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穴學/혈자리 서당

삼음교 -추운 겨울, 음정을 기르는 혈자리

초암 정만순 2016. 9. 16. 21:18



삼음교 -추운 겨울, 음정을 기르는 혈자리

      


겨울철 혈자리 이야기를 써야 하는 데 뭘 써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 : “눈 내리는 추운 겨울 하면 뭐가 생각 나? 대설(大雪) 즈음에 사람들은 뭘 하지?”
A : “음...따뜻한 생강차. 맞다! 나 엊그제 생강차 담갔어. 요즘 생강이 많이 나오잖아.”
B : “요새 김장철이잖아...겨울엔 뭐니 뭐니 해도 배추 얼기 전에 김장해야지.”
C : “우리 동네에서는 땅이 얼기 전에 집집마다 큰 구덩이를 파. 겨우내 먹을 감자랑 고구마, 무를 묻어 놓지. 김장독도 묻고.”


이야기는 어느새 각자 집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김장을 했는지, 김치 맛을 내는 비법이 무엇인지, 그러느라 얼마나 고된 노동을 했는지로 흘러간다.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똑같은 질문을 10대나 20대 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눈 오는 날 친구나 애인을 만날 생각이 아니라 김장하고 먹을 것을 저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우리 인생의 봄여름이 다 지나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그나저나 언제 이렇게 늙어버린 걸까?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쁨보다 길이 막히겠다고 걱정부터 하게 된 그때부터?!


겨울이면 뭐가 생각나세요?


사계절에 펼쳐지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리듬 중 겨울은 폐장(閉藏)의 시기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봄과 여름에는 양기를 보양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음정(陰精)을 길러야 한다. 천지 사이를 오가는 기운들을 갈무리하는 겨울, 이 시기에는 다가올 봄을 기다리면서 기운을 응축시켜 내부에 모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해가 뜬 다음 일어나 활동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양기가 허투루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김장을 하고 먹을 것을 저장하는 것 역시 겨울철에 순응하는 것이며 간직하는 기운[養藏]을 돕는 방법이다.


어린 시절 나는 ‘김장’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물론 우리 집에는 식구들이 많아서 김치를 자주 담갔다. 한번 담글 때 배추 50포기 정도. 하지만 겨울철에 김장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내 고향 제주는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다. 겨울에 큰 눈이 내려도 대부분 쌓이기도 전에 녹아 버려서 흙탕물이 되어버리는 날씨라서 밭에서 채소들이 자란다. 그러니 겨울을 나기 위해 김장을 담가 둘 이유가 없었다. 그 대신 이맘때에만 만드는 특별한 저장 음식이 있었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좁쌀엿, 먹어는 봤나?


겨울이 되면 할머니는 마당 한 켠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때서 좁쌀로 밥을 한 솥 가득 지으셨다. 차조로 지은 밥을 큰 다라이(대야)에 퍼 담고서 엿기름을 붓고 따뜻한 아랫목에 담요를 덮어 둔다. 밥알이 삭으면 체로 걸러 물만 따라내고 건더기는 베보자기 안에 넣고 주물러서 물기를 다 짜낸다. 모아 놓은 물을 다시 한 번 고운 체에 걸러낸 다음 솥에다 붓고 계속 저어주면서 끓인다. 1시간 정도 끓이면 감주가 되고 그 상태에서 좀 더 끓이면 조청이 된다. 조청 상태가 되면 거기에 돼지 족발을 넣고 밤새 끓이다 보면 쫀득쫀득 달콤한 엿이 완성된다. 엿에 돼지 족발을 넣는다고 하니 사람들이 놀란다.


“그걸 어떻게 먹어?”
“어떻게 먹긴 숟가락으로 떠먹지.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어휴~ 이상해. 돼지 족발이랑 엿은 너무 안 어울린다.”
“하긴 먹어봐야 그 맛을 알지. 완전 맛있는데.”


엿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들 딱딱하게 굳은 갱엿이나 늘여서 만든 가락엿을 생각하나 보다. 우리 집 엿은 그게 아닌데. 지난달에 서리 맞은 무로 만든 엿이 천식에 좋다고 해서 무엿을 주문했다. 만드는 과정이랑 모양새가 비슷한 떠먹는 엿이라 내심 기대했었다. 무 함량이 80%라 하고, 죽염으로 유명한 인*가 제품이라 그런지 가격도 엄청 비쌌다. 근데 그 맛이 영~아니올시다. 구매자 평에는 괜찮다는 이야기들뿐인데 내가 먹고 자란 엿 맛이 아니었다.  


엿을 만들 때 제일 힘든 점은 엿이 완성될 때까지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바닥에 눌어붙어 타지 않도록 계속해서 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젓다 보면 팔도 아프고 허리와 다리까지 저리는 것이 세상에 이런 중노동이 없다. 식구들이 번갈아가며 엿 달이는 솥을 저었는데 한  밤중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장작불 앞을 지키며 엿을 고았다. 약한 불로 끓이는 동안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 찼던 감주는 점점 진득해지고 검어지면서 잔거품을 내면서 졸아든다.


엿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성을 들여야 하는군요!


완성된 엿을 단지에 담으면 처음 감주에 비해 그 양이 1/3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서였을까? 엿은 그 맛이 기가 막힌다. 벽장 위에 엿 단지를 넣어두고 겨우내 두고두고 먹었다. 할머니가 매일 아침밥 먹기 전에 한 숟갈씩 떠먹여 주셨다. 하루에 딱 한 숟갈! 그게 얼마나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지... 딱 한 숟갈이어서 더 맛있었을까? 언젠가는 벽장 안에 있던 엿 단지를 꺼내 몰래 퍼먹다가 걸려서 엄청 혼나기도 했다.


추억의 맛을 떠올리니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다 문득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사계절 중 겨울에 엿을 만들어 먹었을까? 그리고 매일 한 숟갈씩만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일단 엿에 관해서 『동의보감』은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았다.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달다. 허약한 것을 보하고 기력을 도우며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담(痰)을 삭이고 기침을 멎게 해준다... 엿이라고 할 때는 무른 엿을 말한다...엿은 토(土)에 속하는 것이지만 불로 고아 만들었기 때문에 습한 곳에서도 열이 몹시 생기게 하므로 많이 먹으면 비풍(脾風)을 동하게 한다. 


─『동의보감』 「탕액편」 <이당(飴糖, 검은 엿), 법인문화사, 1858p>

 
의역학 시간에 약을 만들 때 천기(天氣)를 넣어주기 위해서는 술을, 지기(地氣)가 필요하면 엿을 넣어준다고 들었다. 엿이 지기(地氣)를 넣어주고 토(土)에 속하고 비(脾)로 들어가 기혈을 모두 길러주니 겨울철 음정(陰精)을 보하는 데 좋은 것이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엿이 간직한 화기(火氣)가 적게 먹으면 몸을 데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지나치면 비풍(脾風)을 일으킨다. 비풍은 비장에 바람이 드는 것인데 땀이 많이 나고 바람을 싫어하며, 사지가 무기력하여 꼼짝거리기 싫어하고, 얼굴이 누렇게 뜨며 식욕이 없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아무리 내가 더 먹고 싶다고 떼를 써도 ‘매일 딱 한 숟갈!’만 고집하셨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돼지족발은 피부미용에도 좋아요!

엿을 만들 때는 곡식의 싹을 틔워 기가 풀려 나온 것을 가루로 만든 엿기름을 사용한다. 엿기름은 화를 진정시키고 물을 만드는 성질이 있다. 그 기가 순조로우며 이완되어 성질이 느리고 완만하다. 엿에는 이런 엿기름과 곡식이 가진 기운이 함께 들어간다. 엿 만들기에는 찹쌀·멥쌀·좁쌀·옥수수·기장 등 다양한 곡류가 사용된다. 그중 약용으로는 찹쌀을 으뜸으로 치지만 제주에서는 쌀농사가 되지 않는다. 찹쌀이 나지 않으니 밭에서 키울 수 있는 좁쌀을 이용할 수밖에. 차조는 점성이 있고 맛은 달고 시다.




『본초강목』에는 폐병환자가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이는 차조가 폐와 신장 기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떠먹는 좁쌀엿에는 특이하게도 돼지 족발이 들어간다. 돼지는 수(水)에 해당하는 짐승으로 그 맛이 달면서 짜고 성질이 약간 차서 먼저 신(腎)으로 들어가는 성질이 있다. 특히 돼지 족발은 기와 혈을 동시에 보해서 출산 후 젖이 나오지 않을 때 달여 먹는다. 폐와 신장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차조, 신(腎)으로 들어가 기혈을 보해주는 돼지 족발을 넣어 엿을 달여 먹은 것은 겨울철 몸 안에 음정(陰精)을 기르는데 최고의 조합인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음식이지만 엿을 만들어 먹지 않은 지 오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번거롭고 힘든 엿 만들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 특별한 엿 맛은 그리운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 글을 쓰다가 같은 방식으로 돼지고기를 넣은 엿을 만든 사람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만드는 과정을 찍은 사진과 함께 ‘친구가 냄비에 밥하는 것보다 조청 만드는 것이 더 쉽대요.’라고 쓰여 있다. 그 말에 혹해서 ‘장작불 대신 가스렌지로 하면 좀 더 쉬울까? 나도 한 번 해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해본다. 그래도 엿을 만들던 힘든 과정을 떠올려 보면 도전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들어 볼 날이 있을지...



음을 기르고 소통시키는 혈자리, 삼음교


용천혈은 바로 여기!

엿을 만들어 먹으면서 음정(陰精)을 기르는 건 지금 당장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겨울에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건, 혈자리 지압이다. 『절기서당』을 읽다 보면 음력 11월, 자월(子月)에는 발바닥을 주무르라는 말이 나온다. 발바닥에 있는 건 용천혈로 족소음신경의 출발점이다. 우리 몸에는 기운이 흐르는 열두 개의 강줄기, 12경맥이 있다. 이곳은 피(血)와 기(氣)가 흘러 다니는 수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6개의 양경맥과 6개의 음경맥이 있는데 양경맥은 아래로 내려가는 흐름을, 음경맥은 위로 올라가는 흐름을 탄다. 겨울철은 오행상 수(水)에 배속되는데 6개의 음경맥 중 겨울과 관련이 깊은 혈자리는 족소음신경이다. 그 시작인 용천혈을 눌러주면 자월(子月)에 생겨난 일양의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가 온몸을 돌게 된다.



(穴)은 그 경맥의 흐름 중간 중간에 기(氣)가 모여 있는 구멍이다. 우리 몸에는 365개의 혈자리가 있는데 이들 각각은 인체 각 장부와 외부의 기운을 서로 연결해준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혈자리를 눌러 지압을 하면 따로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특별한 부작용도 없다. 혈자리들은 그 위치와 성질, 주치와 작용이 서로 다르다. 수많은 연구와 임상 결과로 밝혀진 혈자리에 대해 알게 되면 누구나 내 몸을 내 손으로 돌볼 수 있다. 이것이 혈자리 공부의 진정한 매력이다.


삼음교혈은 바로 여기!

용천혈과 함께 겨울철에 지압해주면 좋은 혈자리는 삼음교(三陰交)혈이다. 족태음비경에 속하는 이 혈자리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리에 있는 3개의 음경맥(족소음신경, 족궐음간경까지)이 교차하는 곳이다. 위치는 안쪽 복사뼈 끝에서 위로 3촌 되는 곳으로 경골의 후면에 있다. 삼음교는 보기(補氣), 보혈(補血), 통맥(通脈), 최산(催産: 출산을 돕는다), 지구(止嘔: 구토를 멈춘다), 이뇨(利尿), 거황(祛黃:황달을 없앤다), 안신(安神:마음을 진정시킨다)작용을 한다.


족태음비경에 속하는 혈자리로 비기(脾氣)를 북돋아 습을 제거하고 부기를 가라앉히는데 간음(肝陰)과 신양(腎陽)을 보하는 작용을 같이 한다. 하초를 조절하는 작용이 뛰어난데 특히 간신(肝腎) 기능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생식기능에 뚜렷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족궐음간경과 족소음신경은 모두 생식기를 지나간다. 삼음교를 자극하게 되면 이 두 가지 경맥이 잘 소통되기 때문에 여성의 월경불순, 불임, 생리통에도 좋고 남성의 생식기 이상 증상(조루, 고환염 등)도 다스릴 수 있다. 하복부 증상을 다스릴 때 두루 사용하는데 정체된 기(氣)를 소통시키는 효과가 뛰어나 하지신경통이나 마비, 하지궐랭(심한 냉증)에도 자주 사용된다. 삼음교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신장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작용이 탁월하지만 자극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동의보감』 「침구」 <족태음비경>편에는 삼음교혈에 관한 조금 엽기적인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옛날 송나라 태자(太子)가 유능한 의사였는데 한 임산부를 진찰하고는 태아가 여자라고 하였다. 서문백은 진찰을 하고 남자와 여자인 쌍태아라고 하였다. 태자가 성질이 급하여 배를 째고 보려고 하니 문맥이 말하기를 내가 침을 놓아 떨구겠다고 하고 침으로 삼음교혈에는 사하고 합곡혈에는 보하였더니 과연 태아가 떨어졌는데 문맥의 말과 같았다. 그러므로 임산부에게는 침을 놓지 말아야 한다. 


『동의보감』 「침구」 <족태음비경>


자신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산모와 아이를 다 해치려고 한 무지막지한 태자. 그의 진단이 맞았다면 아마 문맥의 목숨도 온전치 못했을 터. 삼음교는 난산일 때 아이를 빨리 낳게 하고, 뱃속에서 죽어버린 태아가 나오지 않을 때 사법(기운을 빼는 방법)으로 침을 놓아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혈자리다. 문맥은 이런 혈성을 이용해서 아이와 함께 죽을 뻔한 임산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어쩌면 그 자신의 목숨까지도. 똑같은 칼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처럼 지식과 기술 역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용법이 중요하다.


한 해 잘 마무리하세요~


겨울은 한 해를 갈무리하고 내년 계획을 세우면서 새로운 씨앗을 준비하는 시기다. 임산부라면 용천혈을! 그렇지 않다면 용천과 삼음교를 주무르고 문지르면서 우리 몸의 음정을 기르자. 새로운 씨앗은 겨우내 모아진 음정을 받아 단단해지고 새봄에 불끈 솟아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