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大邱 老巨樹

대구시 노거수 예방기(禮訪記) (동구 평광동 광복소나무 / 은행나무)

초암 정만순 2017. 9. 18. 08:21


                  


                   



평광동 첨백당 / 광복소나무 / 은행나무









촬영일 : 2017. 9..11 (맑음)

촬영자 : 솔바람(정만순)

소재지도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463-1

- 보호수 지정 : 보호수6-6(1982년 10월 30일)

- 관리인 정보 : 수성구청 도시관리과 산림담당

- 소유자 정보 : 대구광역시(시유지 47평)

                                 

찾아가기

첨백당과 광복소나무 그리고 은행나무 2그루는 동일 공간에 고유의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존재하고 있다.

평광동 가장 안쪽의 아늑하고 신비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평광동 마을 끝까지 올라가면 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팔공1번 버스를 타고 평광동 종점에 내리면 지척이다.




첨백당(瞻栢堂)


문화재자료 제13호 (1984. 7. 25 지정)
소재지 : 동구 평광동 970

 

1592년 (宣祖, 선조 25) 임진왜란 때로 추정된다. 단양인 우익신(丹陽人 禹翊臣) 자는 유의(有義)가  난을 피해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1子 1孫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팔공산(八公山) 남쪽 용암산(龍岩山) 계곡내의 작은 평지에서 복거(卜居)하게 된 것이 평관동(坪廣洞)  단양(丹陽) 우씨(禹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첨백당(瞻栢堂)은 그의 12세손인 우효중(禹孝重)이 자기 어른의 병환이 위독하자 단지(斷指)하여 그 피로 회생(回生)케 하였고 돌아가신 뒤로도 3년 시묘(侍墓)의 효행(孝行)으로 벼슬이 조봉대부중몽교관 동지중(朝奉大夫重蒙敎官 同知中) 추부사(樞府事)에 증직되었는데 이 우효중(禹孝重)과 한말의 국운의 기움을 슬퍼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산 우명식(禹命植)의 절개를 기리며 아울러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1896년(高宗, 고종 33)에 세운것으로 1924년에 중수(重修)하였다.

당호(堂號)는 우명식(禹命植)의 묘소가 있는 "잣밭골(栢田谷, 백전곡)들 우러러 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첨백당이라 하였으며 150평의 안마당에 건물은 5樑(량)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박공면에 내림지붕이 붙어 있다.

대청은 우물井자형이고 양쪽 툇마루는 대청보다 1자가량 높으며 난간이 아담하게 둘러져 있다.

또 넓은 바깥마당에는 1896년, 집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은행나무 등의 고목과 뒷동산의 울창한 대숲이 사철 푸르게 자라 경치가 빼어나고, 마당 한쪽자리에는 근래에 세운  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 있다.




광복소나무 / 은행나무

보호수 지정 :  대구시 보호수 ( 2ㅡ21호 )(2000년 11월)
소재지 : 동구 평광동 979

수종/수령 : 은행나무 2본(300년), 소나무 1본(100년)

수고/둘레 : 은행나무(20m/2.2m), 소나무(6m/0.8m)




광복소나무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은 날 단양 우씨 첨백당 문중에서 광복의 기쁨을 기리고 망국의 원한을 잊지 않고자
기념식수를 하기로 하고 소나무 3그루를 첨백당 앞에  심었는데 그 중 살아남은 소나무 1그루가 광복소나무 입니다
첨백당 앞에 우뚝 서있는 광복소나무는 높이 6m 너비9m의 기품있는 소나무로 역사 문화 유산이며 향토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앞 마당에 서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수령은 300년으로 광복소나무와 함께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다
300년이란 세월을 느낄수 없을 많큼 은행나무는 힘이 있고 쭉 곧은 형태로 건강해 보인다


평광동(坪廣洞)

평광동(坪廣洞)땅이 평평하고 넓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도동을 지나 평광동으로 향하다보면 골이 좁아서 뭐 그리 큰 동네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좁은 호리병목을 통과 하고나면 넓은 공간이 나타나듯이,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인다.

그때부터의 주변 경관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골 깊숙한 곳에 어떻게 이런 넓은 들이 숨어 있었을까? 마치 세상과는 철저히 격리된 무릉도원처럼 말이다.


을 초입 비림(碑林)

실제로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園記)라는 글에 토지평광(土地平曠)’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는 다르지만 의미로 보면 평광(坪廣)’과 통용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좁은 굴속을 통과하다보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는데, 땅이 넓고 밝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평광동 입향조 우익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상대대의 세거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을 피함과 동시에 후대를 기약할만한 복지(福地)를 찾아 이곳 평광동에 정착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난을 피하기에는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듯하다.

하긴 1,000여 년 전 팔공산 동수대전에서 견훤군에게 신숭겸, 김락 같은 장수를 잃고 혈혈단신 탈출을 감행했던 고려태조 왕건도 바로 이 평광동 실왕리(失王里·시량이·왕을 잃어버린 동네)를 탈출루트로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_송은석님의 글에서 차용_




 사진첩


평광동의 상징인 고목 사과나무~~


첨백당 원경~~


첨백당 정면 전경~~



광복소나무~~



우편 은행나무~~


우공 사적비~~


보호수 안내판~~


광복소나무~~




좌편 은행나무~~





은행이 열린것을 보니 암나무~~





첨백당 표지석~~







첨백헌~~


경지재~~







사철나무 고목~~


목련 고목~~






배롱나무여 안녕~~



참으로 멋진 곳~~

첨백당과 광복소나무, 은행고목 이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