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林 江湖/조선권

본국검(本國劍)

초암 정만순 2016. 9. 11. 13:50



 본국검(本國劍)


신라화성서 기원… 전후좌우로 공격·방어 구사
조선시대엔 왕의 최측근 호위무사들이 익혀
무예 종주국으로서의 자주성·진취성 드러내


◇무예지 ‘무예도보통지’에 삽입된 본국검 장면.
우리 역사의 시원엔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있다. 단군은 대체로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적어도 성읍국가 혹은 초기 국가의 단계를 청동기 이후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성립과 가부장제는 시기적으로 병행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무사로서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은 전쟁이 빈번하고부터이다. 인구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생존경쟁이 심화되고 인간 특유의 권력경쟁이 일어나고부터 집단 간의 전쟁은 가속화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국가이다. 적어도 청동기라는 금속무기를 사용해야만 여러 집단을 아우르고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선진의 무기체계가 없으면 국가라는 대단위 살림살이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에서 내려온 민족 검의 정수 본국검을 국방부 전통의장대가 시연하고 있다.
중국과 다른, 한국의 청동기를 흔히 북방식 혹은 요령식(遼寧式) 동검(銅劍)이라고 한다. 흔히 스키타이·미누신스크 계열이다. 이 청동기를 토대로 성립한 국가가 고조선이다. 비파형동검(요녕식동검),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청동방울이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최근 요하(遼河) 지역의 ‘홍산(紅山)문명’의 발굴은 고조선과 관련된 것으로, 혹은 고조선의 실체로까지 내다보게 한다. 요령 지방은 앞으로 계속해서 고고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로 그 요령식 동검은 우리 조상의 칼(검)문화의 상징이다.

‘본국검’(本國劍)은 적어도 우리의 정통무예 체계가 삼국시대, 나아가 고조선으로까지 그 뿌리가 올라간다는 것을 천명한 명칭이다. 본국검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 ‘본국검(本國劍)-조선검법교정’을 내고부터이다. 

◇단행본 ‘본국검’ 표지.
그 전에는 무예서적이나 실록, 사서에는 그런 말들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전혀 그것을 몰랐다. 본국검이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현종 14년(1673)에 실시한 관무재(觀武才)의 종목이었음을 전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이다. 그 전승의 경로에 대하여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본국검의 세명(勢名)이 ‘조선검법 24세보’와 동일하고 그 기원이 신라의 화랑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본국(本國)이라는 명칭에는 임진왜란이란 참상을 겪은 우리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단군조선’을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한국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거리인 인사동 길을 걸어 들어오다가 수도약국 빌딩 4층(서울 종로구 인사동 21)에 오르면 ‘십팔기 보존회’(회장 辛成大)가 있다. 이곳은 해범 선생이 복원한 ‘십팔기(十八技)’를 그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도장이다. 66㎡ 남짓한 그리 넓지 않은 도장이지만 옹골차게 십팔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십팔기 보존회는 2002년 10월 3일 국립민속박물관이 주최한 개천절 기념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를 계기로 탄생하였다. 현재 150여명의 대학교수와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두고 500여명의 무예인이 활동하고 있다.

해범 선생은 구한말의 무관이었던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으로부터 십팔기를 배워 일평생 동안 전승과 보급을 위해 노력해왔다. 오공 선생과 해범의 만남은 해방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인 해범 선생은 일제 말기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가족을 따라 지리산 골짜기 문암(門岩: 장흥군 위치면, 화순군 도암면, 나주군 다도면의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 살았다.

본래 도가(道家) 집안으로 그 집안에서 내려오는 양생법과 간단한 무예를 연마하는 정도로 있었다. 그 시절에 왕래하던 지인들 중에 오공(晤空) 선생이 있었다.

◇해범 김광석 선생.
오공 선생은 부산 피난시절에 혼자 피난 온 해범(당시 16살)을 발견하고는 막무가내로 붙들어 함께 살게 했다. 낮에는 먹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고,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해범을 데리고 뒷산(천마산)으로 올라가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그때마다 오공 선생은 항상 ‘십팔기’를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 ‘무예도보통지’란 책도 없었으며, 오직 사제간에 일대일로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팔기를 비롯한 무예 전반에 대한 이론과 실기, 그리고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생법과 한약학을 반강제로 4년여 가르쳤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오공 선생은 해범에게 함께 산으로 가 수양의 길로 갈 것을 몇 번이나 권했으나, 해범은 이를 거절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중에라도 오공 선생을 다시 뵙게 되리라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학생 운동에도 가담했던 해범 선생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 돌연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옛 문중 어른들을 찾아 전국 산천을 유람하며 한동안 수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6여 년 동안의 수행 끝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해범 선생은 1970년 서울역 부근에 최초로 십팔기 도장을 열었다. 흔히 십팔기라고 하면 중국무술쯤으로 생각한다. 십팔기라는 말을 오공 선생으로부터 들은 해범 선생은 후에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그곳에 십팔기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복원을 결심한다.

그 속에서 추려 우선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 선생(전 문화재위원장)과 함께 ‘권법요결(1992)’과 ‘본국검(1995)’이라는 책자를 냈다. 그가 일련의 책들을 번역하고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은 우리 무예의 뿌리와 줄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또 무(武)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무(武)도 문화일진댄 시대에 따라 흐르고 변하는 것이다.

문화의 교섭과 이동과 주고받음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롭게 놓음으로써 족보 있는 발전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국검은 십팔기 가운데서도 하이라이트에 해당합니다. 옛 화랑도의 무예가 어떠했을까를 상상하는 데에 본국검은 실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검법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선조들이 그나마 전통무예에 관심을 갖고 당시에 정리하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그래서 명맥을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국검은 ‘조선세법 24세’를 바탕으로 그 일부 세(勢)를 가지고 기존의 검법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일명 ‘신검(新劍)’이다.

‘조선검법 24세’를 전부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개인 무예가 중에서도 탁월한 자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대체로 그중 ‘10세’도 하기 힘들다. 그래서 본국검을 창안한 것이다.

흔히 무술이라고 하면 삼국 중 고구려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광개토대왕이나 고구려, 발해 등이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의 검술을 가르쳐주는 서적에 기록된 무보(武譜)는 없다. ‘산중(山中)무술’로 비전되는 것으로 기천문(氣天門) 등이 있지만 아무래도 책에 비해서는 정확성이 아쉽다.

신라는 비록 나당연합에 의해 당나라의 도움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달성하였지만 통일의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결코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나라와 신라는 동아시아 세력의 판도를 바꾸는 대전쟁에서 전자는 삼국의 정복을, 후자는 삼국의 통일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백제 멸망(660년),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한반도에서 물러가지 않고 도호부를 설치해 사실상 직접 통치를 강행하려 했던 당과 맞서 마지막 사생결단의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양에 있던 당의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너머로 쫓아내기까지 7년간의 대당투쟁은 실로 백제나 고구려를 멸망케 하는 전쟁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의 통일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대당(對唐)투쟁 전쟁에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하는 것이어서 오늘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전에 비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화랑이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화랑정신만으로 결코 통일이 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뒤에는 결국 상응하는 무기 및 무예 체계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본국검이다.

본국검은 신라의 화랑 황창랑(黃昌郞)에서 기원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황창랑은 나이 7세에 백제에 들어가 시중에서 춤을 추었는데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이루었다. 백제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불러들여 마루에서 올라와서 칼춤을 추게 하였다. 춤을 추던 창랑이 기회를 타 왕을 찔렀다. 이로 인하여 백제국인이 그를 죽였다. 신라인들이 창랑을 애통히 여겨 그 얼굴 모양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 본국검은 아마도 신라에서 왜국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도 한반도에서 넘어간 삼국의 무인정신이 일본적인 것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본국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소위 안법(眼法),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 격법(擊法:擊刺格洗)에 능해야 한다. 눈이 밝아야 손이 빠르다.

눈과 검의 동작 배합은 함께 시작하고 함께 움직이며 함께 고정되어야 한다. 눈이 보는 동시에 손안의 검도 목적하는 곳에 도달하여야 한다. 세(勢)가 고정되면 눈을 전방이나 검 끝을 평직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세가 움직이면 눈도 따라 움직여야 한다.

손은 실질적으로 상대의 검과 마주치는 신체의 최전방이다. 어깨는 몸이 검과 통하는 길에 있으며 경력(勁力)을 전해주는 관문이다. 세가 변할 때는 부드럽고 순조로워야 하며 세가 정해질 때는 어깨를 낮추고 겨드랑이를 허하게 해야 한다. 팔꿈치는 신체의 상지(上肢) 증 중절로 영활하게 변하여야 하고 내려뜨리지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손목은 검법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곳으로 원활하면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어깨, 팔꿈치, 손목은 삼절(三節)이라고 한다. 삼합(三合)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신 회장은 “실지로 무술을 할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완전히 몸에 익어 있지 않으면 정작 대결을 할 때는 쓸 수가 없습니다. 무예인들은 자기가 잘 쓰는, 몸에 익은 서너 가지의 짧은 ‘투로’(套路·연속동작 방식)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국검은 ‘본국’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예의 종주국으로서 자주성과 진취성을 드러내고 있다. 본래는 양날의 검을 사용하는 검법이었으나 십팔기로 정리되던 당시에는 이미 도법으로 사용하였다.

전후좌우로 공격과 방어를 구사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매우 활달한 검법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최측근 호위무사인 무예별감들이 특히 이 본국검에 능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국군 전통의장대가 이 본국검을 익히며 화랑의 통일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고조선의 주체 세력은 북부여에서 다시 고구려로 대통이 이어졌지만 유민들의 일부는 북으로 가서 선비족이 되고 남으로 분리된 일부는 동호족으로 불렸다.

이 동호족이 고조선의 철기문화를 가지고 남쪽으로 흘러들어 신라를 건국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주체 세력이 분파되어 세운 나라이므로 고구려·백제·신라는 모두 고조선의 후예로 단군조선의 전통을 잇고 있다. 본국검에는 이처럼 유구한 한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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