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화엄학의 범주와 사상 개요
1. 화엄학의 범주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화엄경》은 한국불교의 수행과 신앙형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경이다. 불교의식에도 화엄사상이 무르녹아 있다. 특히 한국선의 이해는 화엄사상의 공부 없이는 완전하지 못할 정도이다. 지금도《화엄경》은 불교전문강원인 승가대학에서 이력과정의 마지막 대교과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아무튼 불교, 특히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화엄경》의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하리라 본다.
'화엄사상의 세계'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화엄학의 범주는 대강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화엄사상은《화엄경》의 중심사상이다.《화엄경》에서는 우리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며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도록 교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로《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둘째는《화엄경》을 소의로 하여 체계화한 화엄종의 화엄사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현수법장(643~712)의 화엄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후로 영향을 받고 준 화엄가들의 화엄사상이 있다.
셋째는 한국화엄사상이다. 한국화엄사상은 의상(625~702)과 의상의 뒤를 이은 의상계 화엄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넷째는 화엄교사(華嚴敎史) 부분이다.《화엄경》이 편찬․유통되며 화엄종과 화엄사상이 형성되어간 역사적인 점도 살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화엄에 의하여 수학하고 증득해 가는 수증론(修證論) 부분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사상 속에 수행과 증득의 면이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본 '화엄사상의 세계' 강의에서는《화엄경》을 개설하고, 화엄교사를 약설하며, 중국과 한국의 화엄사상을 고찰함과 동시에 수증의 방편을 살펴나가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화엄경》과 화엄사상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업적에 의거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화엄사상의 개요를 먼저 소개해 두고, 앞으로 그러한 화엄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2. 화엄사상의 개요
1)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법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 몇 가지 방법을 먼저 보기로 한다. 우선 경전 이해의 전통적인 방법은 경의 제목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청량징관(738~839)의《화엄현담》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 7자에 각각 10가지씩 의미를 붙여서 총 70가지로《화엄경》의 제목을 설명하고 있다.《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을 설하는 경이니, 경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대방광불화엄을 경에 담긴 내용, 즉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화엄경》은 대방광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보살의 갖가지 만행화로써 장엄함을 설하고 있는 경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또 경의 내용을 통틀어서 그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데 주목해 왔다. 조선시대 묵암최눌의〈화엄품목〉에는《화엄경》의 대의를 '만법을 통섭해서 일심을 밝힌다〔統萬法明一心〕'라고 하였다. 그후 전문강원에서 이 대의를 그대로 수용하여 경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사용해 왔다.
화엄종에서는 종지를 세우고 있다. 의상은〈법성게〉에서 법성(法性)으로 화엄세계를 노래하였고, 법장은《탐현기》에서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를 주창하고 있다. 이들 방법을 종합해서《화엄경》의 중심사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2) 화엄경의 중심사상
(1) 여래출현(如來出現, 如來性起)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는 첫째로 '여래출현'을 들 수 있으니, 여래출현은 다른 번역으로 '여래성기'이다.《화엄경》은 '대방광불'을 설하는 경이다. 대방광이란 부처님의 체․상․용을 표현한 말이다. 범어로는 방광을 Vaipulya(바이풀리야)라 하여 하나의 붙은 말이나, 한역에서는 '방'과 '광'에 각각 따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 등이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너르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자각, 깨달음의 내용을 펴고 있기에《화엄경》을 정각의 개현경(開顯經)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라기보다 부처님을 설한 경이라 하여《불화엄경(Buddh vata saka)》이라고도 하였다.
경전 성립사적으로 볼 때《화엄경》은 대승보살에 의하여 대승불교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대에 편찬된 초기대승경전이다.《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화엄대경(華嚴大經)은 서력 기원후 3,4세기경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편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화엄경》자체내에서는 경이 설해진 곳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나무 아래이며, 설해진 시기는 성도하신 직후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교설한 것임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엄경》의 대방광불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변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 아님이 없다. 개개 존재가 고유한 제 가치를 평등히 다 갖고 있으니, 여래의 지혜인 여래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여래성기(如來性起) 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한다.
화엄가들은 화엄교주를 융삼세간(融三世間)․십신구족(十身具足)․삼불원융(三佛圓融)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화엄세계는 법신․보신․화신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의 삼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화엄경》에는 처음에 마가다국 붓다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하신다. 그런데 이 석가모니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이시며, 비로자나는 노사나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부처님을 삼불원융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화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세간에 두루해 계시는 변만불(遍滿佛)이다. 화엄가들은 일체 존재를 편의상 불․보살과 같은 깨달은 존재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아직 못 깨달은 존재인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들 정보가 의지해 있는 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 삼세간은 역시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여 융삼세간이라 일컫는 것이다.《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보살, 보살과 중생,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아니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비로자나 아님이 없으니, 기세간 역시 여래출현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융삼세간불이라 한다. 의상은 이를《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서 합시일인의 반시(槃詩)로 나타내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를 열이라는 숫자로 보이고 있으니 열은
이처럼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불의 화현 아님이 없다.《화엄경》은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의상은 이를 법성성기(法性性起)로서 옛부터 부처〔舊來佛〕라 하였다.《화엄경》은 불세계를 교설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는 옛부터 본래 부처인 중생의 원력에 의해 이땅에 구현됨을 밝혀준 것이다.
(2)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 둘째는 일승보살도이다.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는 광명으로만 보이시고 언설을 통해서는 문수(文殊)․보현(普賢)보살을 위시한 보살들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부처님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하여 장엄되며 우리 중생에게 펼쳐지고 있다. 보살이 설하고 있는 그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범부 중생이 바로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이고 있다.
범부와 보살과 부처가 다른 점은 발심에 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만, 그러나 중생과 부처는 또 확연히 다르다. 중생은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처인 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신심과 발심이 필요한 것이다. 신심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이를 정신(淨信)이라고 한다. 이러한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신만 성취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니 곧 발심(發心)하게 되는 것이다. 발심한 중생이 보살이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dhi Sattva)의 준말이니 깨달을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에서는 발심만 하면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하는 때이다〔初發心時便成正覺〕. 그러므로《화엄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성불로 향해가는 인행(因行)이라기보다 정각후의 과행(果行)이며 부처행〔佛行〕인 것이다. 인․과가 둘이 아닌 인과교철(因果交徹)의 인행이며 과행이다. 다시 말해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이다.
《화엄경》의 보살계위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42위(四十二位)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살계위를 52위 또는 53위 및 57위 등으로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팔십화엄》에서는 신(信)은 십신(十信)의 계위로 나타나지 아니하니, 신은 모든 보살도를 받치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42계위의 맨 첫단계인 초발심주에서 발심하여 여래가에 태어난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하나하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앞단계라기보다 낱낱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이타행이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면인 것이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한 53선지식의 낱낱 해탈문도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며, 선재의 구법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을 보살사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지행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보살도를 말함에 있어서〈십지품〉을
〈입법계품〉 못지않게 중시해 왔던 것이다.
(3) 법계연기(法界緣起)
온갖 세계와 중생은 다 비로자나부처님의 현현이며, 보살행으로 불세계가 구현되고 있음을, 화엄교가들은 또한 십현육상(十玄六相)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현수법장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엄종의 종취로서 인과연기 이실법계를 주창하고 있다. 인과연기는 사(事)이고, 이실법계는 이(理)로서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따라서 사와 사가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 이 일진법계의 체는 물론 일심(一心)이다.
불교를 불교이게 한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연기의 진리를 든다. 연기에 맞으면 불교이고 연기에 어긋나면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연기의 진리를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란 '연하여 함께 일어난다'라는 의미인 프라티티야삼우트파다(prat tyasamutp da)의 역어이다. 모든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라는 연기의 이법은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에 적용할 수 있는 까닭에 보통 연기의 기본공식이라 일컫고 있다.
세존께서는 십이연기〔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의 순관과 역관을 통하여 무명을 멸하고 생사의 모든 괴로움을 탈각하셨다고 한다. 이 연기의 진리는 후에 여러 가지로 그 설명방식이 변천되어 왔다. 업감연기(業感緣起)․뢰야연기(賴耶緣起)․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리고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이 그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법계 전체가 비로자나법신의 현현인 것이니, 여래성연기의 여래출현이기에 법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강 화엄경의 편찬과 유통
1. 인도․서역의 화엄경 편찬
《화엄경》은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준말이다.《화엄경》의 원 범명은 알 수 없으니 원본인 범본이 Dasabhumika(다사부미카)라고 불리는〈십지품〉과 Gandavyuha(간다뷰하)라고 불리는〈입법계품〉외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의 제목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세 가지로 재번역되고 있다. 즉 Maha-Vaipulya-Buddha-Ga a-Vy ha S tra(마하 바이풀리야 붓다 간다 뷰하 수트라, 대방광불화엄경), Buddh vata saka(붓다바탐사카, 불화엄경), Avata saka S tra(아바탐사카 수트라, 화엄경) 등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의 한역본으로는 60권․80권․40권으로 된《육십화엄》․《팔십화엄》․《사십화엄》등 3부《화엄경》이 있다. 이중《사십화엄》은〈입법계품〉만의 별역이다. 이중《육십화엄》과《팔십화엄》을 화엄대경(大經)이라고 부른다.
《육십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에 의해 418~420년에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팔십화엄》은 대주(大周, 695~699)시대 실차난타에 의해 역출되었으니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사십화엄》은 당(唐, 795~798)의 반야다라가 역출하였으며 정원본《화엄경》으로 불리고도 있다.
그러나《육십화엄》이나《팔십화엄》은 처음부터 대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각품이 별행경(別行經 또는 支分經)으로 먼저 성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분경을 모아 어떤 의도하에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이 웅대한 화엄대경인 것이다.
화엄부 경전으로는 《화엄경전기》에 《도사경》 1권(지루가참 역, 178~189)․《보살본업경》(지겸 역, 222~228)․《여래흥현경》4권(축법호 역, 291) 등을 위시하여 36부 150권의 지분경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경은 그 역출 시기(2세기~10세기)로 보아, 용수(N g rjuna, 150~250) 이전까지〈십지품〉․〈입법계품〉등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수보살이《십지경》에 대한 주석을 한 데서도 당시에《십지경》이 크게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품으로 구성된, 현《화엄경》과 같은 대경의 조직은 대략 250년에서 350년대의 편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등의 성립은 남방인도에서라고 생각되나 대경인《화엄경》의 편성은 우전(于 )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방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대승불설비불설 논쟁이 한동안 크게 일어나 있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내용이 입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문자화된 아함부 경전과는 다르니, 대승경전은 모두 불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비불설에 대해 대승불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대승경전이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글자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새로운 문자로 다시 편찬한 경전이기에 불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부 경전 자체 내에서도 경의 설처(說處)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도량이며, 설한 시기도 성도 직후로 되어 있다.《팔십화엄》에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하고,《육십화엄》에도 시성정각이며 세친(世親)
그러나 이것은《화엄경》의 역사적 성립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화엄경》의 사상적 특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화엄경》은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2. 화엄경의 유통과 주석 ― 인도․서역
《화엄경》의 유통과정을 보면 법장의〈화엄경전기〉에는 서역에서 전해졌다〔西域相傳〕고 하였고,〈용수전〉에는 용수보살이 바다에 들어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이 있다. 즉 용수보살이 용궁에 들어가 보니 3본《화엄경》이 있는데, 상본과 중본《화엄경》은 그 양이 방대하여 외우기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그 상본《화엄경》은 십삼천대천세계 미진수게송과 일사천하 미진수품이 있었다고 한다(이 내용은 우리가 아침에 예불하기 전에 치는 쇠송 염불문에도 들어 있다). 용수보살은 하본《화엄경》십만게 사십팔품을 외워서 세상에 유통시켰으며 지금 전해지는 한역된 삼대부는 그 중 약본
《화엄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용수 이전부터 있었던《화엄경》을 용수가 비로소 크게 유통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용궁이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에게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남해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용수보살은《화엄경》을 주석하여《대부사의론》100권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입법계품〉에 해당하는《불가사의해탈경》에 대한 주석이다. 용수보살은《십지경》에도 주석을 하였으나 남아 있지 않고〈십지품〉의 일부인 초지와 제이지가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출의《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으로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용수보살의 화엄보살도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용수의 화엄사상은 이외에도 그가 지은《대지도론(大智道論)》을 비롯해《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등에서 발견된다.
4세기(320~400) 혹은 5세기(400~480)경에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세친(Vasubandhu)보살은《십지경론》을 지어《십지경》을 크게 유통시켰다. 이《십지론》은 중국에 전래되어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의 소의가 되었으며, 여기서 보이는 육상설은 화엄 육상원융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용수와 세친은《대승기신론》의 저자로 알려진 마명(A vaghosa, 50~150)과 함께 화엄조사로 숭앙받게 되었다.
마명보살은 용수보살보다 100년경 앞선 50~150년경에 사셨던 분으로 여겨지는데, 이때의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원효의《대승기신론소》․
《별기》에만 해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특징짓기를,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조류라 할 수 있는 중관과 유식의 양 사상을 회통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중관이 파하기만 하고 세울 줄 모르며, 유식이 세울 줄만 알고 파할 줄 모르는 데 비해,《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세우고 파함이 무애하고〔立破無碍〕 열고 닫음이 자재하다〔開合自在〕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관이나 유식사상보다 먼저 성립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기에 세친과 용수보살보다 앞서 살았던 마명보살이 여래장사상이 담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의 저자였기에 후에 화엄종조로 받들어 모셨던 일은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화엄경》은 역사적으로 4세기경에 현재의 대경으로 편성되었으나 각 품들의 최초 성립은 용수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며, 대승적 깨달음의 세계를 개현한 경전 가운데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경에 속하는 것이다.
또, 용수보살의 저서로 되어 있는 것 중에〈화엄경약찬게〉가 있다.〈화엄경약찬게〉는 갖추어서는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이며 줄여서 단지 '약찬게'라고만 부르고도 있다.〈약찬게〉는
《팔십화엄》의 조직과 구성을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으로서 현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독송되는 대표적인 염불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팔십화엄》의 유통은 이〈화엄경약찬게〉의 수지독송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로 되어 있으나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많다.
첫째로〈약찬게〉의 소의경전인《팔십화엄》의 유통과 용수보살과는 연대에 차이가 있다.〈약찬게〉가《팔십화엄》을 소의로 한 것은 '삼십구품원만교(三十九品圓滿敎)'라든지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등〈약찬게〉내용을 보면 명확하다.《팔십화엄》은 39품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9회에
용수보살은 2, 3세기에 활약하였고 화엄대경은《육십화엄》까지도 용수보살보다 후에 3, 4세기경의 편성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팔십화엄》은 용수보살 시대보다 뒤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팔십화엄》의 구성을 간략히 엮은〈약찬게〉가 2, 3세기에 활약하였던 용수보살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둘째로〈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이라면 번역한 이가 있어야 하는데 역자를 알 수 없다. 셋째로〈약찬게〉가 한국에서만 그 문헌이 유통됨을 볼 수 있으며 그것도 가장 오래된 판본이 용성천오(龍星天旿)가 광서(光緖) 11년(1885)에 편찬한《화엄법화약찬총지(華嚴法華略纂摠持)》이다. 그 가운데〈약찬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볼 때〈약찬게〉는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것이 용수보살에게 가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강 화엄경의 구성 조직
1. 경의 구성과 회처의 상징
《화엄경》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화엄경》의 구성 조직을《팔십화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을 도시하면 다음〈표 1〉과 같다.
〈표 1〉《팔십화엄》(7처 9회 39품의 설주와 교설내용)
여기서 처(處)란 이 경을 설한 장소를, 그리고 회(會)란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한다. 경의 설처는 지상에 세 곳이고 천상에 네 곳이며, 보광법당에서는 세 번 설해지고 있으므로 7처 9회이다. 현재 사찰에서 즐겨 독송하는〈화엄경약찬게〉에도《팔십화엄》의 구조가 약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이라 함은 바로 39품을 9회에
초회 6품의 설주는 보현보살로서 삼매에 입정하고 출정한 후에 부처님 세계〔佛自內證境〕를 설하고 있다. 제2회는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신(信)을 설하고 있다. 제3회는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제4회는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제5회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을, 그리고 제6회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있다. 이 4회는 모두 천상에서 설하고 있으므로 천궁 4회라고도 불리니,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끝없는 향상도를 보인 것으로 십지 보살행이 그 대표가 된다.
다음 제7회는 다시 보광명전에서 등각과 묘각의 계위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니,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보살도의 종극은 또한 정각과 일치함을 거듭 지상의 보광명전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8회 역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으니, 보살도를 총괄하고 있다.
끝으로 마지막 제9회는 전편 8회와 대비하여《화엄경》후편으로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9회의〈입법계품〉은 그 내용상 전편에서 보인 불자내증경과 보살도 및 구경지를 선재가 출현하여 재현시키고 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현행에 머물게 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주와 설처 그리고 교설내용 등에 의하여《화엄경》전체의 내용을 보면, 보현보살이 설주가 되어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보현경전계,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문수경전계, 천궁 4회에서 향상되는 보살도를 설하는 십지경전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주․십행․십회향의 삼현은 십지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화엄경》은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 보현경전계와 중생을 발심케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및 보살도의 전개를 보인 천궁 4회의 십지경전계로 분류되고도 있다.
그런데 중생에게 신을 설하는 단계인 문수보살의 설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하는 장소인 보광명전에서 설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부처 종자이기에 부처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으니 인과교철(因果交徹)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주초발심(住初發心)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중생이 신심을 원만 성취할 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데 그 발심을 하는 자리가 십주초인 초발심주이다. 이 초발심주에서 처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 때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후에 펼쳐지는 보살행은 정각후의 이타행이니 인과불이(因果不二)의 불국토장엄행이다.
나아가 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체성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중생은 누구나 자심이 곧 불지임을 깊이 믿는 것을 정신(淨信)이라 하니 이는《화엄경》에 보이는 특이한 신심의 양상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와 다르지 아니함을 믿고 본래의 모습대로 살고자 발심하여 보살이 되면 곧 중생의 본래모습인 부처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경에 다양하게 펼쳐지는 보살행은《화엄경》의 말씀이 중생들, 바로 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고 하겠다.
법장과 의상이 소의로 한《육십화엄》에서는,《팔십화엄》과 대동소이하나〈보왕여래성기품〉에 초점을 맞추어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를 중시한 점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이 설해진 회처를 보면,《팔십화엄》처럼 지상-천상-지상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석존 성도의 장소인 적멸도량․보광법당에서 출발하여 점차 6욕천 중 도리천․야마천․도솔천․타화자재천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지상인 보광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최고의 설처인 타화자재천궁에서 맨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이〈성기품〉이라는 것이다.
설주인 보살의 상징에 의해서도 불과를 드러낸〈성기품〉이 두드러진다. 경은 전체적으로 보현보살〔佛自內證境〕 → 문수보살〔信〕 → 제보살〔住․行․向․地〕 → 보현보살〔佛果行인 菩薩道〕을 통하여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은 전후 네 번에 걸쳐 설주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보현보살행품〉과〈성기품〉에서 설주인 것은 한층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양품이 속해 있는 타화자재천궁회의 타품들은 금강장보살이 설한 십지경전계인 까닭이다. 십지의 구극인 불과는 보현보살을 통하여 설해짐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보현보살은 불자내증경․불과․불과행용 등 통틀어 불경계를 드러내는 보현경전의 설주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래출현(여래성기)의 사상을 가지고 문수경전과 보현경전을 결합하고 그 사이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이《화엄경》구성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문수와 보현에 의해서 비로자나로서의 여래의 현현임을 보인 것은 명백한데, 거기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은 이 양자를 시종으로 하는 보살도의 체계도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조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곧《화엄경》에서의〈성기품〉의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60권《화엄경》이 이러한 의도로 편찬된 것을 잘 파악하여 구축한 것이 의상계 화엄가의 화엄성기사상이라 하겠다.
2. 화엄경 약찬게
이러한《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은〈약찬게〉에도 담겨 있다. 약찬게문은 마지막 제목을 제하면 110구 770자이다.《팔십화엄》을 간략히 엮고 있는 이〈약찬게〉의 체제와 내용을 보자.
귀경송이다. 이는 화장세계의 비로자나 진법신과 보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등 일체 여래와 시방삼세의 모든 대성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다. 이 귀경게에서는 화엄정토가 화장세계인 것과 화엄의 주불이 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과 다른 분이 아님도 시사하고 있다.
화엄교학에서는 삼불이 원융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경주(經主)로 모시니,〈약찬게〉에도 그러한 화엄교학에서의 불신관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경인연력(說經因緣力)이다. 여기서는 해인삼매력에 의하여 전법륜됨을 말하고 있다.
운집대중이다. 보현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살대중과 39류의 화엄성중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이 곧 세주라 불리는 분들이니 그 대표되는 세주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다. 각 회의 설주보살 또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의 근본법회에 모인 대중과 지말법회의 문수보살 설법처인 복성 동방 사라림에 모인 대중들도 보이며, 선재동자의 선지식들도 운집대중으로 언급되어 있다.
선재의 선지식이다. 문수보살에서 비롯되어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이 출현한다.
경의 설처와 품명이다.
유통송이다. 이 경을 믿고 수지하면 초발심시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화장세계에 안좌하니, 그 이름이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약찬게〉의 독송은 중생이 보살행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각을 이룬다고 하는 수행의 길이 된다.〈약찬게〉의 지송은 특히 화엄성중의 보호를 갈구하는 대중신앙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약찬게〉는 한국식 화엄지송경이자 다라니의 역할을 해온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