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大邱 老巨樹

대구시 노거수 예방기(禮訪記) (현제명 나무 / 존슨 사과나무)

초암 정만순 2017. 9. 18. 18:21




대구시 노거수 예방기(禮訪記) (현제명 나무 / 존슨 사과나무)




편집중~~



      

玄濟明(현제명) 나무

수종 : 이팝나무
수령 약 200년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34 대구제일교회 내



존슨 나무

수종 : 사과나무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34 청라언덕 내





대구제일교회


약전골목 내에 있는 원 대구제일교회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1992년 1월 7일 지정)

   



현 교회는 동산동 234번(전 영남신학대학교 부지)일대에 새 성전을 건축하여 1994년 6월에 이전하고 2002년 4월 헌당하였음.



玄石(현석) 玄濟明(현제명) 대구 출신의 성악가이자 작곡가 일제 말기와 해방직후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1931년에는 조선음악가 협회를 창립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펴낸다. '현제명 작곡집 제2집'은 1933년에 나온다.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연희전문학교 교원의 직위를 잃게 된다.
일제 말의 어둠의 시기에 그는 일본에 기울게 된다.

 

그의 노래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해방 후 널리 불려졌다.
'고향생각', '그 집앞', '산들바람', '희망의 나라로', '나물캐는 처녀'현재 서울대 음대를 창설하은데 주역이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 근대 음악사의 기틀을 세운 업적과 함께 항상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었던 인물들이다.

 
한국 근대 음악사의 개척자이자 선구자 음악인들을 친일파로 매도하지 말라고 음악계 인사들이 친일음악가 재평가를 위해서 나섰다.


시인이자 작사가인 정치근씨는 당시 상황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제멋대로 친일을 운운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일제의
강요에 생명을 부지시키기 위해 쓴 것을 가지고 반역으로 몰아붙인다면 너무 가혹한 행위라고 말했다.


옛날부터 재래종인 능금을 재배했지만 최근에는 외국에서 도입된 개량종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1884년경부터 외국 선교사가 각 지방에 몇 그루를 들여와 재식했는데, 처음에는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상수로 심었다.

1901년 윤병수가 미국 선교사를 통해 다량의 사과 묘목을 들여와 원산 부근에 과수원을 만들어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경제적 재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하면 지금도 사과를 연상할 만큼 한 때 대구는 전국적인 사과 명산지였다. 그러나 도시화와 지구온난화로 평광동 등 일부 산간지역을 제외하고는 사과밭을 구경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몇 년 전 년 미국인 선교사 존슨이 가져와 최초로 대구에 심은 사과나무의 2세목이 발견되어 그가 초대원장으로 있던 동산의료원 구내에 심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귀중한 유전자원이 살아있다는 기쁨에 서둘러 보호수로 지정했다. 대구시가 직접 관리해 대구가 한때 사과 명산지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을에 찾았더니 주먹보다 큰 오늘날의 사과와 달리 아주 작은 조경용으로 도입된 꽃사과 열매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당초 존슨이 들여왔던 원조 사과나무가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면밀하게 검토하지 아니하고 보호수로 지정한 같아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대구시 장정걸 사무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2세목의 수세가 워낙 나쁘기 때문에 접순을 채취해 길러 놓은 것이 있어 중구청으로 하여금 현지에 심도록 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존슨의 사과나무가 우리나라 서양사과나무재배의 효시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느냐고 했다.

자료 뒤져보았더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과나무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대구사과나무의 효시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고 이번 기회에 서양사과나무의 대구도입경로를 정리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문헌을 살폈다. 대구에 보급된 서양사과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대구부사, 우에노 히꼬하찌, 1943년 ,번역 손필헌>였다. 1892년 영국인 선교사 푸렛쳐(A.G.Flecher)가 ‘스미스사이드’, ‘레드베아민’, ‘미조리’ 등 3개 품종을 가져와 자택이 심었다고 했다. 이어 <대구시사,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광역시, 1995년>도 1892년 영국인 선교사 프렛차에 의해 소개된 후 대구 농업의 상징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간행된 <경북능금백년사, 경상북도 중앙개발주식회사,1997, 3>에서도 대구부사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얼마 후 푸렛처 도입설에 대해 박영규(전 대구MBC전무)라는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대구능금 내력의 오류, 중악집 제2호, 1992>에서 대구부사나 대구시사의 오류를 자세히 지적하면서 최초 도입자는 닥터 존슨(한국명, 장인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산의료원 100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1999, 48쪽>은 최초로 서양사과를 도입한 사람은 존슨과 아담스 두 사람이라고 적시했다. 다만 보급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었는데 ‘존슨은 묘목을 수입 그대로 나눠주고 아담스는 접목한 후에 나눠준 것에 차이가 있고, 수입처도 존슨은 미조리주이고, 아담스는 켄서스주라는 사실이 다르며 ---아무튼 존슨이 사과나무를 수입해서 동산에 심고 교인들에게 보급하였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봐야 될 것이다.’라고 했다.

마지막 검토대상인 2세목 앞에 설치해 둔 <사과나무 100년> 표석(標石)에 의하면 ‘여기에 뿌리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최초의 서양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이다.

초대 병원장인 존슨박사(Wood bridge O, Johnson, 한국명, 장인차)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미조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재배한 것이 대구 서양사과나무의 효시이다.’ 라고 하여 박영규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대구부사(大邱府史)>가 최초로 사과나무를 들여온 사람으로 지목한 푸렛처는 존슨, 국적 영국은 미국의 착오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푸렛쳐 역시 의료선교사이기는 하나 존슨이 초대 동산의료원장을 사임한 후 2대 동산의료원장으로 재임(1911~1941)했으며 국적도 영국이 아니고 영국계의 미국 국적 소유자였다.

또한 2세목의 열매가 서양 사과답지 않게 작다고 오해한 부분도 이해가 되었다. 당초 존슨이 들여온 것이 실생묘(實生苗, 종자로 싹을 틔워 키운 나무)라는 점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과일나무는 접목을 해야 크고 충실한 열매가 열린다.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보다 더 정확한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 다면 대구의 서양사과나무의 도입년도는 1899년이며, 아담스와 존슨 두 사람에 의해 최초로 들여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호수는 접붙인 나무가 아닌 것을 그대로 보급한 존슨이 미조리주에서 들여온 나무의 2세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