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近郊山河

한훤고택과 도동서원의 가을 풍경

초암 정만순 2016. 11. 21. 09:23



한훤고택과 도동서원의 가을 풍경





달성군 한훤고택과 도동서원은 현풍·구지면을 아우르며 우뚝 솟은 대니산 자락에 있다.

현풍 소재지에서 구지방향으로 10분쯤 가다보면 오른편에 용흥지가 있다.

용흥지를 지나 직진하면 현풍곽씨 세거지 마을이 나오고, 용흥지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못 끝자락에 ‘소학세향(小學世鄕)’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표지석이 보인다.

 ‘내고향 지리(池里·못골)’란 표지석도 보인다. 연못 끝자락에 부채처럼 펼쳐진 동네가 한훤당 종가가 있는 못골 마을이다.


서흥김씨 세거지 못골마을에 김굉필 선생 종가
‘한훤고택’ 자리해…
小學世家·光霽軒 등 편액에서 인품 짐작


다람재에서 내려 본 도동서원은 ‘산수화’
한강 정구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울창…
선조 하사한 편액 등 유물들도 볼 만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지 관심

◆ 한훤고택




한훤당(寒暄堂)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 선생의 아호이다.



선생의 관향이 서흥(瑞興)이기에 못골 마을은 서흥김씨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수령은 무려 400년.

그 옆에 연자방아 맷돌과 오래된 우물도 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훤고택(寒暄古宅)’이라 새겨진 안내석이 놓여 있다.

 안내석을 따라 외삼문을 들어가니 종택 안집이 보이고, 왼편으로 사랑채인 듯하여 들어서니 네모난 연못이 있고, 오래된 반송이 있는 기와집이 있다.

한훤고택이라 편액한 일자형 건물이다.

축대는 오래 되었으나, 건축물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모습이다.

6·25전쟁 당시 폭격 때문에 불타 없어진 탓이다. 그나마 받침대를 받친 고송이 고가의 전통을 짐작하게 한다.

주인을 못 뵌 채 바깥에서 고택의 대청문만 살짝 열었다.

마루 중앙에 ‘소학세가’란 큰 편액과, ‘광제헌(光霽軒)’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 있다.

소학세가란 선생의 소학(小學) 실천 정신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광제헌은 ‘광풍제월(光風霽月·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이란 뜻으로 맘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의 줄임말이다.

본채를 중심으로 양편에 기와집 두 채와 뒤편 언덕 높은 곳에 가묘(家廟)가 있다.

◆ 도동서원

종가를 잘 보존하고 주위를 정갈하게 가꾸고 유지한다는 인상을 가지면서 도동서원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도동서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한 갈래는 종가에서 구지면 소재지를 거쳐 가고, 다른 한 갈래는 종가에서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거리가 짧지만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필자는 종가에서 왼쪽 낙동강을 따라가는 산길을 택하였다.

풍경이 좋아서다. 강을 따라 한참 가면 가파른 고갯길이 나오고, 고갯마루 다람재에 오르면 도동서원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낙동강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다람재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혹시라도 도동서원에 와 보려는 사람은 이 고개 정상까지 와야만 서원의 전체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서원에 들어서면 입구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한강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의 사액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한다.

평지에 심어진 데다, 오래되어 나무의 형세가 기괴하고 장대하기 그지없다.

나무 앞에 도동서원사적비가 서 있고 ‘수월루(水月樓)’란 누각이 있다.

누각 뒤로 작은 계단을 오르면 주인을 부르는 대문이라는 ‘환주문(喚主門)’이 있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서원을 볼 수 있다.

서원 강당에는 도동서원이란 편액 2개가 걸려 있다. 처마 아래와 강당내부 중앙에 각각 걸려 있다. 강당 중앙의 편액은 선조가 하사한 것이다. 이 편액 아래에도 단아한 정자의 글씨로 ‘중정당(中正堂)’이란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 이외에도 강당에는 오래된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 있다. 강당에서 바라보면 동·서재가 있는데, 당호를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라 이름하여 붙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강당을 나와 서원을 관리하는 분에게 부탁하여 선생의 신도비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전시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도동서원, 한훤당과 정구선생을 소개한 내용과 유물이 있어 탐방객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도 도동서원을 몇 번 다녀갔지만, 올 때마다 계절이 달라서인지 느낌이 다르다. 우리지역에 스승의 인격을 존숭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며, 학풍을 계승해 나가는 도동서원이 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다. 자연풍광과 어우러져 마을전체가 한옥형태로 유지되는 도동서원을 달성군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더욱 잘 보호 유지되었으면 한다.

◆ 김굉필은 누구

도동서원은 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160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한강 정구 선생이 주도하여 세워졌다.

1607년 선조로부터 ‘도동(道東)’이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1607년 정구 선생이 추가 배향된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동서원 이전에 선생을 모신 서원은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쌍계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후인 1568년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달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서원이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한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도동리로 불린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다. 본관은 서흥, 자는 대유(大猷).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金紐), 어머니는 중추부사 한승순의 따님이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김사곤이 수령을 지내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이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선생은 어려서는 성품이 매우 호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다.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에는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방금석문연구회장


조선 전기 유학자 김굉필 기려 세운 대구 달성군 도동리 도동서원

봄볕은 따스한데 낙동강 풍경은 여느 봄과 다르다. 강줄기를 따라 흙모래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포클레인·덤프트럭 바삐 오가며, 흙탕물 일으키며, 죽어라 하고 ‘낙동강 살리기’를 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자모리에서 물길 보며 산길을 오르면 다람재 정상. 현풍면과 구지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2층 전망대에서 ‘강 살리기 공사장’ 일부와, 물길 건너 고령 개진면 들판, 도동서원이 자리잡은 유서 깊은 마을 도동리가 한눈에 잡힌다. 아름다운 강 풍경이다. 고령 땅 개진(개경포)은 강화도에서 뱃길을 통해 합천 해인사로 팔만대장경판을 옮길 때 배를 댔던 포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다람재 전망대 옆엔 조선 전기 유학자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시를 새긴 빗돌이 있다. 도동리는 김굉필을 기려 세운 도동서원이 들어서면서 붙은 이름이다.

중정당과 사당, 이를 둘러싼 담장조차 보물

    

도동리의 무게중심도, 주민들 관심사도, 핵심 볼거리도 도동서원이다. 고리타분한 유교문화의 잔영이 아닌, 볼수록 감동적인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본디 비슬산에 있다가 소실돼 1605년 이곳에 새로 짓고 보로동서원이라 했다. 2년 뒤 선조는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였다. 대니산 일대가 지금도 서흥 김씨 문중 땅인데, 당시 하사된 것이라고 한다.

서원 구석구석 선인들의 사려 깊은 마음가짐이 서려 있고,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볼거리가 숨어 있다. 서원이 북향으로 들어선 것은 이곳이 보기 드문 명당이어서다. 신라 때 금사라는 비구니 절이 있었던 대니산(태리산·수리산) 서북쪽 끝자락,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다.

북쪽을 보고 앉았어도 햇볕은 담장과 마당에서 온종일 놀다 간다. 외삼문인 수월루, 환주문과 강당인 중정당, 그리고 내삼문과 김굉필·정구 위패를 모신 사당 건물이 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들어섰다. 이들을 둘러싼 흙담장도 산비탈을 오르내린다. 담장 안팎엔 수백년 묵은 목백일홍들이 가지마다 새순을 내밀었고, 진달래는 붉은 꽃잎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도동서원을 찾았을 때 마침 2월 향사(3월28일)를 앞두고 각 지역 유림 대표 20명이 모여 향사 준비로 분주했다. 강당과 동재(거인재)·서재(거의재)엔 군불이 지펴지고, 서원 관리사인 전사청 마당에선 돼지를 잡아 손질했다. 잡은 돼지는 머리째 세로로 반을 갈라 생고기 상태로 사당에 모신 두 분(김굉필과 도동서원을 건립한 정구)에게 각각 제사 지낸다. 문화관광해설사 송대섭씨가 중정당 옆의 작은 돌탁자에 대해 말했다. “‘생단’(희생단)이라고 합니다. 향사 전에 잡은 돼지를 여기 올려놓고 고기 상태를 점검하죠.” 제관들이 고기를 살펴보고 합격이면 ‘충’, 불합격이면 ‘불’이라고 외쳐 다시 준비시킨다.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지붕. 기와를 올릴 때마다 새로 찍어 쓴다.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지붕. 기와를 올릴 때마다 새로 찍어 쓴다.


도동서원의 아름다움은 꼼꼼히 살펴볼수록 빛을 발한다. 계단의 돌들에 새겨진 태극무늬·연꽃무늬, 기단석에 박힌 용머리와 다람쥐 무늬, 담장에 박힌 암키와와 수막새의 조화, 지붕 끝 기와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와 제작연대 표시 등, 찬찬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것들이 숨어 있다. 강당인 중정당과 사당, 이를 둘러싼 담장이 모두 보물(제350호)로 지정돼 있다.


앞뜰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

중정당에 걸린 ‘도동서원’ 현판은 두개다. 앞쪽 처마 밑 현판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고, 안쪽의 것은 선조가 내린 현판이다. 담장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진흙에 기와를 박아 쌓은 아름다운 흙벽이다. 예쁘다고 쓰다듬지 마시길. 담장도 보물이니.

서원 앞뜰에는 1607년 사액을 기념해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기둥 같고 들보 같은 가지들을 사방으로 내뻗고 우거져 있다. 높이 20여m, 지름이 약 2.5m에 이르는 큰 나무다. 가지들이 부러질 우려가 있어 시멘트 기둥들로 받쳐놓았다. 서원 뒷산은 아름드리 소나무숲이다. 소나무숲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문·무인석 등 무수한 석물을 거느린 김굉필 묘소가 있다. 위아래로 이어진 3개의 묘 중 가운데 묘다. 맑은 바람 쐬며 산책하기 좋다.

    
소나무 우거진 도동서원 뒷길.

도동리엔 김굉필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에서 건너다보면 오른쪽으로 다람재 능선이 물길에 가로막혀 끊겨 있고, 강 건너쪽엔 작은 야산이 홀로 솟아 있다. 여기에 얘깃거리가 많다. 도동리 주민 서용수(66)씨가 다람재를 가리켰다. “지따랗게 이래 쪼옥 내리뻗응께네 똑 다람쥐맹이로 생기가 다람재라 카는 기라. 건너짝은 깨구리산이라.”

개구리산 앞 물가에 선담으로 부르는 바위가 솟아 있다. 홍수 때 물이 선담을 넘어서면 마을 안쪽까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여년 전까지 도동리엔 나루터가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너가 농사를 짓고, 아이들도 배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람재 능선과 개구리산은 본디 이어져 있던 산줄기였다.

주민 박원도(82)씨가 말했다. “저어기 기다란 능선 있지예. 거가 비암등이라. 비암이 깨구리를 잡아물라꼬 이래 내리오다 고마 요 앞산이 싹 끼어들어가 딱 가로막히가꼬 멈춰버린 기라. 비암이 깨구리를 물었으모 마 그 마을에 장군도 나고 할낀데.” 이어져 있던 다람재와 개구리산은 용이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를 휘둘러 깨어졌다고 한다. 갈라지기 전까진 개진면 쪽 산밑(기와공장 쪽)으로 물이 흘렀다는데, 그곳을 지금도 외나루라고 부른다.

개구리산 밑 절벽엔 주민들이 두려워하던 깊은 소가 있다. 박씨가 덧붙였다. “물속엔 시커먼 굴이 뚫려 있는 기라. 잉어·붕어가 드글드글한데, 옛날 물속에 고기 잡을라꼬 인자 보재기(고기 잡는 잠수부)가 들어갔다가 고마 씨껍을 하고 도망쳐 나온기라. 굴속에서 이심이(용을 닮은 상상의 동물)를 봤다쿠데.”

가물 때는 다람재 능선 끝 물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1986년 다람재 길이 뚫리기 전까지 주민들은 능선 끝 물가의 오솔길을 이용해 현풍을 오갔다.

    

농작물 캐기 등 체험마을 준비 한창

다람재 능선 위쪽엔 김굉필이 부친 시묘살이를 했다는 암자(현 정수암)가 있고, 마을 뒤 산자락엔 정구의 제자였던 사우당 김대진이 지은 정자 관수정이 있다. 정자 현판 이름 그대로 물줄기를 내려다보기 좋은 곳이다.






한훤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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