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제우 동상 달성공원의 관풍루 인근에 있다. | |
ⓒ 정만진 |
대구시 노거수 예방기(禮訪記) (종로초등학교 최제우 나무)
편집중~~
이번 보호수는 대구 중구 종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최제우나무'로도 불리는 회화나무이다. 수령은 400년가량 되었고, 수고는 17 m, 흉고직경은 2.8 m이다.
지정 번호는 1-4번. 최제우는 국사 시간에 한 번쯤 들어보았을 동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사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효수 당하기 전 경상감영에 있었는데, 종로초등학교가 그 경상감영이 있었던 터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한 배경을 한 번 알아보자.
“네 도(道)를 버리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여도 죽음을 면하고 살아날 길이 있으니 그리하라.”(경상도 감사 서헌순) “도(道)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나 스스로 당하리라.”(동학 창시자 최제우)
대구 도심에 동학, 오늘날 천도교의 수난사를 일깨워주는 세 번째 흔적이 지난 26일 생겼다. 바로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관덕당(觀德堂) 터의 일부로 여겨지는 현대백화점 앞에 건립된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순도비’이다. 순도비 건립으로 대구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첫 토종 종교라는 평가를 받은 동학을 기리는 흔적이 세 곳이다. 동상과 나무에 이어 세 곳으로 늘었다.
처음은 최제우가 도를 버리지 않고 따르고 지키다 죽은 순도(殉道) 100주년을 맞아 1964년 달성공원 안에 들어선 동상이다. 두 번째는 최제우가 갇힌 경상감영의 감옥 부근 즉 오늘날 종로초등학교 안의 수령 400년 넘은 최제우 나무다. 서헌순 감사가 최제우에게 조정의 명령으로 효수형을 내리자 잎사귀에서 수액이 떨어졌다는 사연을 간직한 회화나무에 2012년 대구시가 이름을 붙이면서다.
그런데 순도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0년대, 관덕당 부근에 있던 상제교(上帝敎) 교당 안에 처형 전말을 적은 비석이 위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초 최제우 순도 처형 터를 사들이고 비도 세웠을 것이지만 뒷날 주인이 바뀌면서 없어진 모양이다. 지금도 비석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이번 순도비 건립으로 대구는 잊힌 역사를 기릴 새 발자취를 하나 더 갖게 됐다. 순도비와 회화나무, 동상으로 이어지는 길. 동학 수난사를 증언하는 생생한 흔적이다. 동학은 그동안 세상과 너무 멀어졌다. 유학의 본고장인 경상(경북)에서, 그것도 유학 출신이 기존 유학과 어긋나는 다른 길을 걸으며 도를 어지럽힌 ‘좌도’(左道)의 죄를 저질렀으니 그랬을 만도 하다.
그가 1860년 깨닫고 인간 평등을 외치며 노비 해방도 모자라 종을 딸과 며느리로 삼는 실천의 삶을 살았기에 부패한 유학 세력으로서는 그냥 둘 수 없었을 터였지만 지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니 어째서인가. 유독 심한 영남 유림의 탄압과 핍박 속에 1864년 3월 10일 대구 형장에서 사라졌지만 가르침은 살아 특히 식민 시절, 1919년 3`1만세운동 등에서 숱한 빛을 남겼다. 70억원 들인 순종어가길과는 다른 ‘최제우의 길’을 기대하면 과욕일까
최제우와 최제우나무.
경상감영 감옥과 '최제우' 나무
수운의 하늘길 지켜보던 회화나무도 수액을 뿜으며 구슬피 울고…
경주에서 동학을 포교하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그릇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힌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중이었다.
수운 선생이 과천에 머무는 동안 철종 임금이 갑자기 젊은 연세에 붕어하시자,
지레 겁먹은 조정 중신들에 의해 수운 선생은 대구 경상감영으로 다시 환송되었다.
1864년 1월 6일, 수운 선생이 대구로 환송되자 감사 서헌순이 그를 심문하였다.
감사는 수운 선생의 위엄 있는 용모와 번개 같은 광채가 번득이는 눈을 보고 금상의 갑작스런 붕어와 수운 선생의 대구 환송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감사는 수운 선생을 죽일 마음이 싹 가셔 심복 이방을 불러 수운 선생의 회개를 유도하고 방면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선화당을 나온 이방은 곧바로 수운 선생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갔다.
감옥 옆에 회화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옥 안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수운 선생, 그대는 양반의 자식으로 그릇된 도리로 무리를 모아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하나
조상의 공덕과 부친의 학덕을 참작하고 새 임금님의 등극이 있는 점을 감안하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겠다고 약조한다면 방면을 건의하고자 한다.”
이방이 수운 선생의 눈을 피해 입술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조건부 방면을 제안했다.
“내 그대의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으나 죄가 없으니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소 ?
이 지경이 되기 전에 피신하라는 청을 받았으나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했소.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어찌 감히 피하겠소 ?
어찌 내가 몸을 피하여 그 화를 무고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겠소 ?
또 내 스스로 헤아리니 시운이 이미 그러한 것 같소. 내 정리를 미리 다 하고 왔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수운 선생은 창밖으로 보이는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이방은 수운 선생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매우 분개하여 옥졸에게 곤장을 치라 명했다.
초장에 기를 팍 꺾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방의 명을 받은 옥졸이 곤장을 치자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이방과 옥졸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옥졸의 바짓가랑이로 한 줄기 오줌이 흘러내렸다.
수운 선생의 이적(異蹟)에 이방은 더 이상 수작을 걸지 못하고
선화당으로 돌아와 감사에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방의 보고를 들은 감사는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쳐다봤다.
“계속 설득해 보도록 하라.”
감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방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후, 이방은 틈만 나면 감옥으로 수운 선생을 찾아 회개할 것을 설득하곤 했다.
“수운 선생, 우리는 선의로 선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비록 죄가 없더라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죄를 회개한다고 해주면 안 되겠소 ?”
“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니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생각대로 처분하시오.”
이방은 감사의 지시에 따라 수운 선생을 설득하려고
무려 스물한 차례나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문하였으나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바위산과 같았다.
관원에 체포되기 전,
미리 시운을 알아차린 수운 선생에게서 동학 교주 자리를 물려받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 선생도,
독자적으로 여러 선을 통해 그 스승의 방면을 시도하였다.
수운 선생이 경상감영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신도들이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구원금을 모았다.
이 구원금은 수운 선생과 옥졸, 죄수들의 사식비로 주로 쓰였기 때문에
모두가 수운 선생과 동학 교도들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옥졸과 의형제까지 맺은 해월 선생은 옥졸의 옷을 갈아입고 직접 옥중으로 들어가
수운 선생을 독대하여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스승의 굳은 결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관원이 당신을 체포하러 오는 날을 미리 알고 해월에게 일찌감치 교주를 물려주었으며,
특별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날 용담정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멀리 잠행하여 포교할 것을 명한 수운 선생인지라,
동학을 조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스스로 감옥을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점을 해월 선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승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는 것 또한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옥문을 열어놓다시피 하고 옥졸이 자리를 비워도 수운 선생은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옥졸들마저 날이 갈수록 수운 선생에게 교화되어가자
감사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좌도난정지율(左道亂正之律)을 적용하여 수운 선생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감사의 효수형 명령이 떨어지자 수운 선생을 지켜보던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옥졸들도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 회화나무를 ‘최제우 나무’라고 불렀다.
이 나무는 지금도 대구종로초등학교 교내에 서서 그때의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수운 선생의 순교와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적극적인 포교로
동학은 조선의 사회개혁운동을 견인하는 중추적 사상이 되었다.
1894년 동학의 접주였던 전봉준은 갑오농민혁명을 주도하여 전주성까지 점령하며 그 기세를 떨쳤으나,
청과 일본 등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갑오개혁이란 이름으로 부분적이나마 약간의 사회개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순종 조에 들어 수운 최제우 선생의 죄가 풀리고 천도교(동학의 후신)가 비로소 우리나라에 공인되었다.
천도교는 그 후에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때, 33인 중 손병희, 오세창을 비롯한 무려 15명이 천도교 인사로 구성된 점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성지, 관덕당이 대구 남산동에 있고,
교조 수운 최제우의 숨결이 서린 이른바 '최제우 나무'가 대구종로초등학교에 있다.
알고 보면 대구는 천도교와도 매우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대구를 아는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대구의 옛 도심, 스토리로 다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수운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敎祖)이다. 그의 동상이 대구에 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외래종교에 밀려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민족종교 동학을 창시한 인물의 동상이 어째서 이곳 대구에 우뚝 건립되어 있을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전국 방방골골의 초등학교마다 세워진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므로,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것은 새삼 눈이 가는 일이다.
종교에서 교조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동학 교조 최제우는 대구에서 죽었다. 거주지인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잡혀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있던 중 44세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그는 "등불은 물 위에 밝게 어리되 물과 어긋남이 없고, 기둥은 말라보이나 힘이 남아 있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면서 "높이 날고 멀리 뛰라(高飛遠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최후의 시간을 보낸 처형장은 대구 중심가의 제법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 관덕정 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에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 이름이 높다. | |
ⓒ 정만진 |
약전골목에서 동아쇼핑센터로 나와 대도로를 건너 적십자병원 바로 뒤 오르막길로 100미터만 올라가면 금세 그가 죽임을 당한 처형장에 닿는다. 흔히 사람들은 그곳을 "관덕정"이라 부른다. 종교 때문에 죽은 이들을 기려 건립된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웅장한 건물이 거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관덕정이 마치 수운의 순교와 연관이 있는 듯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그 건물은 최제우를 섬겨 세워진 것이 아니라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기려 건립되었다.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덕정 일대는 지금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높은 지대가 아니지만, 교통과 이동수단이 사뭇 달랐던 예전에는 그곳도 상당히 가파른 언덕배기로 여겨졌을 터이다. 실제로 그곳의 옛 지명은 아미산(峨嵋山)이었다. 아미산은 조선 시대에 군사들을 조련하는 훈련장이자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는데, '좌도난정(左道亂正, 左는 邪의 뜻)'이란 엄청난 죄목을 가졌던 사상범 수운도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수운은 그렇게 대구에서 죽었으니 그의 동상이 대구에 세워진 것이야 하등 뜻밖의 일도 아닌 셈이다.
▲ 최제우 동상 관풍루에서 바라본 최제우 동상. 달성공원 내부를 향해 서 있다. 좌우의 향나무가 장엄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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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의 동상은 달성공원 관풍루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마치 '높이 날고. 멀리 뛰라!'하고 소리높여 외치는 듯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공원 입장객들 상당수는 수운을 만나지도 못하는 채로 멀리 사라져 간다. 그들이 동물 구경에 여념이 없고, 동상 자체도 말끔하게 자란 향나무들로 좌우가 웅혼하게 가려져 있어 어쩔 도리가 없다. 민족종교 동학이 세를 잃어 교조가 처형당한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실정이니, 성지도 아닌 달성공원에나마 동상이 세워진 것도 감지덕지를 해야 할 일인가.
그러나 어찌 사람들만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을까! 지금의 병무청 주변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높고 우람한 고목들도 그의 죽음을 생생히 보았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로초등학교 교정 복판에 버티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수운 최제우의 자취는 없어졌고, 같이 숨쉬고 웃고 울었던 당대의 남녀노소도 모두 죽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하늘과 땅과 바람과 나무 들만은 여전히 그의 죽음을 증언하리라, 대구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 최제우 나무 사진은 경상감영 자리 옆에 있는 종로초등학교 전경이다. 최제우가 감영에서 처형장인 관덕정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아마도 이 나무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무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 |
ⓒ 정만진 |
수운이 죽자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거두어 경산 자인을 거쳐 경주에 당도한 후 용담정 아래에서 장례를 지낸다. 그 날이 3월 17일. 사교(邪敎)를 일으켜 민심을 혼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던 그는 1907년 순종 임금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3.1운동으로 이어진 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냉동설한보다도 더 엄혹한 식민지 시대와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을 거치면서 무성한 잎새 다 잃어버린 채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버렸다. 봄이 오면 다시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인가
최제우(1824~1862)는 경주 출신으로 호는 수운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많은 책을 읽었고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처로 떠돌아다니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네 전통 민간사상과 유불선의 장점을 융합하여 인내천(또는 시천주),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주창하는 민족종교,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민심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으로 경상감영감옥(현, 대구종로초등학교)에 구속시켰다가 참형을 결정하여, 아미산에서 순도하였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된 이 회화나무는 억울하게 희생된 그의 감옥생활을 지켜보았을 것으로 생각되어 "최제우나무"라 이름하였다.
'이 나무는 달성공원의 동상과 더불어 대구에서는 흔치 않은 경주 출신인 그의 유적이다.'라고 보호수 안내 책자에 써있다. 이걸 먼저 보았다면 달성공원에 들를 때 한번 찾아보았을 것을...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보면, 나무가 심어진 당시 배경이 아니더라도, 어떤 특기할만한 역사적 사건을 함께 한 배경이 있으면 그 이야기를 나무와 엮어 보호수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사족을 붙이자면, 조금만 더 걸으면 아직 현존하는 경상감영이 '경상감영공원'에 남아있다. 매일 수문장 교대식 같은 볼거리도 있으니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9세기 중반,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뜻을 내걸었건만, 그의 뜻은 너무 시대를 앞서 나갔던 걸까. 조선시대는 아직 양반과 상민, 서민의 계급 차별이 존재하던 시기였으니, '이 차이로 핍박받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슬로건은 너무 급진적인 나머지 시대 배경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어, 사회적 관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혁명가는 사고의 진전이 너무 빨리 진행되는 나머지 사회적 관성을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던가. 그 뜻이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선구자는 기득권의 돌팔매를 맞을 수밖에 없나 보다.
보호수 제도의 활용과 의의에 대한 고(考)
역사의 산증인으로 그 역사를 목도했을 나무를 세우는 발상은 꽤나 기막힌 발상이라 하겠다. 역사적 사실을 되새김질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맡는 동시에, 그 이정표가 살아있는 대상이니 앞으로도 잘 보존하자는 동기부여도 되는 것. 보호수 제도를 잘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일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뭐,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사업이 많아지다 보면, 혹여 별 관련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같다 붙여 만든 것이 아니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는다거나,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고는 판단되지 않는 사례를 덧붙여 사익을 위해 자기 소유의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거나 하는 일이 따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또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이 되리라. 기존의 취지를 잊지 않는다면 좋은 제도로 존속할 수 있을 것.
달성공원 안에 있는 서침나무도 그렇고, 이 최제우나무도 그렇고, 온 사방으로 뻗은 가지를 가진 회화나무는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킬 만큼 갈필의 거침과, 연묵의 포용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4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쳐 이런 기운을 뿜게 된 것이니, 주변에서 흔히 보는 가로수와 비교하기 뭐 하긴 하지만, 미끈한 선을 가진 느티나무, 꼿꼿한 은행나무와 사뭇 다른 운치가 있다.
줄기가 떨어진 자리에 빈 부분은 수피형성술이 되어있다.
나무 주위는 유기질 바크로 멀칭 처리가 되어있고, 둔덕을 만들어 물을 준 흔적도 보인다. 워낙 올해가 비가 자주 오지 않아 가물었으니, 신경 써서 마를 때마다 물도 주는 모양. 과거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언제나 교두보로서의 현 세대가 가지는 의무가 될 것이다.
명 칭: 선화당(시도유형문화재 제1호)
지정종목: 유형문화재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관아
수량/면적: 1동
지정일: 1982-03-04
소재지: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 선조
소유자: 대구광역시
관리자: 중구
일반설명: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전문설명: 이 선화당은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정청(政聽)으로 쓰이던 관아건축(官衙建築)으로 현존하는 관아건축의 실례들이 별로 없는 점을 생각할 때 큰 가치를 지닌다. 본래 안동(安東)에 있던 경상감영은 선조(宣祖) 34년(1601) 관찰사(觀察使) 김신원(金信元) 때 옮겨졌고, 그후 현종(顯宗) 11년(1670)과 영조(英祖) 6년(1730), 순조(純祖) 6년(1806)의 세 차례에 걸쳐 소실(燒失)되었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1807) 관찰사(觀察使) 겸(兼) 부사(府使)인 윤광안(尹光顔)에 의하여 중건된 것으로 그후 경상북도(慶尙北道)의 도청(道廳)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현청사로 이전(移轉)된 후 1970년 중앙공원(中央公園) 조성(造成)시 보수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주심포(柱心包) 양식(樣式)과 익공식(翼工式)의 절충형 공포(공包)를 이룬 2고주(二高柱)7량가(七樑架)의 집으로 겹처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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