 시집 등 문학 작품을 자주 읽히고, 겨울에는 정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유교 경전을 읽게 하였다.
7. 선생을 맞이하는 예절(禮賢士)
원장은 원생들을 데리고 선생을 예의로서 맞이하여 스승을 높인다면, 느끼는 바가 있어 사모하여 기뻐할 것이다. 院長宜率朋徒 以禮迎請, 而師尊之庶幾有所觀感.
8. 금지사항(嚴禁防)을 8 개조로 나누어 자세히 규정하였다.
가장 엄격히 지켜졌던 마지막의 금지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 두었다.
(1) 노자(老子)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 및 불경과 바둑과 장기 놀이를 해
서는 안된다. 莊列老釋之書, 碁局博奕之戱, 皆不得入院.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바둑과 장기 놀이를 금지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동몽선습」은 조선 중종 때 유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책으로, 서당에
서 어린이들이 천자문을 배우고 나서, 다음에 익히는 초급 기본서이다.
「총론 總論」에서 바둑과 장기 놀이를 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어버이
모시기를 돌보지 않는다.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고 하였다. 비록 몸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려
는 뜻을 담고 있다.
(2) 무릇 무인이나 잡술가 모두 출입할 수 없다.
凡異色之人, 皆不得出入(異色如武夫雜術之徒).
(3) 제주(祭酒) 이외에 술을 빚어서는 안 된다.
淸酌之外, 不得釀酒.
(4) 제수(祭需) 이외에 소를 잡아서는 안 된다.
尹祭之外, 不得殺牛.
(5) 신분이 천한 하녀는 재실과 강당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婢子, 不得出入齋堂.
안동 도산서원 진도문(進道門)과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무변루(無邊樓) 처마 아래에는 작은북을 매달았다. 원규를 어기는 원생이 있으면, 제일 먼저 발견한 유생이 북을 치며, 원생 모두 힘을 합하여 문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논어』「선진편」에서 “이제 우리 무리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치며 공격해도 좋다 子曰, 非吾徒也. 小子, 鳴鼓而攻之, 可也”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북은 입학해서 첫 수업이 시작하는 때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예기禮記「학기편」3장에서도 “처음으로 입학해서 첫 수업을 받았을 때에 북을 쳐서 그 시작을 알리고, 학생들이 상자를 열고 책을 꺼내도록 하였다. 孫其業, 入學鼓?.”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했다. 1604년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뛰어난 예학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7년 도동서원이라고 사액 되었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5대 서원(도동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중 일등 서원인 수위 서원(首位書院)이다.
(수월루 전경) - 올라가는 진입계단이 1개소이며 좁다.
아마도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함이 아닐런지!
도동서원의 대지 단면을 볼 것 같으면 전체적으로 4개단으로 조성되어 있고 첫째 단은 사당 둘째단은 강당, 셋째 단은 서재와 환주문, 넷째 단은 루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월루 안쪽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
(환주문 입구에서 본 강당) - 현판이 정연하게 나타나 선비의 마음가짐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함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진입영역으로 가운데 좁고 긴 계단이 가볍게 휘어지며 환주문까지 이어진다. 환주문(喚主門)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으로 그 주인은 내마음의 주인일 수도 있고 문안에 있는 주인일 수도 있으리라. 이 환주문이 아마 도동서원에서 가장 귀엽고 매력적인 건물이리라.
(환주문 정지석) - 모란꽃 봉우리 형태로 다듬었음
갓 쓴 유생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작은 사주문(四柱門)으로 지붕에는 사모형태로 절병통이 얹힌 예쁘고 귀여운 형태의 건물이다. 아마도 환주문이 높았다면 강당에서 수월루를 통하여 낙동강의 모습을 볼 수 없기에 낮게 지은 듯 하고 문지방이 있어야 하는 곳에는 정지석으로 대체하였고 정지석에도 꽃봉오리 형태로 다듬어 문을 열고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이로 하여금 잠시 머물기를 유도하는 선조들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
(중정당 앞 계단석 수석 - 거북이 상)
환주문을 지나 강당으로 진입하다보면 좌우측으로 서재가 있고,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었다. 그 끝에는 낮은 축대를 횡으로 쌓아 중정당이 들어선 지대와 동서 양재가 앉은 지대를 구별하였다.
돌길과 만나는 축대의 중앙에는 돌거북의 머리가 돌출되어 있는데 양쪽의 송곳니가 비죽이 나온 길게 찢어진 입을 앙다물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인상을 쓴 모습이 제법 사나워 보인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정당 전경) - 거북돌이 단을 형성하여 놓았음
평면구성은 세 칸의 대청이며 그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덤벙 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를 짜 올렸으며 창방의 중간마다 화반을 받쳤다. 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은 탓인지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
마치 흔들림 없는 도학자가 의젓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앉은 듯 하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 면석 근경) 12개면 ↑
중정당에서 무엇보다 흥미와 애착이 가는 부분은 기단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고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해진다. 기단면의 넓이는 길이 17m, 높이 1.4m 정도이며 측면은 대지의 상승과 비례하여 점차 낮아진다. 다듬은 돌을 쌓아 올라가다가 앞으로 약간 내민 판석을 가지런히 깔아 갑석으로 삼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갑석을 들여 깔아 마무리하였다.
정면 중앙에는 양쪽으로 나누어 계단을 설치하였고 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머리만을 내밀고 있는가 하면 다람쥐를 닮은 작은 짐승이 꽃송이를 옆에 두고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조각된 돌이 박혀 있기도 하다. 기단을 쌓아올린 솜씨는 기교라기보다는 정성 그 자체다. 주변에서 나는 돌을 똑같은 크기가 하나도 없게 다듬어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이 진 돌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공력을 들였는데, 심지어는 12모가 접힌 돌이 있을 정도이다. 지금 같으면 기계로 네모지게 잘라 시공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만 낭비이고 인력만 낭비라는 이유로 그렇게 시공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성이 깃든 흔적이라 볼 수 있어 난 중정단의 기단을 볼 때 선조들의 성의와 정성 즉, 장인정신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중정당 후원-사당 내삼문앞 계단) - 좌우측에 모란꽃이 만개하여 있음
중정단의 뒤쪽에는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 또한 소맷돌 대신에 설치한 동자 난간석에는 목련 꽃 모양을 수놓았으며 이는 양쪽 경사진 후원에 심어놓은 모란꽃과 배롱나무 등이 지는 시기 즉 겨울에도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재치라 생각된다.
이외에 담장을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래위 두 줄로 듬성듬성 수막새를 박아 무늬를 내었다.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들어내는 담장 면의 변화와 담장 지붕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우리 건축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눈 맛을 준다.
(도동서원 원경) - 지형에 맞추어 단을 지어 건축되어 있음
도동서원은 부분과 전체가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도동서원이 유교적 규범과 예법에만 충실했다면 건축적 평가가 지금처럼 높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연을 끌어들이는 수월루, 수월루가 없었다면 서원의 정문이면서 자못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환주문의 미묘한 크기와 모양, 중정당의 기단을 비롯한 요소 요소에서 빛나고 있는 석물들, 담장의 선과 면들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분위기 이런 파격과 유희적 요소들이 있음으로 하여 도동서원은 건축적으로 완성되고 균형 잡힌 건축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출처 : 답사 자료집 - 가야 문화유산 순례. 문화관광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